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고인물은 영지도 고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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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하네.”
영지에 대한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말 그대로 휑하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거라곤 검게 물든 토양과 자갈뿐. 그야말로 황무지의 결정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영지라고?
이걸 영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기존 영지에 대한 모독이다.
“후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응시했다.
노을이 깔린 것과 같이 붉게 물든 하늘에는 적색과 황금색의 태양, 청색과 흰색의 달이 박혀 있었다.
지옥은 내가 예상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경관을 자랑했다.
지하의 세계, 오직 어둠만이 지배하고 있는 암울한 곳으로 생각했건만, 웬걸?
넓게 펼쳐진 지평선은 이곳이 지하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애초에 지하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된 가정이다.
지옥은 중간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독립된 차원일 가능성이 99.99%였다.
음. 지옥에 대한 감상은 그것으로 끝.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변 경관에 감탄하는 게 아니다.
가장 시급한 건 정보. 그중에서도 귀환 주문서의 사용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찌익!
인벤토리에서 꺼낸 귀환의 주문서를 찢었다.
[등록된 거점이 없어 귀환의 주문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식 거점을 마련한 후 ‘차원의 통로’를 연결하십시오. 차원의 통로를 완성해야만 거점간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바빌론으로 귀환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필드에 진입했습니다.]
[당신의 고유 권능인 게임화 능력이 발현됩니다.]
연이어 파고든 알림 덕분이었다.
게임화 능력이 발현된다는 그 말과 함께 백광이 터져 나와 세계를 집어 삼켰다.
눈부신 백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게임화 능력의 발현이라. 일단 나쁜 소식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고.
슈욱!
육신을 지배하는 이질적인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분명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경관이 펼쳐졌지만, 예리한 내 감을 속일 순 없다.
나는 지금 단절된 차원 속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영지를 하사 받은 악마를 위한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이런! 당신이 하사받은 영지는 황무지 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입니다. 몰락한 귀족도 마다할 영지에 온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주변의 기온이 매우 낮습니다. 온기를 전해줄 모닥불이 절실합니다.]
[장작으로 쓸 만한 불쏘시개와 주변에 널린 돌을 이용해 불을 붙이십시오.]
게임화 능력이라 그러기에 뭔가 싶었는데, 단절된 차원 속에서 진행되는 튜토리얼이었다.
이곳은 초월적인 힘에 의해 생성된 공간. 적어도 튜토리얼을 끝내기 전까지 내게 특별한 위협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제한된 1시간 이내에 모닥불을 완성하십시오.]
[임무 실패 시 상태 이상 ‘동상’에 걸려 모든 행동이 지연됩니다.]
물론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건 일종의 퀘스트였다.
제한 시간 1시간. 이 시간 안에 모닥불을 완성하지 않으면 동상이라는 상태 이상 페널티를 받는 임무였다.
“어째 에오스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데.”
처음 아지트를 짓기 시작했을 무렵의 기억을 떠올렸다.
워낙 옛날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분명 아지트를 처음 건설할 때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었다.
그렇다면 혹시?
번뜩이는 생각에 인벤토리를 열었다.
하지만 그건 기존에 사용하던 인벤토리가 아니었다.
현재 내가 가진 인벤토리는 총 5개가 있다.
지금 연 건 ‘건설’로 분류되는 특수 인벤토리. 바빌론을 건설하고 남은 각종 아지트 재료로 가득한 아공간이었다.
게임 시스템이 적용된다면 기존의 재료를 활용해 지옥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원의 불꽃을 천년 고목에 사용하겠습니까?]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재료로 선택한 건 영원의 불꽃과 천년 고목. 그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듯 한낱 모닥불 따위에 사용하기에는 분이 넘치는 재료였다.
하지만 내게는 흔하디 흔한 재료일 뿐.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재료로 가장 적합한 하급의 아이템일 뿐이었다.
화르륵!
두 개 아이템을 합성(?)하자 강렬한 불꽃을 자랑하는 모닥불이 완성되었다.
[만년 모닥불이 완성되었습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모닥불이라기 보다는 캠프 파이어에 가까운 거대한 불꽃이었다.
풉. 명칭도 거창하게 만년 모닥불이란다.
만년 동안 타오른다고 해서 만년 모닥불인가?
[모닥불 피우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하지만 지옥은 그리 호락호락한 세계가 아닙니다.]
[초보 악마를 괴롭히기 위해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쏴아아-
난데 없이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로부터 불씨를 지키십시오.]
악취미다.
나야 기존의 재료가 있어서 쉽게 모닥불을 피울 수 있었지만, 다른 평범한 악마(?)라면 이 휑한 공간에서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 았을 것이다.
힘겹게 완성한 모닥불에 소나기라니. 그야말로 쏟아지는 소나기로부터 모닥불을 지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엿 먹어 보라는 거다.
보통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불씨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겠지만, 나는 그 자리를 가만히 지켰다.
화르르!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우리의 만년 모닥불을 거센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당연하지. 저게 어떤 모닥불인데.
절대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과 천년 동안의 에너지를 품은 천년 고목을 재료로 해서 만든 모닥불이었다.
아마 홍수가 난다 해도 만년 모닥불의 불꽃을 꺼뜨릴 순 없을 것이다.
[변덕적인 날씨로부터 무사히 모닥불을 지켜냈습니다.]
고인물 앞에서는 자연의 위대함도 소용없는 법이다.
[따뜻한 모닥불과 함께 아늑한 잠자리가 필요합니다. 울퉁불퉁한 자갈에서부터 당신의 등을 보호할 아늑한 잠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역시, 이것도 똑같다.
에오스에 처음 하우징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때도 모닥불과 잠자리 마련이 우선 과제로 주어졌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진 게임화 능력이란 건 에오스의 시스템을 현실에 적용하는 능력인 것 같다. 그렇다면 상황은 쉬워질 수밖에 없다. [‘별이 다섯 개 침대’를 설치합니다. ]
보통은 식물의 잎사귀를 이용한 간이 모포 정도를 마련하겠지만, 고인물의 스케일은 다르다.
침대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 푹신함이 느껴지는 별이 다섯 개 침대. 그리고 그건 바빌론, 내 방에 마련된 것과 똑같은 침대였다. [놀랍도록 아늑한 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따뜻한 온기를 나눠줄 모닥불과 아늑한 잠자리마련에 ‘대성공’ 했습니다.]
[당신의 이룬 성과를 판별 중입니다...]
[과분할 정도의 성과를 확인, 당신에게 최고의 일꾼 사역마를 제공합니다.]
화악!
발치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의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빛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웬디고Wendigo. 주인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빛이 사라지고 난 자리, 그곳에 나타난 건 5m 신장을 자랑하는 거인이었다.
거대한 신장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자랑하는 녀석은 일꾼 사역마 중 하나인 웬디고.
[일꾼 사역마는 당신의 거점 조성에 필요한 건설물을 만들 수 있는 효율적인 유닛Unit입니다.]
[건설을 위해서는 목재나 석재 등의 특수한 자원이 필요합니다. 웬디고에게 자원 수집을 맡겨 건설에 필요한 자원을 수집 하십시오.]
일꾼 사역마를 통한 자원 수집. 하지만 내가 그러한 명령을 내릴 일은 없었다.
[당신의 자원은 무한할 정도로 풍족합니다.]
[웬디고에게 명령을 내려 거점의 중심인 ‘회관’을 건설하십시오.]
짐작대로다.
에오스와 지옥은 똑같은 자원은 공유했다.
바빌론을 완성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재료가 들어갔지만, 사실 내 인벤토리 안에는 그와 같은 공중요새를 세 번이나 더 지을 수 있는 재료가 들어차 있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게 무엇이겠는가.
무한한 자원을 이용, 곧장 웬디고를 움직여 거점을 완성하면 그만 아닌가?
“넌 가만히 있어.”
「...」
아니. 웬디고를 움직일 생각은 없다.
나름 굉장한 보상이랍시고 보내 온 사역마였지만, 웬디고의 한계는 분명했다.
녀석이 지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석재 건물.
석재라면 나름 초반에는 튼튼하게 버틸 수 있는 종류긴 했지만, 나와 같은 고인물에게는 허접한 재료에 지나지 않다.
찌익, 찌이익!
미리 준비해둔 주문서를 찢었다.
지이잉!
약간의 진동과 함께 지면에 그려지는 건 수십 개에 달하는 마법진이었다.
제각기 다른 문양을 그린 마법진에서 폭발하듯이 광채가 뿜어져 나온 그 순간.
드드득!
지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었다.
「마스터 골렘이Master Golem이 주인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웬디고를 유아기 어린아이처럼 보기에 하는 10m의 거대한 신장, 황금색 광채로 번쩍이는 녀석들은 바로 특수한 마력 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마스터 골렘이었다.
특히 지금 내가 소환한 건 모든 건축물의 완성 시간을 압도적으로 줄여주는, 그야말로 건축의 대가들이었다.
1기만 있어도 작은 마을 정도는 거뜬히 만들어낼 수 있는 마스터 골렘의 수는 정확히 52기.
“자자, 갈 길이 멀다. 얼른 움직이자.”
내 목표는 아주 소박하다. 안전장치인 튜토리얼이 끝나기 전까지 작은 성 하나 만드는 것. 그리고 이 작은 바람을 이루기 위해 52기의 마스터 골렘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요란한 흙먼지가 일어난다.
“쉴 시간은 없다. 얼른 움직이란 말이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무리의 선두.
마치 활짝 피어난 해바라기와 같은 얼굴에 나무로 이루어진 몸통, 게의 집게발과 염소의 발을 지닌 그는 악마 이베살이었다. 지옥에서도 가장 척박한 북쪽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지옥의 귀공자 중 하나인 그가 이토록 부하들을 채근하는 건 조금 전 느껴진 악마의 기운 때문이었다.
‘어떤 멍청한 녀석이 봉작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영지를 봉작 받았다는 건 새로운 귀족이 탄생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건 근처에 자리한 다른 귀족 악마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기회기도 했다.
계승된 귀족이 아닌 이상 처음 영지를 봉작 받은 악마는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 개털일 확률이 90% 이상. 특히 이곳과 같이 척박한 영지를 봉작 받았을 때에는 그 확률이 더욱 상승한다.
수중에 가진 건 없어도 분명 다른 귀족을 쓰러뜨려 작위를 얻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꽤 유능한 수하를 거둘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리베살이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직도 어리바리 하고 있을 초보 귀족 악마를 휘하에 거두려는 것이다.
그 기운을 탐지한 즉시 달려가는 중이니 제대로 된 거점이 있을 리 만무.
“크하하하!”
이미 그는 새로운 부하를 거뒀다고 확실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리베살님. 저기 적의 거점이 보이긴 하는데...”
독수리 머릴 가진 부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잔말은 필요 없다. 곧장 돌격이다!”
공격을 명한 리베살이 직접 선두에 서며 적의 거점을 향해 접근했다.
“크하하하! 자, 어서 나와 새로운 주인을 맞을 준비를...”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 리베살.
그는 적 거점을 눈앞에 두고 난 후에야 자신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씨벌, 이게 뭐야?!”
고작해야 나무 울타리 정도가 마련되어 있을 거로 생각한 적 거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위용을 자랑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진 모르겠으나 어떠한 공격에도 끄덕없을 것만 같은 칠흑 광택의 성벽.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웅장한 규모의 성이었다.
철컥철컥!
어디 그뿐인가.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성벽에서 솟아난 건 강력한 마력의 힘을 발산하는 지옥포. 그것도 한 두 대가 아니라 수백 대의 지옥포가 성벽위를 빼곡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하지만 끝내 그는 자신의 할 말을 잇질 못했다.
콰콰콰콰쾅!
지옥포. 그곳에서 발사된 강력한 마력 탄환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