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썩은물은 위기도 썩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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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군.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어떻게 이 많은 무구를 구할 수 있었던 거지?”
나는 네가 더 놀랍다.
녀석을 봐라. 처음에 잠깐 놀란 것을 제외하면 태연한 모습이다.
영역을 장악한 아이템의 강력한 힘이 집중되고 있는 마당에 여유를 보인다? 미친 게 아니라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틀림 없다. “응. 안 알려줘.”
그러나 녀석이 무엇을 감추고 있건 알 바 아니다.
라파엘은 내가 쓰러뜨려야 할 대상. 그 사실이 변할 일은 없다.
스으으.
공격의 의지를 실은 마력 파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간 순간.
휘휘휙!
각각의 방향으로 날아간 무기가 현란한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수만 명의 고수가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피어나는 궤적은 가히 장관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어리석은!”
그러나 녀석은 지금까지 만났던 보통의 엑스트라와는 달랐다.
번쩍.
녀석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온 광채가 장내를 환하게 물들였고.
콰쾅!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자욱한 폭발의 여파 속에서도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색색의 궤적 사이로 생성된 은은한 빛의 방패를 말이다.
“달빛과 함께 탄생한 사리엘의 방패를 뚫을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면. 달빛과 같이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방패가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는 순간 내 앞에 특별한 정보를 담은 창이 나타났다.
『사리엘 - 달의 방패
효과 : 마력에 감응해 착용자의 주위를 감싸는 무적의 방패를 생성한다. 단, 이 효과는 3분의 충전 시간을 가진다.』
사실 웨폰 마스터가 되면서 얻은 사기적인 권능 중에는 전투 이외의 것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템 식별. 이 능력으로 인해 내가 소지한 아이템 뿐만 아니라 적이 소지한 아이템의 정보를 대강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라파엘 녀석이 사용한 건 같은 칠대 천사 중 하나인 사리엘의 보물, 달의 방패였다.
완전한 무적의 효과를 자랑하는 방패 생성.
솔직히 놀랍다.
내 웨폰 마스터의 권능을 막아내다니. 과연 천상이 자랑할 만한 아이템이 아닌가.
“좋구나!”
공격이 막혔지만, 기분은 최고조다.
달리 말하면 웨폰 마스터의 권능도 방어할 수 있는 절대의 방패를 손에 넣을 기회였다.
패배?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내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건 라파엘 녀석의 주위를 장식한 7개 아이템, 빛의 무구였다.
녀석을 쓰러뜨린다면 천상의 보물 7개는 내 차지가 될 것이다.
피잉!
내 손 끝에서부터 이어지는 붉은 궤적이 라파엘에게 쇄도했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궁니르는 어느새 달의 방패가 만든 보호막을 통과해 라파엘의 미간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천사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앙!
그러나 궁니르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호오?”
마치 태양을 연상케하듯 주황색 빛으로 이루어진 검 하나가 궁니르의 궤적을 가로막았다.
“황혼과 함께 태어난 미카엘의 검이 나를 지켜주고 있으니!”
아하!
저게 그 유명한 미카엘의 검이로군.
『미카엘 - 황혼의 검
효과 : 자아를 가진 검. 적으로 인식한 존재를 소멸시키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미카엘의 검이라는 건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Ego Sword였다.
흠. 에고 소드라고 하니 미카엘의 검과 어울릴 만한 검이 생각났다.
"가랏!"
인벤토리를 빠져 나온 하얀 궤적이 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카캉!
어김없이 궤적 사이를 파고든 미카엘의 검.
카카카캉!
충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생사의 결투를 보듯, 쉴 새 없이 부딪친다.
천상이 자랑하는 무구인 미카엘의 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그것은 은은한 하얀 빛에 휩싸인 검, 바로 승리의 검이었다.
본래는 베엘제붑이 애용했던 검이었으나 녀석을 쓰러뜨려 내 소유가 된 전리품이다.
승리의 검은 미카엘의 검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이며, 검집에서 벗어난 순간 반드시 상대를 베어버리고 만다는 신화의 검이었다.
이 검이 편리한 이유는 내 정신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웨폰 마스터가 되면서 온갖 아이템을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마력과 정신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템과 달리 승리의 검은 내 정신력이나 마력의 도움 없이 스스로 움직인다.
알아서 움직여도 약하지 않다.
저 막무가내 에고 소드는 스스로 움직일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카캉!
승리의 검과 미카엘의 검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맹렬하게 충돌했다.
어떻게 보면 강력한 검 하나가 봉쇄당한 셈이지만, 내가 손해볼 건 없다.
승리의 검을 제외해도 내게는 무수히 많은 아이템이 존재하니까.
손해라고 한다면 오히려 저쪽, 고작해야 7개 아이템빡에 없는 라파엘일 것이다.
"아만!"
「선봉에 서겠습니다, 주군!」
내 호명에 반응한 아만이 선두에 섰다.
여기서 난 혼자가 아니다.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 라파엘을 공략할 참이었다.
히히힝-
붉은 안광으로 번쩍이는 유령 말, 아만의 성장으로 더욱 거대해진 나이트메어가 힘찬 울음을 토하며 지면을 박찼다.
콰앙!
도약한 그 순간 아만은 공간을 뛰어 넘어 라파엘과 대면했다.
“부정한 기운이여, 사라져라!”
아만이 내뿜는 죽음의 기운에 질색한 라파엘이 빛의 망치를 휘둘렀다.
후웅!
마력에 감응한 빛의 망치가 거대해졌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것은 조금 전 나와 동료들을 짓이기려 했던 심판의 망치였다.
「어딜!」
아만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팔목에 장착 하는 형태의 육각형 방패로 심판의 망치에 맞섰다.
쾅!
초라한 방패로 인해 피떡이 된 아만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주군의 은총이 나와 함께 한다!」
멀쩡한 아만이 의기양양한 외침을 토했다.
당연한 결과다.
각성 아이템 중 방어 효과가 덕지덕지 붙은 아이템 모두를 아만에게 건네줬다.
공격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방어력에 한해서는 나마저도 압도하는 상태인 것.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라파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천상을 오르며 광렙을 거듭한 아만은 트리플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
죽음의 창조자.
골격을 강화해 방어력을 대폭 향상하고, 영혼 에너지를 이용한 방어 스킬은 무적의 탱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의 망치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현재 아만이 완전무결한 탱커이기 때문이었다.
“불주먹 나가신다!”
라파엘의 공격이 아만에게 집중된 사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바포르가 난입했다.
“으랴라라랴!”
파파파팟!
손과 발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보통 생각하는 주먹과 발길질이 아니었다.
화르륵!
공격을 이을수록 녀석의 육신이 불꽃에 휩싸인다.
화신火神. 공격할 때마다 샘솟는 투지가 불꽃으로 바뀌고, 이것이 공격력으로 전환되는 괴물. 당연하게도 이전 염화투사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공격력을 자랑했다.
펄럭!
심상치 않은 힘을 감지한 라파엘이 날개를 펼쳤다.
날개를 이용한 초속기로 그곳을 벗어나려는 시도였지만.
짝!
특유의 손뼉 마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쩌저적!
“흡?!"
이어서 라파엘의 신음이 뒤따랐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 녀석의 날개가 얼어붙었던 것.
“이익!”
발버둥치지만, 녀석을 구속한 빙결의 마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빙결 효과였다면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의 주체, 젤루의 권능은 평범한 빙결의 마력만이 아니었다.
시간 동결자.
젤루가 발현한 빙결의 마력에는 시간을 동결, 구속하는 권능이 부여되어 있었다.
일단 권능이 발현되면 구속에서 벗어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일 수밖에 없는 것.
“돕겠습니다!”
무신과 휘하 할배들이 끼어들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들이었지만, 템빨로 새롭게 태어났다.
콰콰쾅!
손과 발, 그리고 손에 쥔 무기에서 쏟아내는 그 힘이 보통이 아니다.
“이놈들!”
얕보기만 했던 하찮은 필멸자의 반격에 단단히 성이 난 모양.
솨아아.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온 마력에 반응한 빛의 무구가 권능을 발현했다.
산달폰의 마력 지팡이가 주변의 모든 마력을 억제하고, 라파엘의 마도서가 충격을 흡수했다.
각성 아이템으로 도배한 동료들의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의 반항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파트로나, 그리고 수아씨.”
내 호명에 후미에 있던 파트로나와 임수아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신 아모스가 당신에게 기적의권능을 부여합니다.]
[임수아의 상상을 통해 당신은 더할 수 없는 용력을 얻었습니다.]
파트로나의 기적과 임수아의 구현화 능력은 순간적이나마 내 공격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켰다.
각성을 거듭한 임수아는 단순히 인형을 만드는 인형사가 아니었다.
그녀가 지닌 힘의 근원은 상상력. 그렇기에 그녀는 서포터와 같은 ‘버프’ 능력을 전해줄 수도 있었다.
폭발적으로 향상된 힘을 느낄 수 있으나 고인물의 준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적안을 발동합니다. 라파엘의 급소가 노출됩니다.]
[청안을 발동합니다. 라파엘의 시간을 빼앗아 구속합니다.]
자체 버프. 발로르의 사안을 통해 능력을 극대화시켰다.
웅웅웅!
그 힘의 여파에 궁니르가 창명을 토한다.
“수고했다.”
격전중인 라파엘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전한 후.
팟!
궁니르를 투창했다.
퍼억!
투창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건 파열음이었다.
정면, 미간을 꿰뚫린 라파엘의 육신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끝났다.
말살의 권능을 가진 궁니르가 머릴 꿰뚫었으니 녀석은 반드시 소멸하게 될 것이다.
“어?”
하지만 그건 내 착오였다.
그냥 쓰러질 줄 알았던 라파엘이 여전히 대지를 딛고 서 있었다.
“별을 집어삼킨 위대한 존재들이여...”
녀석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공허가 담긴 무심한 눈동자가 창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계약의 증표를 바치니, 부디 하찮은 존재와의 계약을 이행해 주십시오!”
말살의 권능에서도 살아남은 건 녀석이 언급한 계약때문인 것 같다.
녀석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것을 용인해줄 마음이 없다.
“어딜!”
손아귀로 돌아온 궁니르를 재차 투창했으나.
카앙!
절대관통의 권능을 자랑하는 궁니르가 투명한 벽에 막힌 듯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맙소사!
절대관통의 힘을 막은 미지의 힘이라고?
뿌드득!
다음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육신이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한 라파엘의 변화를.
구구구구.
그리고 녀석에게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까지 말이다.
[관리자 Y가 자신과 관계를 맺은 관람자들을 설득했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관리자 Y의 요청을 받아들인 관람자가 존재를 드러냅니다.]
[어둠을 기다리는 존재가 라파엘의 계약에 응합니다.]
[사나스의 공포가 라파엘의 계약에 응합니다.]
[뱀들의 아버지가 라파엘의 계약에 응합니다.]
[고지로부터 내려온 공포가 라파엘의 계약에 응합니다.]
[죽은 꿈들의 지배자가 라파엘의 계약에 응합니다.]
[지하를 파고다니는 자가 라파엘의 계약에 응합니다.]
[바람을 타고 걷는 자가 라파엘의 계약에 응합니다.]
라파엘에게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불길? 아니. 그건 지금껏 단 한 번도 두려움이란 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 내 육신이 떨릴 정도로 강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