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썩은물은 종말을 대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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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탑 토벌 티켓
효과: 사용 즉시 천상의 탑 클리어
설명 : 시스템을 무시하는 언령言令의 힘이 깃든 티켓. 사용과 동시에 천상의 탑을 클리어할 수 있다.
단, 천상의 탑 토벌 티켓은 천상의 탑에 입장한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내가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미친 효과의 티켓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맙소사!
그냥 티켓을 찢는 것만으로도 천상의 탑을 클리어할 수 있단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내게 준 건 티켓 한 장이 아니었다.
『천상의 모래시계
효과 : 천상의 탑 공략 성공 시 보상이 두 배 증가
설명 : 시간의 권능이 부여된 신비한 모래시계. 던전이나 탑 공략에 성공할 경우 획득할 수 있는 모든 보상(경험치 획득 아이템)이 두 배 증가한다.
단, 천상의 모래시계는 천상의 탑을 공략할 경우에만 적용된다.』
할 말이 없다.
이건 그냥 미쳤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의중을 묻습니다.]
선물을 준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 반응이 궁금하기 마련.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런 굉장한 선물을 주시고.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요.”
“앗! 큰형님!”
막내의 아부를 따라 해봤다.
괜히 싫은 척하곤 했지만, 녀석의 아부가 듣기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당신의 반응에 매우 흡족해합니다.]
고맙다, 막내야.
시도 때도 없는 너의 아부 덕분에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
[근원의 힘이 효력을 다했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 기어다니는 혼돈의 존재가 희미하게 변합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관람자 일동과 관리자 Y에게 눈을 부라립니다.]
[관리자 Y와 관람자 일동이 눈을 내리깝니다.]
스스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경고성 눈빛을 발사한 그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다른 관람자들과는 달리 기어다니는 혼돈에게는 제한된 시간이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것이 내가 걸고 있는 소원의 목걸이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기어다니는 혼돈은 지금 여기서 등장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의문이다.
도대체 이 목걸이가 뭐기에 나타나서는 안 될 존재가 나타난 것일까.
아니. 애초에 이것을 내게 남겨준 할아버지의 정체는?
게다가 녀석이 말한 A라는 발음. 그것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이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만이 머릿속을 지배할 뿐이었다.
[사나스의 공포, 뱀들의 아버지, 바람을 타고 걷는 자가 당신에게 작별의 인사를 전합니다.]
관람자들이 알림을 전달하면서 상념을 깨졌다.
그제야 깨닫는다. 기어다니는 혼돈을 사라졌으나 여전히 다른 관람자 일동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가요. 우리 다음에는 만나지 맙시다.”
중립의 입장을 표명한 녀석들에게는 별다른 유감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문제는 나머지 셋이었다.
[어둠을 기다리는 존재, 고지로부터 내려온 공포, 죽은 꿈들의 지배자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이를 갈고 있습니다.]
과연 예상했던 반응이다.
반드시 내게 복수하고 말겠다는 그 집념이 느껴졌다.
“형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했던 것들이 어디서. 너희나 기대해.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아주 혼이 나갈 정도로 패줄 테니까.”
관람자들이 내 상상을 웃도는 존재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녀석들에게 굴복한 마음은 없었다.
초월자? 그래서 뭐.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녀석들과 맞설 힘을 기를 것이다.
[관리자 Y가 당신을 최우선 척결 대상으로 선언합니다.]
[관람자 몇몇이 이에 동의하며 적개심을 불태웁니다.]
물론 관리자 Y. 저 선동자 새끼도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손을 봐줄 테다.
[관리자 Z가 당신의 활약을 조용히 응원합니다.]
오냐.
그리고 관리자 Z야. 제발 영향력 좀 키우자.
그간은 꽤 힘이 됐던 게 사실이지만, 어째 요즘 들어서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갈수록 관리자 Y 새끼에게 밀리고 있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니겠지?
[관리자 Z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구석에 들어갑니다.]
관리자 Z의 시무룩한 행동과 함께 장내를 지배하고 있었던 존재감이 모두 사라졌다.
“주, 죽다 살았네.”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고 하더니. 정녕 무의 길에는 끝이 없구나.”
감당하기 힘든 존재의 등장으로 동료들의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지구에서는 정점을 다투던 이들이었는데 한순간에 벌레보다 못한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아니 벌레가 아니구나. 기어다니는 혼돈. 그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미토콘드리아 정도의 하찮은 존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 아직 우리는 성장 중이니까. 언젠가는 저들과 비슷한, 아니 반드시 능가할 만한 전력을 갖출 수 있을 거야.”
그건 동료들을 위한 말만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각오. 반드시 그것을 이루겠다는 확고한 결의였다.
「주군이라면 반드시 원대한 뜻을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맞아. 내가 또 이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고는 또 못살거든.”
“신뢰. 믿음!”
“마스터를 믿고 따르겠어요.”
내게 맹목적인 충성을 지닌 가디언들의 말에 새삼 힘을 얻는다.
“그래. 반드시.”
결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남은 건 장내를 정리하는 것.
가장 먼저 시선이 닿은 곳에는 흉측한 외형의 라파엘이 있다.
흉측한 괴물의 시신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궁니르에 의해 숨이 끊어진 녀석 주위로 찬란한 빛을 뿌리는 아이템이 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천상이 자랑하는, 일곱 치천사와 함께 탄생한 빛의 무구였다.
전리품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계약을 맺어 변신한 녀석은 관람자의 권능이 깃든 아이템을 드롭했다.
물론 그것에 쉽사리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일전의 일을 떠올리며 스크롤을 사용했고, 광기와 공포의 저주가 깃든 아이템을 정화했다.
“오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고작 라파엘 하나를 처치했을 뿐이지만, 그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어휴. 이제 고작 2층이라니. 이 빌어먹을 놈의 탑을 공략하라면 꽤 시간이 걸리겠네요. 그렇죠 큰형님?”
아직 토벌 티켓과 모래시계의 존재를 모르는 막내가 푸념했다.
“아니. 금방 끝나.”
그 말을 끝으로 기어다니는 혼돈의 선물, 두 장의 티켓을 동시에 찢었다.
화악!
찢긴 티켓에서부터 발산된 빛이 점차 영역을 확장하더니 종내에는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크으!"
강렬한 빛에 의해 안구가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어떻게든 변화를 지켜보기 위해 마력을 집중했지만, 버틸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다급히 눈을 감으며 감각에 집중했다.
마치 몸이 붕 뜨는 느낌, 무중력 상태에 온 듯한 느낌에 휩싸였을 무렵.
[천상의 탑 토벌 티켓을 통해 절대의 언령이 발휘됩니다.]
[축하합니다. 천상의 탑 100%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공략 성공에 따른 획득 전리품이 인벤토리에 보관됩니다.]
[천상의 모래시계가 인과의 영역에 개입합니다.]
[최종 획득 경험치와 전리품이 두 배로 증가합니다.]
[축하합니다. 천상의 모래시계가 가진 강력한 효과로 인해 감춰져 있었던 ‘히든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천상의 탑 공략 100%라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위업 : 천상의 지배자’를 획득했습니다.]
[최고위의 적을 쓰러뜨려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레벨이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8개를 획득했습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레벨이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8개를 획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35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재고 문제로 폐점 상태였던 은하의 상점이 재오픈 했습니다.]
[350레벨을 달성한 당신에게 은하의 상점을 방문할 수 있는 ‘은하의 휘장Galaxy badge을 증정합니다.]
[은하의 휘장을 사용해 온갖 신비한 아이템을 판매하는 은하의 상점을 방문해 보십시오.]
[최단 시간에 천상의 탑을 정복하는 불가능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담당자 R이 이 기막힌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연이어 귓가에 파고드는 알림은 천상의 탑 공략에 성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엥?”
“이게 무슨 일이죠?”
「주군?」
“마스터?”
동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꼼짝없이 7층까지 정복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탑의 공략에 성공했다니 놀랄 만도 하지.
“그렇게 됐어. 잘 됐잖아.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기어다니는 혼돈이 준 선물에 대해 감출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자세한 설명을 해줄 때가 아니었다.
[담당자 R이 당신에게 줄 보상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특정 위업을 달성할 때마다 해당 지역의 담당자가 보상을 정해준다.
담당자 R의 깊은 고뇌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준 선물을 통해 천상의 탑을 너무도 간단하게, 그리고 최단 시간에 공략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외부의 입김을 통한 공략이었기에 녀석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 Y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었다고 성토합니다.]
그래. 너 새끼가 왜 안 나오냐 했다.
기어다니는 혼돈 형님에게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포기를 모른다.
정말 끈질기고 독한 새끼다.
[담당자 R이 관리자 Y의 의견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 팔랑귀 새끼. 고작 몇 마디 거들었다고 넘어가냐.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자, 나와라 관리자 Z. 몸통 박치기다!
[관리자 Z가 교묘한 언변으로 담당자 R을 설득합니다.]
[담당자 R이 그다지 휘둘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효과는 미미했다!
이럴 줄 알았다. 점점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 같더니 결국, 자랑하던 언변마저도 막혔다.
[관리자 Y가 더욱더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담당자 R이 관리자 Y의 의견에 무게를 두기 시작합니다.]
인마. 가장 좋은 패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걸 사용 안 하냐고!
[관리자 Z가 기어다니는 혼돈을 언급합니다.]
그건 결정타였다.
[담당자 R이 관리자 Z의 말에 수긍하며 당신에게 줄 보상을 결정했습니다.]
[관리자 Z가 승리의 미소를 짓습니다.]
[관리자 Y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위합니다.]
[인벤토리를 열어 보상을 확인해 보십시오.]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기어다니는 혼돈 형님은 아주 강력한 패였다.
관람자들도 냅다 팰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권위를 가진 형님이 아닌가. 아직 그 약빨이 남아 있는 상태라면 웬만해서는 먹힐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천상의 탑을 공략해 얻은 전리품, 그것도 모래시계를 통해 두 배가 증가한 상태다. 게다가 기어다니는 혼돈 형님 덕을 본 담당자 R의 편파적인 보상까지.
이제는 그 기쁨의 순간을 만끽할 차례였다.
쿠쿠쿠쿵!
“뭐, 뭐야?”
「심상치 않은 진동이로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세계 전체가 진동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변화인지 몰랐다. 하지만 잠시 후 들린 알림은 이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었다.
[책임자의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지구의 최후 시련이 시작됩니다.]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며 봉인되어 있었던 종말의 일곱 군주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절망적인 위협에 대비하십시오.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구역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뿜어져 나온 그 절망의 기운은 오직 하나.
“드디어 왔구나!”
마음 한편에서는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지구의 종말. 그 마지막 시련이 마침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