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고인물은 썩은물로 진화합니다 >
============================
베헤모스라.
기존의 영주를 죽인 내게 저항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보통 녀석이 아닌 모양이다.
“흐음..."
녀석들의 표정을 보면 때려 죽여도 가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원활한 이주 작업을 위해서는 베헤모스라는 장애물을 먼저 넘어야 할 것 같다.
“그럼 그 고대의 짐승인지 뭔지 하는 녀석만 해결하면 이주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겠지?”
“베헤모스만 처리해 주신다면 기꺼이 이주를 하겠습니다만, 그게 가능할는지...”
놈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건 불신이었다.
괜히 가서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표정.
“응. 가능해.”
악마 녀석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다.
“다만 나중에 가서 딴 말 하면 그때는...알지?”
핏!
위협적으로 창을 찔렀다.
목젖에 닿은 차가운 감촉에 대표 녀석이 빠른 속도로 고갤 끄덕였다.
“금방 돌아 올테니 딱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을 전한 후 곧바로 지면을 박찼다.
콰앙!
여유를 부렸던 조금 전과는 달리 속도를 냈다.
악마 녀석들이 저리 호들갑을 떠는 걸 봐서는 내 거점도 마냥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쉬이익!
칼날과도 같은 바람을 맞으면서도 속도를 낸 보람은 있었다.
조금 전보다 배는 빠르게 거점에 도착했고.
“맙소사!”
드러난 거점의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웅장했던 내 거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앞에 보이는 건 폐허.
콰콰쾅!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 모든 소란의 장본인은 어마무시한 덩치를 자랑하는 마수였다.
“코끼리?”
아니. 분명 생긴 건 코끼리와 흡사하지만, 녀석을 일반적인 코끼리로 분류할 수는 없다.
검은 광택 비늘이 갑옷과 같이 온 몸을 덮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녀석은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콰콰콰!
길쭉한 코에서 뿜어져 나온 숨결이 전방을 휩쓸고, 거력이 실린 양팔과 두툼한 발은 사정없이 거점을 짓밟고 있었다.
물론 압도적인 위력을 선보이는 녀석 또한 성한 모습이 아니긴 했다.
콰쾅!
여전히 남아 있는 지옥포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듯 쉴 새 없이 마력 탄환을 발사했다.
하지만 큰 반응이 없다.
고위급 악마도 떡으로 만들어 버릴 강력한 위력이었지만, 녀석은 그저 따끔한 정도에 불과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 거점에 마련된 방어 시설은 지옥포만이 아니다.
화륵!
녀석이 밟은 장소에서부터 솟아오른 건 강렬한 불길을 내뿜는 화염의 탑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적을 인식해 강력한 화염 마법을 퍼부어버리는 강력한 방어 무기.
쩌적, 파지직!
화염의 탑 뿐만 아니라 빙결, 뇌전의 탑이 연이어 발동하며 코끼리, 아니 베헤모스 녀석에게 큰 피해를 줬다.
“뿌우웅!”
단단해 보이는 비늘도 그 모든 충격을 흡수하지는 못하는 모양. 화염, 빙결, 뇌전의 강력한 속성 공격에 비늘 사이로 흰색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게 다다. 정작 치명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고.
쿠콰쾅!
거친 녀석의 공격에 방어 시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와, 설마설마 했는데.
설마 마수 하나가 내 거점을 박살낼 수 있을 줄이야.
“씨부럴. 내가 이럴 때가 아니잖아?”
놀라는 건 한 순간이었다.
내가 피땀 흘려 만든, 물론 내가 아니라 마스터 골렘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내 피와 같은 재료가 들어간 거점이 박살나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를 두고볼 수 있겠는가.
꽈악!
진 궁니르에 힘을 주어 투창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뀨우?!”
“엉?”
호출하지도 않았건만 레비 녀석이 멋대로 아공간에서 튀어나왔다.
“살아 있었냐?”
녀석의 등장이 의아할 수밖에 없다.
사실 레비는 내 소중한 아이템을 갉아먹으며 성장을 거듭하다가 동면에 빠졌었다.
알림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건 성장을 위한 잠이라는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통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살짝 녀석을 잊어가던 중이었다.
그렇게 불러도 대답이 없던 녀석이 갑자기 깨어났다?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뿌웅?!”
그런데 반응한 건 레비만이 아니었다.
거점을 파괴하다 말고 뒤돌아선 베헤모스 녀석이 나를, 아니 정확히는 레비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얽혀드는 시선과 함께.
촤악!
내 명령도 없이 레비가 본체화를 이루었다.
「카아아악!」
물결로 이루어진 녀석의 몸체는 예전보다 더욱 길어진 상태였다.
하긴. 녀석에게 들어간 아이템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동면에 빠지기 전 녀석은 10분 동안 본체화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뿌뿌우!”
본체화를 이룬 레비를 보며 지기 싫다는 듯 포효한다.
음. 포효라고 부르기는 뭐한 게, 생긴 건 험악하게 생긴 녀석이 왜 저렇게 뿌뿌 거리는 지 모르겠다.
[당신에게 종속된 펫 레비가 고대의 짐승 베헤모스에게 주도권 결투를 신청합니다.]
[양보할 수 없는 주도권 결투가 시작되려 합니다. 레비가 이 결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갑작스레 파고든 알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주도권 결투?
갑자기 이것들은 왜 싸우고 지랄인데?
그러나 상념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촤아악!
레비 녀석이 다짜고짜 베헤모스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콰앙!
순식간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공간을 뛰어 넘은 두 마수 녀석이 충돌했고,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장내를 휩쓸었다.
「카아악!」
“뿌웅!”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베헤모스의 몸을 휘감은 레비 녀석이 사정없이 목을 물어 뜯는다. 하지만 베헤모스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주먹을 들어 쉴새 없이 레비의 얼굴과 몸체를 두드렸다.
“이 새끼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무조건 이번 싸움은 레비가 이겨야만 한다는 것.
"죽엇!"
파파파팟!
시간 끌 이유가 없다.
곧장 마력을 운용해 무한궤적을 발휘, 일대를 나의 창으로 지배했다.
티티팅!
요란하게 날아간 창은 베헤모스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왜 악마 녀석들이 그토록 베헤모스를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다.
강력한 내 창의 연이은 공격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뿌우우우우!"
단단히 화가 난 녀석이 포효했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마수의 포효가 울려 퍼집니다.]
[저항할 수 없는 위압감에 의해 당신의 능력치가 30% 하락합니다.]
“미친!”
말도 안 되는 피어가 발현되었다.
미친, 30%라니. 능력치 30%하락이면 이거 완전 사기 아닌가.
“에라이!”
그러나 당황한 마음을 추슬렀다.
꿀꺽!
인벤토리를 열어 물약을 복용하자.
[정화의 영약을 통해 모든 디버프 효과가 해제됩니다.]
[중독도가 80%에 달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중독도가 100%에 이르면 각종 위험한 상태 이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디버프 해제를 위해 중독도 80%에 이르는 정화의 영약을 복용했다.
새끼야. 내가 바로 고인물이다.
그까짓 피어, 물약 하나면 만사형통이라는 말이다.
웅웅웅!
디버프 효과를 없앤 직후 마력을 한껏 머금은 진 궁니르를 투창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마왕 발로르를 꿰뚫은 광명의 신, 루 라바다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브류나크가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해 가장 찬란한 광채를 발산하기 시작합니다.]
루 라바다의 광명 스킨을 활성화 했다.
화악!
세상을 삼킬 듯한 광채를 뿌리는 브류나크를 다시금 투창했다.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다.
레비가 베헤모스 녀석을 잘 묶어든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각종 스킨을 활성화 해 가장 강력한 공격을 펼치는 것이었다. 투전승불, 십자가를 짊어진 순교자 스킨 등,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스킨으로 신기의 능력을 최고조로 올렸다.
콰콰콰!
엄청난 힘을 담은 색색의 창이 마침내 베헤모스를 꿰뚫었고.
푸욱!
“뿌우!”
효과는 굉장했다!
다른 아이템은 효과가 없어도 불멸급과 스킨을 통해 강력해진 창은 무적의 비늘을 뚫고 녀석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찌익!
투창을 끝낸 즉시 스크롤을 찢었다.
그것은 마스터 골렘을 소환하는 소환 스크롤.
「주인님. 명령...」
“말할 시간도 아깝다. 빨리, 빨리 수리!"
마스터 골렘은 건설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수리였다.
뚝딱뚝딱!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폐허가 된 성을 누비며 각종 방어 장치의 수리에 들어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SCV가 건물을 고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콰쾅!
놀라운 속도로 기능을 회복한 각종 방어 장치가 베헤모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악!」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레비 녀석은 기진맥진한 베헤모스의 목덜미를 잔인하게 물어뜯었다.
"뿌우, 뿌우우!"
베헤모스의 호흡이 거칠게 변했다.
애초에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결투였다.
녀석은 내 거점을 공격하느라 이미 꽤 피해를 받은 상태였고, 나와 레비는 만전이었다.
게다가 마스터 골렘의 놀라운 수리 능력을 통해 점차 활성화되는 방어 장치는 녀석에게 추가적인 타격을 주었다.
회심의 피어 따위도 물약 및 스크롤을 통해 모두 해제해버리니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뿌우웅!”
쿠웅!
길게 울음을 토한 녀석이 마침내 쓰러졌다.
「카아아아악!」
쓰러진 베헤모스를 바라보던 레비가 다시 한 번 긴 울음을 토했다.
"응?"
그리고 내가 확인한 것.
마치 퀘스트를 주듯 베헤모스 머리 위로 느낌표가 나타났다.
하다하다 이제는 퀘스트 표시도 나타나는 건가?
신기해 하며 베헤모스를 향해 접근했다. 그리고 녀석에게 가까이 접근한 순간.
[고대의 짐승 베헤모스가 쓰러졌습니다.]
[이벤트형 마수인 베헤모스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조건, 베헤모스를 사육할 심연의 사육장 완성.]
[두 번째 조건, 베헤모스와 인연으로 이어진 레비아탄 소유.]
[당신은 베헤모스를 길들일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베헤모스의 길들이기 조건 충족으로 탈 것 시스템이 해금됩니다.]
[불멸 등급의 탈 것 베헤모스의 길들이기를 시도합니다. 수락하겠습니까?]
[Yes / No]
“탈 것이라고?”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탈 것은 종말로 인해 업데이트가 되지 못한 시스템 중 하나였다.
설마 이 강력한 마수가 탈 것으로 등장할 줄이야.
“당연히 오케이!”
물론 베헤모스를 길들이는 것을 거부할 턱이 없었다.
“뿌우우!”
쓰러져 있던 녀석이 한 차례 울음을 터뜨렸고.
화악!
장내를 집어 삼키는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베헤모스가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베헤모스가 탈 것에 맞는 크기로 자신의 몸을 변화합니다.]
[태초의 마수 레비아탄과 베헤모스 수집을 통해 인연 시스템이 해금됩니다.]
인연이라니. 이건 또 뭐야?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의문을 느끼고 있을 무렵.
[‘인연 : 태초의 부부’를 완성했습니다.]
알림과 함께 곧장 인연에 대한 창이 나타났다.
『인연 : 태초의 부부
효과 : 레비아탄(본체화 무제한 사용, 주인에게 전이해주는 능력치가 50%로 변경)
베헤모스(최대한의 속도 발휘, 탑승 시 주인의 능력치 30% 증가)
레비아탄 + 베헤모스(모든 능력치 50% 증가)
설명 : 태초에 존재했던 마수 부부가 마침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연 시스템. 그것은 고인물이 썩은물이 되어가는 과정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