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썩은물은 아스모데우스를 발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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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허상에 불과한 신이 아니라 높은 격을 갖춘 천상의 사자들을 믿어야만 합니다.”
넓은 정원이 펼쳐진 대저택. 그곳에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는 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간이로 마련된 의자에 착석한 그들의 시선은 정면, 단상 위를 향해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건 하얀 사제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혹자는 제게 말합니다. 사이비, 광신도라고. 하지만 저는 입바른 말만 하는 그들과 다릅니다.”
중년인의 시선이 왼쪽을 향했고.
드르륵.
휠체어에 몸을 기댄, 병색이 완연한 소녀와 그의 어머니가 등장했다.
머리칼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고,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했으며 뼈 위에 바로 가죽을 덮은 것처럼 몸은 앙상했다.
“보이십니까?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이 소녀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무려 10년 동안 이름 모를 희귀병과 맞서 싸우며 기도했지만, 누구도 소녀와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았습니다.”
“흑흑흑."
소녀의 어머니가 결국은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사실이다. 그녀는 힘겨운 사투를 이어가고 있는 소녀를 위해 초월적인 존재, 신에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었다. 그러나 10년간 이어진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마와 싸우는 중이었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천상의 사자들은 다릅니다. 그분들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기적을 발현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들입니다.”
울부짖듯 외친 중년인이 느릿한 걸음으로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지금 여러분에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소녀에게 다가간 중년인. 그가 오른손을 소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려 놓았다.
화악!
손과 머리, 그 접점으로부터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장내를 지배한 광채. 그러나 그 누구도 눈을 감지 않았다.
분명 눈이 부신데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다.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한 빛을 느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기적의 광경을 응시했다.
“아아아!”
환희에 찬 음성과 함께 휩체어에 앉아 있던 소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사슴이 어미의 젖을 먹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비틀대는 육신을 가누며 힘겹게 대지 위에 몸을 버티고 섰다.
“이럴 수가!”
“이, 이건 기적이야!”
이 같은 광경을 확인한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병약한 소녀가 휩체어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병색이 완연하던 혈색이 빠르게 회복되어간다.
이게 기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보셨습니까? 이것이 천상의 사자가 내게 허락한 권능입니다. 이제 다른 어떤 것에 현혹되지 말고 그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분들이 여러분을 천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오오오!”
“믿습니다!”
“천상의 사자여!”
홀린 것처럼 천상의 사자를 연호하는 사람들. 자신을 천상의 사자가 보낸 구도자라 소개한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
도심 속 하늘을 올려다 보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넝마와도 같은 옷을 입은 사내.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천애고아.
지인의 사기.
사랑하는 이의 배신.
그 모든 불행을 겪은 사내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서울역을 전전하는 노숙자가 되었다.
“이 따위 세상이라면 그냥 망해버렸음 좋잖아. 아주 그냥 다 죽어버리라고!”
지금 그에게 남은 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원망과 악의. 그리고 사내의 부정적인 에너지는 하나의 존재를 끌어들이기에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아주 좋아!”
“아 씨발, 깜짝이야!”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사내의 옆에는 검은 정장과 선글라스를 낀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술을 마셨다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는 아니다.
취하고 싶어도 취할 만큼 술을 사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마치 유령과도 같이 어느새 옆에 자리해 있었다.
“인간을 원망하는가? 너의 삶을 망가뜨린 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가?”
“미친 새끼!”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헛소리는 지옥에나 가서 하고. 술 사먹게 돈이나 내놔.”
그의 유일한 낙은 술. 미친 헛소리를 들을 시간에 한 잔이라도 더 걸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술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주지.”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고.
“어어?!”
사내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값비싼 양주를 볼 수 있었다.
“너, 어떻게? 초인이냐?”
완전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사내였기에 초인을 초월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견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아무리 강력한 권능을 지닌 초인이라 해도 물질을 창조해내는 마법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을.
“초인? 큭. 하찮은 인간과 나를 비교하다니. 나는 인도자. 너에게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달려왔느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헙!”
그 순간 사내는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 눈앞에 있는 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초월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원한다면 네가 가진 원망을 세상에 풀 수 있도록 힘을 쥐어줄 수 있다. 자, 내 손을 잡아라. 아주 약간의 대가를 통해 불행의 나락에서 꺼내줄 테니.”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더욱이 잃을 게 없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사내는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두 눈이 충혈된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
“믿을 수 없군요.”
“정말 이 보물을 지급해 주신다는 겁니까?”
특별한 재능이나 특성이 없어서 ‘일꾼’으로 전락한 대다수 악마가 나를 보며 물었다.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다는,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건 녀석들이 착용한 도구였다.
음. 곡괭이나 망치와 같은 공구에 휘황찬란하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전투에 사용되는 무구가 있듯 일꾼, 유닛들을 위한 특별한 아이템도 존재한다. 녀석들이 착용한 숙련자의 은빛 도구가 바로 그것이다.
농사, 채광, 벌목 등 채집의 효율을 높이는 쓸만한 도구. 나름 쓸 만한 이 도구는 재능 있는 몇몇 소수를 제외한 일꾼으로 분류되는 모든 악마들에게 지급된 상태였다.
어떻게 600이 넘는 악마에게 지급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내 에오스 시절 지위는 대공大公이었다.
파칼리스 대륙을 통일한 소누아 제국, 그 공신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뛰어난 업적을 이뤄 유저로는 최초로 대공의 작위를 부여 받았다.
사실 말이 대공이지 독립된 왕국 하나를 받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위를 이용해 최초로 하우징 시스템을 접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바빌론밖에 남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다스렸던 건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하는 왕국 하나였다.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그리고 시설물이 필요했고, 이때 쓰고 남은 아이템이 인벤토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666명? 설사 6,666명의 일꾼이 있다고 해도 그들 모두에게 특별한 도구를 지급할 자신이 있었다.
“사양할 거 없어. 이건 선물 축에도 못 끼니까.”
과장이 아니라 진짜다.
영지에 소속된 대다수 주민들이 들고 다녔던 보급품이 숙련자의 은빛 도구였다.
안타까운 사실은 훨씬 더 좋은 도구가 있음에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악마 녀석들은 별다른 재능이나 특성을 가지지 못해 평범한 일꾼으로 분류되었다.
아이템에 레벨 제한이 있듯 농사꾼이나 벌목꾼은 고급의 도구를 착용할 수가 없었다.
물론 모든 악마가 다 평범한 건 아니었다.
아르트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재능과 특성을 가진 소수의 악마도 있었다.
대부분 상인 관련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현재 영지 내에 마련된 상점의 주인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하찮게 여길 수도 있지만, 상점의 주인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
상점 주인의 역량에 따라 판매되는 아이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판매하는 품목의 종류가 많아지고, 질이 좋을수록 영지가 발전하는 속도도 향상된다.
“쯧. 오벨리스크Obelisk도 먹혔으면 좋았을 텐데.”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건 가지고 있는 오벨리스크,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기념비가 이곳에 적용이 되지 않는단 점이었다.
[파칼리스 대륙 전용 오벨리스크는 지옥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다시 설치를 해봤지만, 불가능.
아무래도 지옥에서는 파칼리스 대륙에서 적용되는 오벨리스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쉬울 수밖에 없다.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오벨리스크가 설치만 된다면 영지의 발전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으나 마냥 실망만 할 건 아니다.
파칼리스 대륙 전용 오벨리스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이 지옥 어딘가에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오벨리스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니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다른 지옥의 영주를 쓰러뜨리고 녀석이 가진 것을 모두 뺏는다.
아르투에게 영주 대리 임무를 맡긴 후 곧장 영지를 빠져나왔다.
최우선 과제는 주변 지형을 정찰하며 적당히 침략할 만한 영지를 찾아내는 것.
"가자, 베히."
"뿌우!"
힘찬 울음을 토한 베히가 발을 놀린다.
쉬이익!
조금 전과는 달리 공간을 넘는 특별한 권능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정찰의 목적이다 보니 주변의 단숨에 공간을 뛰어 넘는 게 아니라 적당한 속도를 낼 필요가 있었던 것.
하지만 산책하듯 가볍게 움직이는 걸음에도 주변 경관이 빠르게 바뀐다.
“끼이잉!”
“카륵, 캬르트!!”
이동하는 도중에 지옥의 마수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강력한 마수가 내게 접근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아악!”
“뿌우우!"
레비, 그리고 베히 부부 덕분이었다.
태초의 마수. 이 강력한 두 괴물이 내뿜는 기운에 노출된 마수는 오줌을 지리며 도망치기 바빴다.
덕분에 안전하고 빠르게 주변을 정찰할 수가 있었다.
“황량한 땅이라고 하더니, 진짜 그 말이 딱이네.”
한동안 이동했지만, 보이는 건 적색 대지뿐이었다.
그러나 포기는 없다. 동서남북 어디로든 발걸음을 이어갔다.
“멈춰!”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결과 마침내 적색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면. 마치 거대한 가시가 솟아난 것과 같은 기암괴석이 자리한 산맥이 자리했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겨 오는 게 이곳을 뒤져봐야겠다.
“뿌우우!”
베히를 재촉하며 산맥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물론 도중에 산맥에 서식하고 있는 거대 괴수들을 볼 수 있었지만, 과정은 조금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레비와 베히 부부의 위력 앞에 오줌을 지린 녀석들이 뿔뿔히 흩어진다.
그렇게 얼마간 이동했을까.
“빙고!”
나도 모르게 소릴 내고 말았다. 분명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한 낡은 오두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발견한 삶의 흔적이 막 그곳을 향해 접근하려던 그때.
“멈춰라! 이곳은 나 아스모데우스의 영역. 한 발짝만 더 다가온다면 그때는 가만히 두고보지는 않을 것이다."
쩌렁한 음성이 산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싸!”
벌써부터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미소 지었고, 자신을 밝히는 이름을 듣고는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모데우스. 내가 알기로 이 악마는 지옥을 다스리는 군주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