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썩은물은 뒤끝이 작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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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탑, 제2천 라키아Reqia에 입장했습니다.]
[라키아는 아직 천상의 완전한 지배를 받지 못한 층입니다.]
[라키아의 관리자 라파엘을 비롯한 권속들은 당신과 동료들의 입장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천상대전에서 패한 타락천사들을 도와 그들이 다시금 바벨탑을 수복할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귀찮게 됐네.”
제2천에 입장한 순간 들린 알림은 이번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실 현재 내 전력으로만 본다면 혼자서 무쌍을 찍는 형태, 그러니까 적들을 쓸어버리는 게 가장 쉬울 수밖에 없다.
그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처치 퀘스트가 가장 난이도가 쉬운 반면, 호위나 특정한 NPC를 도와야 하는 퀘스트는 키보드 샷건을 유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차며 주변을 살폈다.
지면이 구름으로 이루어진 천상의 지역.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그 흔한 환영 인사(?)는커녕 적막하기만 하다.
알림에서 나왔듯 나와 동료들이 진입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당장 목표는 분명 하다.
타락천사인가 뭔가를 돕기 위해서는 녀석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곧장 눈에 마력을 집중, 백안을 활성화했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며 내 의지가 담긴 마력의 파동이 빠른 속도로 영역을 확장했다.
어느 한쪽으로 방향을 잡은 게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으로 마력을 방출해 시야를 넓혔다.
콰쾅!
빙고!
영역을 확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서쪽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고성과 폭발음이 뒤섞인 집단의 전투였다.
한쪽 날개가 검게 물든 천사 무리와 기존의 천사 무리가 뒤섞여 격전을 벌이는 중이다.
아니. 격전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방적인 전투였다.
“제, 제발 자비를...커헉!”
“아아악!”
시간이 지날수록 쓰러지는 건 검은 날개의 천사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완전한 무장을 갖춘 기존 천사에 비해 그들의 무장 상태는 너무도 비루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너희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모두 죽여라!”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3쌍의 날개를 자랑하는 능천사의 명령에 학살이 더욱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오호라!
지금까지 시시하게만 보였던 녀석들의 전투에 급 흥미가 생긴다. 이유는 ‘타락’이란 단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역시 저 검은 날개를 가진 천사 무리가 타락천사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체할 수 없지.
이것들이 감히 내 호위퀘를 방해한단 이거지?
웅웅웅!
궁니르에 마력을 주입하자 맑은 창명을 토했다.
특유의 적빛 기운과 함께 피어나는 건 칠흑의 기운. 적과 흑이 뒤섞이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변화이기도 했다.
스으으-
적과 흑의 기운이 뭉쳐 완성된 것은 궁니르였다.
눈 깜짝할 사이 허공에 수십 개 궁니르가 복사되었다.
우리의 엿 같은 위대한 옛 지배자의 선물을 통해 얻은 무한한 그림자의 창이라는 권능.
“가랏!”
시야를 확장하는 백안과 절대명중, 관통의 권능을 지닌 궁니르, 그리고 여기에 무한한 창의 그림자가 더해졌다.
팟!
검붉은 궤적을 남긴 궁니르가 사라졌다.
동료들은 보지 못한다. 백안을 통해 시야를 확장한 내게만 펼쳐지는 광경.
퍼퍼퍼퍽!
“컥!”
“퀙!”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천사들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
타락천사 무리는 당연히 질 수밖에 없었던 전투에서 승리했고, 나는 단서가 되는 NPC를 구한 셈이었다.
“이게 어찌 된...”
“누, 누구십 니까?”
놀란 타락천사가 사방을 훑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백안의 권능을 거두었다.
“뿌우우!”
이제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내 부름에 응한 베히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 구원자를 애타게 찾는 타락천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
슉!
베히의 권능을 통해 순식간에 타락천사가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원자 등장이요!”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막내 녀석이 우쭐하며 나선다.
“뭐래?”
별로 활약도 없는 주제에 생색내는 막내 녀석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인간?”
“필멸자가 어째서?”
그제야 나와 동료들을 확인한 타락천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그 감정에 섞여 있는 건 놀람과 당혹, 그리고 미약한 적의였다.
어쭈?
이것들이 지금 누구 덕분에 살아났는지도 모르고 적의를 보여?
“지금 당장 돌아가라. 이곳은 너희와 같이 하찮은 필멸자들이 발을 들일만 한 곳이 아니다.”
놀고 있네.
하여간 천사라는 족속은 타락했건 뭐건 생각하는 게 왜 이따위일까.
하찮은 필멸자는 단골 멘트다.
특히 가장 기분 나쁜 건 벌레를 보는 듯한 저 시선.
“지랄하고 자빠졌네.”
“뭣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내 욕설에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타락천사가 나섰다.
“그 하찮은 목숨이라도 보전하고 싶다면...”
「무례한 녀석. 당장 그 입을 다물어라!」
녀석이 말을 마치는 일은 없었다.
아만. 나의 충직한 기사가 스톰브링어를 녀석의 목에 겨누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이 무슨 부정한 기운이란 말인가!”
고유의 무기 스톰브링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부정의 기운은 예전의 녀석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준 각성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기본이다.
사실 아만을 비롯한 동료 모두는 능히 치천사와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상승한 상태였다.
다만 여태까지 활약을 보이지 못한 건 탑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수한 제약 때문이었다.
특정 조건을 갖춰야만 해제되는 무적의 보호막이라든지, 불사의 육신 등. 덕분에 녀석들이 지닌 전력에 비해 활약을 보이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별다른 제약이 없는, 고작해야 능천사 따위에 털리는 녀석들에게는 아니었다.
죽었다 다시 깨어난다 해도 녀석들이 비벼볼 만한 수준이 아닌 것.
“어, 어떻게 필멸자 따위가 이런 힘을...”
여전히 주제도 파악하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어휴.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내가 이렇게 배은망덕한 녀석들을 도와줘야만 하는 걸까?
“하찮은 필멸자, 벌레 같은 필멸자. 어휴. 어쩌자고 자꾸 그런 말을 내뱉는지 모르겠네. 지금 너희 스스로 벌레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보지?”
"..."
내 말에 녀석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봐요. 아주 대단하신 천사, 아니 타락한 천사 양반. 내가 그런 말 들으려고 댁들을 구해준 게 아니거든."
“서, 설마?”
도움을 받은 사실을 떠올린 녀석들이 당황한다.
“서, 설마...는 무슨. 이거 안 보여?”
조금 전 천사 무리를 학살한 궁니르를 흔들어 보였다.
“맙소사...”
“우리가 필멸자의 도움을 받았다니...”
아직도 필멸자 타령에 여념이 없는 것을 보니 답이 없다.
“긴말하지 않을게. 바벨탑을 수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자기가 무척 잘난 줄 아는 천사 녀석들과 길게 대화했다가는 화병이 나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제2천에서 주어진 임무는 적을 학살하는 게 아니라 바벨탑이라는 것을 수복하는 것. 이 메인 미션을 빠르게 완수할 생각이었다.
“바벨탑을 알고 있단 말이냐?”
스릉!
말을 내뱉기 무섭게 아만의 스톰브링어가 대장 녀석의 목에 닿았다.
「말을 삼가라. 주군은 네 녀석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한 번 더 마음대로 지껄였다간 목과 육신이 분리되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속이 시원하구나.
과연 아만. 가끔 과도한 충성을 보여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지금은 사이다가 따로 없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지? 네 녀석과 그리 오래 대화를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짧게 고민하던 녀석이 이내 저자세로 나왔다.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이제야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녀석은 내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불안에 떠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왜 뭐가 문젠데?”
“라파엘의 수하들이, 추격조가 곧 들이닥칠 겁니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만 합니다.”
“추격조?”
“그렇습니다. 이번에 끝장을 내려는 듯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바벨의 전사들을 공격하는 중입니다. 곧 저들의 죽음을 눈치채고, 추가 병력을...”
“음.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이미 늦은 것 같은데?”
“그게 무슨...아아아!”
뒤늦게야 감지한 모양이다.
사실 이곳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이곳을, 정확히는 이 타락천사 녀석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병력을 말이다.
느껴지는 기운은 한둘이 아니었다.
수천에 육박하는 빛의 기운, 대규모 병력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분명 자카엘이...”
“끝이야. 모든 게 끝났어!”
“하필이면 자카엘이라니.”
순식간에 거릴 좁히는 그 기운을 감지한 녀석들을 지배하는 건 좌절과 절망이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처럼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카엘?”
“라파엘의 오른팔. 겁화의 천사 자카엘과 녀석이 이끄는 병력이라면 우리가 살아나갈 길은 요원하다.”
삶을 포기했기 때문일까.
조금 전까진 자신을 낮추던 녀석이 결국, 본래대로 돌아왔다.
“겁화의 천사들이라면 라파엘의 부하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이들. 그들에게 사로잡힌다면 소멸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불타오르게 될 것이다...”
악명이 자자한 녀석들인 듯 타락천사 모두가 공포에 몸을 떨었다.
“이게, 이게 다 필멸자, 네 녀석 때문이다. 진즉 도망쳤다면 녀석들과 마주할 일도 없었을 텐데!”
“차라리 저들에게 소멸하게 내버려 두지. 어쩌자고 우릴 살렸느냐!”
“설혹 자살한다 해도 자카엘의 권능이라면 다시금 부활하겠지...”
태세를 전환한 녀석들이 내게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
인성 수준 봐라.
기껏 살려줬더니 왜 살려줬냐고 따지는 상황이다. 진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나 싶다.
“네 녀석을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기회만 된다면 네 녀석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다!”
오!
타락천사라 그런가. 저주를 내뱉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타락한 반역자들이여. 나 자카엘이 너희를 심판하러 왔노라!”
타락천사의 저주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화륵!
어느 순간 공간을 장악했다.
푸른 불꽃의 관을 쓴 7쌍 날개의 천사, 그리고 사방을 포위한 천사 군단을 볼 수 있었다.
“자, 자카엘...”
불꽃의 관을 쓴 천사를 본 타락천사들이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바벨탑이라는 흉물로 천상에 구멍을 뚫고, 찬란하신 분의 대전을 넘보려 한 죄. 대역죄를 지은 너희에게 영원의 겁화에 타오르는 형을 선고한다.”
척척척.
빛의 무장을 갖춘 천사 병력이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응. 아니야. 기각.”
물론 나는 녀석의 선고에 따를 마음이 없었다.
“필멸자?!”
그제야 나를 발견한 녀석이 이채를 띠었고, 그것은 녀석의 유언이 되었다.
“필멸자 드립은 지겨우니까 사양할게.”
파파파파팟!
무한한 내 마력에 의해 탄생한 궁니르의 그림자. 수천 개에 이르는 궁니르와 그림자가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컥!"
“케엑!”
“끄윽!”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건 단말마의 비명과.
“허업!”
“어아?!"
경악하다 못해 기겁한 타락천사들의 신음이었다.
잠시 후 드러난 장내의 상황은 명확했다.
궁니르와 창의 그림자로 인해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던 천사 군단은 물론 녀석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자카엘 또한 소멸을 맞이하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에 눈만 끔뻑끔뻑 대는 녀석들을 한 차례 훑었다.
“야, 아까 저주하겠다는 둥,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는 둥 지껄인 새끼 나와.”
지금도 내 앞에서 당당히 그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