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썩은물은 위대한 존재를 빽으로 두었습니다 >
======================================
알림이 말하는 계약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관람자들과의 계약이 진행될 수록 라파엘 녀석이 내뿜는 불길한 기운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계약에 응한 건 일곱의 관람자. 그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계약 형태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나를 극도로 싫어하는 관리자 Y가 있었다.
망할 새끼. 그렇게 이를 갈아대더니 결국, 사고를 쳤다.
[담장자 R이 관람자들의 난입에 난색을 표합니다.]
[관리자 Z가 이건 반칙이라며 소릴 지릅니다.]
[관리자 Y가 계약을 주장하며 관리자 Z를 비웃습니다.]
[담당자 R이 관리자 Y의 말에 납득합니다.]
[존재를 드러낸 관람자들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한 권능을 부여합니다.]
[단단히 화가 난 관리자 Z가 부랴부랴 관람자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관리자 Y가 승리를 예감한 듯, 여유롭게 미소 짓습니다.]
이어지는 알림의 향연. 하지만 이에 신경쓸 새가 없었다.
구구구궁!
장내를 지배하는 건 절로 몸이 떨릴 정도의 불길하고도 낯선 미지의 힘이었다.
이게 전부였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라파엘의 변신은 아직 미완성의 단계였다.
지금도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발산하는데, 완전한 변신을 이룬다면 그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씨발,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나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몸을 떨던 막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 세계에 이런 힘이 존재하다니...」
“실로 불쾌한 기운이로다!”
비단 녀석만이 아니다. 각성 아이템을 통해 어마어마한 전력을 손에 넣은 동료 모두가 미지의 힘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저 막대한 힘 앞에서 수적 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은 채 당할 순 없다.
“정신차려!”
마력을 담은 내 외침이 넋이 나간 동료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언제까지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을래?”
녀석의 변신은 완전치 않다.
그 말인즉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흐아아압!”
쥐어짜듯, 내 몸에 남은 모든 마력을 방출했다.
웅웅웅!
손에 쥔 궁니르는 물론 주변 공간을 장악한 수만의 무기가 진동하며 울음을 토했다.
솨아아-
그와 함께 피어나는 건 색색의 기운이었다.
각각의 아이템이 지닌 고유의 힘, 색색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네 녀석이 변신할 시간을 기다려 줄 것 같으냐!
“아모스의 기적이 모두와 함께할 것입니다!”
파앗!
찬란한 황금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파트로나의 모든 마력, 심지어 생명력까지 소모한 궁극의 기적이었다.
“이거나 쳐 먹어라!”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았던 10개 속성, 그것을 융합하는 데 성공한 막내가 궁극의 마법 키르켄을 던졌다.
“으랴!”
이어서 완전한 불꽃의 인간이 된 바포르가 주먹을 뻗자.
스륵.
녀석을 감싸고 있던 불꽃이 모두 꺼졌다.
화르륵!
대신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불꽃의 주먹이 날아갔다.
녀석의 전심전력이 담긴 일권. 그 위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짜악!
손뼉을 마주친 젤루가 일정 영역의 시간을 제어하는 결계를 펼쳤고.
“무의 정점을 보았노라!”
각각의 방위를 지키고 선 무신과 할배들이 진법을 발동했다.
휘오오!
그 중심에서 기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천마가 남긴 비급을 부단히 연마하더니 대단한 합공을 창안해 낸 듯하다.
「영혼을 속박한다!」
슈슈슉!
스톰브링어에 구속되어 있었던 영혼이 빠져 나와 변신 중인 라파엘을 감쌌다.
영혼을 통한 속박과 약화 효과.
“적을 섬멸하세요!”
어느새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 인형이 임수아의 명령에 따라 라파엘에게 쇄도했다.
비록 인형이라곤 하나 하나같이 대단한 면면을 자랑한다.
수천에 육박하는 군단.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건 종말의 일곱 군주를 비롯, 임수아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절대자들이었다.
가공할 만한 합공. 물론 나도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나와!”
내 마력을 통해 생성된 심연의 구덩이를 빠져 나온 건 지옥의 주민이었던 악마들이었다.
만마. 사탄의 위를 이어받으면서 부릴 수 있게 된 악마의 군단.
“가랏!”
두두두!
내 명령을 받은 만마의 군단이 진군했다.
척척!
예전과 달리 녀석들은 빈 몸이 아니다.
주변 영역을 장악한 수만의 아이템, 절정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무기가 악마의 손에 쥐어졌다.
더할나위 없는 무장을 갖춘 만마 군단이 라파엘을 향해 고유의 권능을 펼친다.
꽈악!
그것을 바라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웅웅!
내 마음을 아는지 궁니르가 요란한 창명을 토했다.
지금까지의 전투를 돌이켜보면 전력을 다한 적이 많지 않다. 물론 대강했다는 게 아니다.
분명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소홀히 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아이템에 의존한 것뿐이었다.
전력이라는 것은 마력뿐만 아니라 내 정신과 육신의 모든 힘을 이끌어내는 것. 그렇기에 내가 전력을 발휘할 경우는 드물 수밖에 없었다.
워낙 막강한 아이템을 갖추고 있기에 굳이 전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이 적이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완전한 변신 상태에서도 날 떨리게 할 정도의 강적이다.
모든 계약을 마쳐 완전한 모습을 보인다면 필패가 분명한 상황. 그렇기에 지금의 공격에 모든 것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
「쿨럭. 제자야. 아무래도 이 스승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끌끌. 여한은 없다. 필멸자로 태어나 위대한 신격에게 도전했고,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으니.
이제 유일하게 남은 미련이 있다면 그 격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소실되는 것이다.
사실 걱정이 앞서는구나.
본디 재능은 뛰어나나 깨달음보다 무구에 집착하는 네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어쩌면 이 마지막 무학은 네 녀석에게 전달되지 않을 지도 모르지.
제자야. 마지막 당부이니 새겨 듣거라.
연마를 게을리하지 마라. 무구를 통해 다가갈 수 있는 길의 끝은 가볍기 그지 없는 것.
네 정신과 육신에 새겨진 모든 힘을 이끌어내어라.
물론 지금은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음을 안다.
지금은 무리이나 언젠가 너도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나게 된다면 그 길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보아라. 이것이 내가 네게 전해줄 수 있는 마지막 무학의 정수이니라!」
인간의 정점, 그리고 신격의 정점이 만난 정상 대전에서 창신은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위대한 신격이 남긴 영혼의 상처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끝까지 생을 유지했다.
이유는 하나. 제자인 내게 마지막 깨달음의 무학을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영혼의 상처마저 이겨내며 전수한 마지막 깨달음. 창과 하나가 되어 나아가는 그 모습은 아직도 내 뇌리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인상적인 장면일 뿐이었다.
잘 만든 이벤트 동영상을 본 기분? 당연한 일이다.
수치로 움직이는 게임에서 깨달음이 왜 필요한가. 그냥 감동적인 장면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게임의 능력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리고 창신이 말한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 창신이 보여준 그 움직임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 당시에는 몰랐던 그 초월의 무학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마지막 순간 보여준 창신의 동작을 떠올린다.
창을 쥔 손아귀는 강하지 않다. 최대한 부드럽게, 여유 공간을 둔 채로 쥔다.
약간 굽힌 무릎은 언제든 튕겨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비축하고 시선은 정면, 오직 적 대상만을 바라본다.
긴장을 푼 육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도록 탄력 있게, 정신은 잘 가다듬은 한 자루의 창처럼 예리한 상태를 유지한다.
스르르.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내 몸 주변으로 피어나는 하얀 아지랑이를 말이다.
「이 깨달음에 다가간다면 네 녀석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백색의 기운을. 그것은 탈혼脫魂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내게 가르침을 전해준 창신. 그의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꽂혔다.
처음에는 그저 개발사가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 경지를 실제로 보고 있다.
어쩌면 이 에오스라는 게임에는 내가 모르는 특별한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밀에 대한 상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금은 에오스의 비밀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동료들과 만마의 군단이 동시에 쏟아낸 맹공이 마침내 라파엘에게 작렬했다.
콰콰콰쾅!
생각보다 그 폭발의 영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변화하는 라파엘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미지의 힘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으으으으으...」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부풀어오른 살점을 찢고 나오는 괴물을 말이다.
마침내 모습을 나타난 존재. 그건 괴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핏줄과 같은 붉은 선이 어지러이 이어져 있는 둥근 몸.
그 사이사이에는 수백 개의 입과 눈이 자리해 있고, 마치 머리카락과 같이 몸체 위에 자리한 붉은 촉수는 수중에서 넘실대는 해초처럼 기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괴물. 문제는 그 흉측한 외형만이 아니었다.
“아!"
“맙소사!”
완전한 변화를 이룬 녀석이 내뿜는 기운으로 인해 동료들의 육신이 격하게 떨린다.
이해한다.
완전한 변신을 이룬 녀석은 동료들의 정신 세계를 압도할 만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나오느라 고생했다. 그러니까 잘 가라.”
깨달음을 얻은 순간 나는 녀석이 내뿜는 미지의 공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팟!
지면을 박찼을 때 이미 공간의 영역을 뛰어 넘었다.
수평으로 꼿꼿하게 치켜 든 궁니르. 나와 별개였던 무기는 마침내 나와 하나의 의지로 이어질 수 있었다.
「창신합일權身合一. 창과 하나가 된 순간 그 누구도 내 앞에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잘 벼린 한 자루의 창이 되어 적을 멸한다.
「크아아!」
촤촥!
목전에 도달한 날 감지한 라파엘. 아니 괴물로 변화한 녀석이 촉수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서걱.
그러나 창신합일을 이룬 날 막을 순 없었다.
가공할 만한 마력이 담긴 녀석의 촉수는 두부와 같이 잘려나갔고.
스윽!
궁니르가, 아니 한 자루 창이 된 내가 라파엘의 육신을 꿰뚫었다.
「...」
오직 적막만이 장내를 지배했다. 그러나 적막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퍼엉!
폭음과 함께 라파엘의 육신이 고깃조각이 되어 흩날렸다.
[천상의 빛 라파엘을 쓰러뜨렸습니다.]
[‘위업 : 제2천의 정복자’를 획득했습니다.]
[고대의 계약자 라파엘을 쓰러뜨렸습니다.]
[‘위업 : 고대의 계약의 무효화’를 획득했습니다.]
[고대의 적을 쓰러뜨려 대량의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당신과 ‘파티’ 상태인 파티원 모두에게 경험치가 분배됩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레벨이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8개를 획득했습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레벨이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8개를 획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무학의 끝, 그 깨달음을 통해 탈혼지경脫魂之境의 스킬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괴물로 변화한 라파엘을 쓰러뜨린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수없이 울리는 레벨업 알림은 물론 지면에 녀석이 사용하던 빛의 무구를 비롯, 불길한 빛을 발하는 고대의 아이템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관리자 Y가 할 말을 잃습니다.]
거기에 더해 관리자 Y 녀석의 반응이 내게 기쁨을 선사했다.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더할나위 없는 상황 종료가 되었을 것이다.
[계약자의 죽음에 관람자들이 분노를 표출합니다.]
[지하를 파고다니는 자가 인과에 개입, 저주받은 언어를 말하고자 합니다.]
[고지로부터 내려온 공포가 인과에 개입, 불길한 언어를 말하고자 합니다.]
...
알 수 없는 기운이 장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림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망할 관람자 녀석들이 관람의 권한을 넘어 직접 인과에 개입하려는 중이다.
[담당자 R이 관람자들의 개입을 저지합니다.]
[지하를 파고다니는 자가 매우 흥분하며 담당자 R을 밀칩니다.]
[과도한 그 행위로 인해 지하를 파고다니는 자가 관람자 자리에서 임시 제외됩니다.]
[관리자 Y가 관람자들의 행동을 응원합니다.]
[관리자 Z가 관람자들을 설득합니다.]
[관람자 일동이 관리자 Z의 말을 무시합니다.]
유일한 내 편인 관리자 Z가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콰아아아!
보이지도 않는 미지의 힘이 더욱 영역을 넓히고 있다.
탈혼지경을 통해 더욱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으나 관람자들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힘을 대비하는 건 무리였다.
만약 녀석들이 내게 손을 쓰고자 한다면 나는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 세계에서 제일 강하면 뭐하나. 초월자들의 손짓 하나에 쓰러질 장난감 병정에 지나지 않는 것을.
허망한 눈빛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음?"
뒤늦게야 목 부근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목에서 녹색의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이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목에 나타난건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무튀튀한 별 모양의 목걸이.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소원의 돌이었다.
[주인의 위기를 감지한 소원의 돌이 미미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건 알림이 말한 것처럼 미미한 영향력이 아니었다.
[소원의 돌과 연결된 근원의 힘을 느낀 미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스으으-
또 다른 관람자의 등장. 하지만 그건 조금 전 모습을 보인 일곱 관람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근원의 힘을 쫓아 기어다니는 혼돈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차원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의 여파가 장내를 휩쓸었고.
[어둠을 기다리는 존재가 위대한 존재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사나스의 공포가 위대한 존재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뱀들의 아버지가 위대한 존재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고지로부터 내려온 공포가 위대한 존재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죽은 꿈들의 지배자가 위대한 존재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바람을 타고 걷는 자가 위대한 존재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관람자들이 경외를 표했고.
[관리자 Y가 울상을 짓습니다.]
[관리자 Z가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관리자 둘은 조금 전과는 극명히 반대되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