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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회귀해버렸습니다-123화 (123/161)

123화.  < 썩은물은 위기에서도 고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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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걸어오는 두 사람.

그들은 분명 내가 알고 있던 바포르와 임수아였다. 그러나 똑같은 건 껍질뿐, 속은 다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겉 형태는 사이다인데 내용물은 콜라로 바뀌었다는 표현이 적절하려나.

색과 맛, 마치 내용물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낯설고 불쾌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글라키...”

그 이름을 담자 칠흑으로 물든 두 쌍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감사를 표해야겠군.」

「너로 인해 본좌는 강림을 이룰 수 있었다.」

분하지만, 녀석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마 관람자는 강력한 금제로 인해 현세에 강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규칙에는 구멍이 있는 법. 관람자들이 현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즉 인과에 개입할 방법은 분명히 존재했다.

글라키의 경우에는 그릇이 될 현세의 존재와 제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과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지만, 그 모든 명분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으득!

이를 꽉 물었다.

종말을 막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내 모든 노력은 녀석이 인과에 개입할 명분을 만들어줬을 뿐이다.

청해호를 피로 물들인, 이 수많은 이들이 제물이 된 건 물론 동료들마저 녀석의 그릇이 되고 말았다.

이 엿 같은 기분을 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글라키 녀석을 처리하는 것.

하지만 그 방법을 알면서도 쉽게 손을 뗄 수가 없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장악하는 강렬한 기세 때문에?

아니. 바포르와 임수아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두 사람을 신장으로 삼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글라키라는 거대한 존재를 받아들이면서 완전히 소멸한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만약 그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당장 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존재. 그것을 확인한 이상 글라키를 몰아내고 두 사람을 다시금 원상태로 복구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희박해도 좋다.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결국, 네 녀석이 원하는 게 강림이었나?”

강림을 이루어 기분이 좋을 녀석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렇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드디어 본좌의 사육장이 마련되는구나!」

이미 지구를 자신의 사육장으로 만든 것처럼 기뻐한다.

딱 예상했던 흐름이다.

아마 글라키를 비롯한 관람자 모두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금제가 가해져서 그렇지, 강림이나 현신을 이룰 수 있다면 지구를 차지하는 건 시간 문제라고.

그래서 지금과 같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걸 자신의 손에 넣었다고 착각하는 중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흐으.」

「네 녀석의 앙큼한 생각이 전해지는구나.」

음흉하게 웃은 글라키가 눈이 가늘어진다.

「이 하찮은 것들을 되돌릴 생각이냐?」

「그렇다면 그 방법을 알려주지.」

스륵.

바포르와 임수아의 이마가 갈라지며 섬뜩하게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찮은 것들을 되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본좌의 눈을 파괴해라.」

「물론 그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게 자신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노출했다.

왜?

확신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쿠쿠쿵!

돌연 일어나는 강렬한 진동.

녀석의 강림과 함께 모든 의식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쨍그랑!

아직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인신공양의 제단, 그곳 주변의 공간이 산산이 부서졌다.

「명을 받듭니다!」

힘찬 외침과 함께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팟!

깨어진 공간을 넘어서는 이들. 마치 맞춘 것처럼 하얀 베 옷을 입은 그들은 선계의 존재인 신선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겪어 본 가장 강력한 신선은 여동빈이었다.

투선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팔선,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자랑했던 여동빈. 하지만 지금 나는 여동빈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강력한 존재들과 대면해야만 했다.

어마어마한 기운을 품은 절대의 존재들이 수십, 수백 명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에 나타난 존재와 비교하자면 조족지혈이었다.

저벅.

느릿한 걸음걸이에 담긴 힘은 미증유의 영역.

은은한 빛을 발하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통천관通天冠을 쓴 이.

시황제와 같은 황금색 곤룡포의 중앙에는 ‘天’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서 오라. 나의 수족, 원시천존이여.」

「아니, 담당자 Q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을까?」

마지막을 장식한 건 선계의 수장으로 알려진 원시천존, 아니 담당자 Q였다.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에 뚫어지게 그를 응시했다.

보통 원시천존이라 하면 노인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원시천존은 기존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다른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금발의 미남자.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보석이 박힌 듯한 영롱한 눈동자. 그 모든 게 하나처럼 어우러진 절세의 미남이었다.

“수족...이라고?”

하지만 그 모습이 놀라운 건 아니다.

글라키의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관람자와 담당자는 거의 대등한,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담당자 Q의 직위를 가진 원시천존은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릎을 꿇었다.

“원시천존, 주인님을 뵙습니다.”

비단 그만이 아니다.

“현세의 강림을 경하드립니다.”

장내에 등장한 모든 신선이 글라키를 향해 오체투지를 했다.

그래도 지구에서는 ‘신’으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경외는 내게도 낯선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놀라지 마라, 하찮은 것아.」

「본좌는 사육장을 가지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였다. 이 모든 게 본좌가 노력한 결과이니.」

인정한다.

담당자를 포섭할 정도의 노력이라면 글라키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슨 방법을 써서 원시천존과 선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글라키의 전력이라면 지구를 삼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이제 본좌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찮은 것아,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본좌를 감당할 수는 없다.」

고오오!

글라키와 원시천존, 그리고 장내에 존재하는 모든 신선이 강렬한 기세를 발산했다.

후우.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 글라키 하나만 해도 벅찰 지경인데 여기에 더해 선계의 병력까지. 사실상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본좌는 인재를 사랑하는 이.」

「하찮은 것아, 너에게 묻겠다. 본좌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그리고 녀석이 잔뜩 어깨에 힘을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끝내려고 했다면 사실 진즉에 끝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를 휘하에 들이기 위해서다.

「지난번 제안은 여전하다.」

「나의 수족이 되어 영생의 영광을 누려라. 그것이 아니라면 심연에 떨어져 영겁 동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리라!」

이건 마치 사람을 절벽 끝에 몰아넣고 손을 뻗는 격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살고 싶으면 녀석의 손을 잡거나, 아니면 여기서 끝내야만 한다.

“하찮은 네겐 과분한 제안.”

“뭐하느냐. 어서 주인님을 받들어라.”

망설이는 기색을 느낀 신선들이 재촉을 시작했다.

너무 당연한 걸 선택하지 못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

그래. 너희에게는 무척 쉬운 선택이었겠지.

아, 정정해야겠다. 나에게도 무척 쉬운 선택이긴 하다.

굳이 입을 열지 않고 대답을 대신했다.

척.

하늘을 향해 치솟은 중지.

물론 녀석들은 이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흐음. 그건 무슨 행동이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하찮은 것들의 표시인가?」

역시 모를 줄 알았다.

어쩔 수 있나. 손수 녀석들에게 그 뜻을 풀이해주는 수밖에.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가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가시 달팽이 따위에 굴복할 것 같냐?”

대답은 노다.

녀석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그건 죽음을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 내게도 남은 비장의 카드는 있었다.

「감히!」

협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욕을 당한 글라키 녀석은 나를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주인님을 모욕하다니!”

"영겁의 불길 속에서 고통받으리라!”

콰콰콰!

위협이 목적이었던 조금 전과는 다른 기세였다.

더욱이 변한 건 기세만이 아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상상했던 신선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들이 변했다.

꽈드득!

찰나의 순간 변화를 이룬 그들은 괴물이 되어 있었다.

등에는 검은 광택의 가시가 돋아나 있는 달팽이 괴물. 그건 무척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것들이 왜 협력하나 했더니, 힘의 계약을 맺었군!”

그제야 선계가 글라키에게 협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모르겠지만, 원시천존은 글라키와 주종의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그리고 차례차례 자신의 수족들에게도 이러한 계약을 종용했겠지.

그제야 여동빈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말했던 어긋난 길을 간다는 건 아마도 이러한 정황을 포착했기 때문이리라.

찌릿!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았다고 기뻐할 수가 없다.

현세에 강림한 글라키와 녀석의 힘을 받아들인 신선, 아니 이제는 달팽이가 된 녀석들이 내게 살의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꺼림칙해서 이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뭐, 별수 없지. 나도 이렇게 죽기는 싫거든.”

솔직히 말해 이게 비장의 카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떠올릴 수 있는 카드는 이것밖에 없는 것도 사실. 그렇기에 망설이지 않고 카드를 꺼냈다.

[웨폰 소울을 부여합니다.]

[백치의 창에 깃든 무작위 권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백치의 창이 ‘들끓어 오르는 혼돈'Seething Chaos’으로 변합니다.]

웨폰 소울을 주입하자 백치의 창이 변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창의 형태가 아니었다.

공룡의 알을 연상케 하는 타원형의 알 수 없는 무언가. 그리고 나는 일전의 실험을 통해 이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파삭!

손에 쥔 알(?)에 힘을 주자 간단하세 부서졌다.

프스스.

알에서 나온 회색의 기운이 대기에 섞이다가 이내 흩어진다.

뚝!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그것은 관람자인 글라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힘이었고.

[근원의 힘을 느낀 미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스으으-

익숙한 메시지와 함께 등장한 건 내게는 익숙한 관람자.

[근원의 힘을 좇아 기어다니는 혼돈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었다.

들끓어 오르는 혼돈이란 물질은 바로 이 관람자, 기어다니는 혼돈을 소환하는 장치였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당신의 소환에 기쁨을 표합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당신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T...]

[그것은 고대의 언어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의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건 ‘T’라는 발음입니다.]

역시 이어지는 메시지 전달.

지난번 실험했을 때는 A라는 발음을 남겼었다.

지금까지 남긴 메시지를 종합해보면 A, Z, A, 그리고 이번의 T.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메시지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난번에 못했던 일을 마저 하고 싶은데.”

지난번 실험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

[기어다니는 혼돈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전지전능한 존재의 이름을 언급하며 담당자 W의 후보 이연우에 대한 후견자를 모집합니다.]

들끓어 오르는 혼돈은 기어다니는 혼돈을 부르는 일종의 호출 장치였다. 그러나 그 목적은 관람자를 부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나를 도울 만한 관람자를 모집하는 일종의 구조 요청인 셈.

[고대의 존재, 외부의 존재, 위대한 옛 지배자 일동이 침묵을 지킵니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이가 같은 동료, 글라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라키를 상대하기 위한 힘을 내게 보태줘야만 한다. 그렇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녀석들의 곤란함은 내 알 바가 아니다.

"..."

뜨거운 시선으로 기운이 뭉쳐진 곳, 기어다니는 혼돈을 응시했고.

[기어다니는 혼돈이 경계에 잠복한 자에게 알 수 없는 말을 전합니다.]

[경계에 잠복한 자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혈육을 부릅니다.]

[르뤼에의 주인이 당신의 후견을 자처합니다.]

그 효과는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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