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썩은물은 천둔의 검을 받아냅니다 >
================================
“놀랍구나! 어찌 그런 강력한 기운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조금 전까지는 얕보는 마음이 있었던 여동빈. 그가 감탄한 채 물었다.
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품은 기운이란 건 그가 자랑하는 만휘군상, 즉 삼라만상의 기운마저 능가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만물의 기운을 능가하는 것, 사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인벤토리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무한한 아이템의 기운을 흡수했으니까.
“명심해. 템빨이 곧 진리라는 것을.”
창신을 비롯해 지금껏 많은 이들이 말했다. 무구에 의존하는 일을 경계하라고.
하지만 진정한 템빨은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법.
나는 지금 말하고 있다. 그건 극의를 보지 못한 당신들의 오판이라고.
물론 공을 들여 그 생각을 고쳐잡을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건 템신템왕의 각성 상태가 오래 지속하지 않는단 점이고, 이 지속시간이 다하기 전에 그를 쓰러뜨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콰앙!
지면을 박차며 돌진.
팟!
꺼지듯 육신이 공간을 도약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당황한 여동빈이 있었다.
“흡?!"
마치 처음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당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조금 전과 비교하면 움직임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그 변화를 느끼는 중이다.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기운이 전신에 퍼져 있음을.
후우웅!
왼손에 쥔 반고부를 가볍게 휘둘러 공간을 갈랐다.
카앙!
하지만 여동빈은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당황한 상태에서도 손을 놀려 반고부의 궤적을 막은 것.
그러나 조금 전과 같은 손상 알림은 들리지 않았다.
“검기劍氣?!”
과연 눈치가 빠르다.
여동빈은 반고부를 감싸고 있는 황금색 얇은 코팅막의 존재를 파악한 뒤였다.
평범한 기운이 아니다.
몸속에서 용솟음치는 템혼의 기운을 마력으로 전환해 반고부를 감쌌다.
여동빈의 말과 같이 그건 검기,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기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무형의 기를 유형화하여 그 위력을 더한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자면 더 상위의 경지인 심검에 의해 기는 흩어질 수밖에 없지만, 내 기는 달랐다.
무한한 동력을 통한 출력. 그렇기에 심검에 의해 기가 흩어질 틈을 주지 않았다.
“이거나 먹어!”
무기는 하나가 아니다.
피잉!
반고부가 막힌 사이 오른손에 든 궁니르를 찔렀다.
스륵.
하지만 그 움직임을 파악한 듯 잔상을 남기며 옆으로 물러났다.
화악!
피하긴 했으나 다 피하지 못했다.
창 끝에 걸려 있는 건 찢어진 그의 소매자락이었다.
“이런!”
“쳇!”
그는 놀란 것 같지만, 썩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다.
백날 소매자락을 잘라봐야 뭐하는가. 내가 원하는 건 온전한 승리.
키잉, 키잉!
그렇기에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그가 내뱉는 숨결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사삭, 사사삭!
한껏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그려지는 궤적.
별안간 나타난 청색 궤적은 여동빈의 예상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냥 환상이 아니다.
대기의 흐름, 기의 유동, 그리고 근육 하나하나의 미세한 떨림까지 파악하여 그 궤적을 그리는 것.
움직임은 파악했다.
남은 건 그 허점을 파악하는 일.
꽈악.
요란한 동작은 필요치 않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간결한 찌르기였다.
팟!
일섬. 셀 수 없이 많은 연습과 반복을 통해서 그려지는 일직선 궤적이 여동빈을 향해 쇄도했다.
“좋은 움직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여유의 입증이기도 하다.
상대는 고수다. 그것도 억겁의 세월 동안 무학을 단련한 초고수.
카앙!
내 찌르기의 궤적을 정확히 파악한 후 그 궤적을 막아낸 건 물론 심지어 그 힘을 흘려내는 고등의 기술을 발휘했다.
그 짧은 공방전을 통해 오래 전 스승, 창신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그냥 무식하게 힘만 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이렇게. 공격에 허虛와 변變을 담으란 말이다.
아이고, 답답해라.
지금이야 고수를 만나지 못해 힘으로 누를 수 있다지만, 진짜 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강强 일변도의 공격은 무너질 수밖에 없느니라. 변화는 강함을 꺾는다.
명심하거라. 만약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변화의 극치를 깨우친 자와 마주친다면 피해라.
그와 너는 상성상 최악이 분명할 테니...」
그렇게 말하는 창신이 가르쳐준 게 강의 묘리를 담은 창법이었다. 물론 수많은 실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그가 패배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가 우려했던 변의 극치, 그 묘리를 깨달은 존재가 눈앞에 있다.
“좋은 움직임에 대한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스스슥!
하지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의 검이 현란한 궤적을 그렸다.
파아앗!
조금 전 피운 건 하얀 국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붉게 피어난 그건 매화였다.
분명 그는 검을 휘둘렀으나 어느새 세상은 매화가 만개한 꽃밭이 되었다.
그제야 창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던 말했던 변화의 극치라는 것. 지금 여동빈은 그 예상을 훨씬 뛰어 넘은 절정의 경지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키잉, 키잉!
각성을 이루며 발달한 감각이 쉴 새 없이 경고를 보내왔다.
극치의 변화를 육안으로 쫓는 건 무리다.
감각, 그리고 수많은 전투로 쌓은 업을 통해 예측을 해야만 한다.
후웅!
감각이 이끄는대로, 손이 가는대로 반고부를 휘둘렀다.
카앙!
예지와도 같은 예측은 무한한 변화의 궤적을 막았다.
파파파팟!
각성한 능력을 십분 발휘해 공간을 창의 궤적으로 장악했다.
카카캉!
불똥이 튄다.
내 손에서 그려지는 궤적은 여동빈의 매화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접전의 끝은 매화의 소멸이었다.
“무식한 방법이로군.”
여동빈의 감상평은 지극히 간단했다.
감각에 의존하여, 그리고 마구잡이로 난사해 변화를 죽인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런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었을 테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
스윽.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공할 만한 기를 담은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휘잉!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일어난 그 변화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휘오오!
검선 여동빈. 그는 검에 자연을 담아낼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였다.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바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검으로 만들어 낸 재해. 그야말로 검의 재해였다.
빠져나갈 틈새?
모든 공간을 점한 그 바람의 검에서 어떻게 도망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변화의 극치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변화는 개뿔!"
자연을 담은 검. 처음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깨달음에 대한 경의지, 위력에 대한 부분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창신과 여동빈 모두 착각하는 게 있다.
절대적인 힘은 그 어떤 변화도 무시하는 법.
[‘웨폰 소울을 부여합니다.]
[반고부에 깃든 혼이 깨어나 고유 권능 중 하나가 무작위로 강화됩니다.]
[템신템왕의 각성으로 인해 무작위 권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반고부의 고유 권능 ‘신선 가르기’가 한 단계 발전하여 ‘신선 찢어버리기’로 강화됩니다.]
템신템왕으로 각성한 후에는 아이템에 무작위로 부여되는 권능마저도 선택할 수 있다.
반고부가 가진 가장 사기적인 능력은 신선 계열에 대한 강력한 피해 증가였다. 그 능력이 신선 가르기였고, 웨폰 소울을 통해 신선 찢어버리기로 강화되었다.
신선에게 막대한 추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건 상대 신선뿐만 아니라 그가 발휘하는 모든 공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였다.
“큰 거 한 방으로 끝이다!”
기합성을 터뜨리며 반고부를 휘둘렀다.
콰콰콰!
반월형의 모양을 띤 거대한 부기가 바람을 갈랐다.
콰챵!
무언가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들린다.
별 거 아니다. 여동빈이 담고자 했던 자연의 검, 그 중심을 그대로 갈라버린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허어!”
놀란 여동빈이 다시금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라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자연을 담은 검이 이렇게 손쉽게 소멸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변화를 제압한다? 이 무슨...”
“응. 말이 돼.”
팟!
당황한 그에게 접근.
후웅!
한껏 마력을 담은 반고부를 휘둘렀다.
카카칵!
더욱 강력한 혼돈의 기운에 의해 조금 전과는 다른 거슬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
여동빈이 의지로 빚어낸 검, 심검의 날이 상했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현 상태의 반고부는 신선의 힘이 깃든 모든 것에 극상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륵.
힘에서 눌린 여동빈이 다급히 뒤로 물러난다.
축지縮地. 땅을 접는 신선의 도술. 그 절정의 신법을 따라가는 건 무리지만.
"어딜!"
예리한 감각은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쉬익!
혼돈의 기운을 담은,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력한 반월형의 부기가 예측한 지점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갔다.
"..."
더욱 강력한 혼돈의 기가 자신을 덮치고 있는 와중에도 여동빈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포기?
아니. 검선에 이른 그가 자포자기할 턱이 없다.
“불타올라라!”
혼돈의 기를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
화르륵!
그가 방출한 기가 불길이 되어 맹렬하게 타올랐다.
카아아악!
불길은 이내 거대한 화룡의 형상을 취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거친 불길을 발산하는 그것은 여동빈의 분노를 담고 있었다.
“화룡신검 火龍神劍 !”
거대한 화룡이 입을 벌려 부기를 집어 삼켰고.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혼돈의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신검합일身檢合一?!”
창신이 죽음 직전에야 깨달을 수 있었던 그 경지를 너무도 손쉽게 펼치고 있었다.
여동빈이 보여준 그 광경은 내가 행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과 극상성의 기운을 눌려버렸다.
물론 내가 한 것처럼 압도적인 힘이 아니라 극치의 깨달음을 통한 기술로 눌려버렸다는 게 다를 뿐.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그대는 능히 내 마지막 검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반고부의 기운을 눌려버린 여동빈이 마침내 나를 적수로 인정했다.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여동빈이라면 오만할 자격이 있다.
같은 팔선에 묶여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칠선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했다. 아무리 봐도 그 무력은 누군가의 밑에 있을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마지막 검까지 받아낸다면 그대가 지니고 있었던 거대한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검선이나 되서 한 입으로 두 말하지는 않을 터.
사실 그가 내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왜 비밀을 말해주려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다.
막상 그 상황이 됐을 때 비밀을 말해줄 것인지 확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노라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신뢰감을 받는다. 아마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 일격을 받아낸다면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늘로부터 검을 감추니.”
여동빈의 음성이 쩌렁하게 장내에 울려퍼졌고.
“이를 천둔의 검이라 부르노라!”
스륵.
그의 의지에 따라 허공을 떠다니던 검이 사라졌다.
그제야 천둔의 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늘로부터 숨는다. 그것은 곧 검의 형태가 사라지는, 무형 無形의 경지에 이른 검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지고한 경지.
그러나 괜찮다.
[웨폰 소울을 부여합니다.]
[진 궁니르에 깃든 혼이 깨어나 고유 권능 중 하나가 무작위로 강화됩니다.]
[템신템왕의 각성으로 인해 무작위 권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진 궁니르의 고유 권능 ‘절대명중’이 한 단계 발전하여 ‘인과를 탈피한 명중’으로 강화됩니다.]
“가랏!"
전력을 담아 궁니르를 힘껏 투창했다.
어쩌면 이건 우연인지 모르겠다.
무형의 경지에 이른 천둔의 검과 인과율마저도 벗어나는 절대의 명중. 물론 그 싸움의 승자가 누군지는 빤했다.
콰챠챵!
형체를 감춘 천둔의 검을 정확하게 찾아낸 궁니르가 그 절대적인 경지를 깨뜨렸다.
“허어!”
여동빈은 분명 말했다. 자신의 마지막 검을 받아보라고.
그가 말했던 대로 나는 천둔의 검을 받아냈고, 이제는 그가 내게 비밀을 알려줄 때다.
“좋다. 그대는 자격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 말을 새겨듣도록 하라.”
마침내 입을 열어 비밀을 말하려던 바로 그 순간.
쾅!
한 차례의 폭음과 함께 결계가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인과에 간섭하며 마침내 모습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