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고인물은 영지물을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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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백작이네?”
아바돈을 이기긴 했지만, 설마 곧바로 녀석의 지위를 강탈할 줄은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본체가 아니라 빙의 상태의 녀석을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녀석의 설명에 의하면 빙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결투는 정식 결투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설혹 승리했다 해도 온전히 상대의 지위를 뺏어올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약식이어도 결투는 결투, 혜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백작인 아바돈에게 승리했을 경우 남작이나 자작의 위를 인정받는 정도.
분명 그렇게 설명했는데, 갑자기 백작이란다.
뜻밖의 상황에 눈만 꿈뻑거리고 있을 무렵.
“아!"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단순 빙의 상태였다면 백작의 지위를 뺏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지옥에 있는 본체의 힘을 끌어다 썼다.
속칭 악마화라고 부르는 권능. 물론 그건 완벽한 악마화가 아니었다.
불완전하게 이루어진 악마화로 인해 본체의 힘을 ‘일부’만 사용할 수 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같은 악마로 인식되는 내게 패하면서 모든 지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쯧. 악마 새끼들이 이러니까 단합이 될 턱이 없지.”
아바돈의 백작의 위를 강탈하며 느낀 건 지옥과 악마라는 종족이 지닌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사실 개인의 실력 성장에서 보자면 강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게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힘이 있다면 얼마든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구조인 만큼 다들 기를 쓰고 실력 향상에 노력할 게 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개인의 전투가 아니라 대규묘 병력의 전쟁이 된다면?
답이 없다.
아드리엘을 보면 알 수 있듯 지옥과 달리 천상은 잘 훈련된 군대를 보는 것처럼 지휘 체계가 잡혀 있었다.
비록 현 시점에서의 전황은 지옥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장담하건대 그 상황이 오래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악마와 녀석들이 소속된 지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합이었다.
워낙 개인의 양명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단체로 보면 오합지졸이 따로 없는 것.
당장 아바돈만 봐도 선봉장에 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음에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 꿍꿍이 속을 꾸미고 있었다.
단합은 개뿔. 언제든 지위를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된 녀석들이 전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빠른 빙의를 통한 점령은 순간에 불과하다.
아마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면 군대와 같이 단합된 천상이 지옥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게 틀림없다.
애초에 전쟁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다른 것이다.
전쟁 초반, 중간계를 완전히 점령하지 않은 이상 이 전쟁은 천상이 승리하는 시나리오로 흐르고 말리라.
“그리고 지구는 폐허가 되겠지.”
내가 우려하는 건
내가 우려하는 건 천상과 지옥의 전쟁, 아마겟돈의 승패가 아니었다.
이 전쟁의 무대가 되는 곳은 지구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천사와 악마 녀석들이 인간의 육신을 빌려 싸운다는 점이다.
놈들은 죽지 않는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애꿎은 인류만 죽어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내 힘이 강력하다 해도 무한히 쏟아지는 물량을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아니 설혹 감당할 수 있다 해도 이 망할 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고, 마침내 오늘, 그 해답에 접근할 수 있었다.
“지옥의 왕이 되어 천상을 친다.”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정상에 군림할 수 있는 게 지옥의 절대적인 법칙. 물론 같은 악마라는 제한이 있었지만, 현재 나는 바포메트 스킨을 통해 악마 종족으로 인식되는 상태였다.
악마를 지배하는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소리다.
게다가 지옥으로 들어갈 수 있는 헬 게이트에 대한 정보도 쥐고 있는 상태. 망설일 건 없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오!
기생충과 같이 기생하려는 녀석들에게서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는 직접 지옥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
솨아아-
통로를 통해 한 줄기 으스스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휴. 누가 지옥의 입구 아니라고 할까봐, 어지간히도 꾸며놨네.”
복잡한 지하 미로를 걸으며 불평을 터뜨렸다.
길을 찾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다. 미로를 구성하고 있는 벽면을 아마 웬만한 사람은 까무러치고 말 것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벽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은 인골人骨이었다.
두개골은 물론 팔과 다리 등의 뼈로 구성된 벽을 보는 건 죽음에 익숙한 나에게도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현재 내가 거닐고 있는 곳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위치한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였다.
아바돈을 쓰러뜨린 덕분에 백작의 지위와 함께 지옥으로 갈 수 있는 입구, 헬 게이트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세간에 죽은 자의 도시라고 불리던 네크로폴리스는 지옥으로 가는 입구였다.
물론 이 넓은 네크로폴리스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를 찾아야만 하는 게 문제였지만.
[지옥의 유황 냄새가 옅어집니다.]
망할. 길 잘못 들었다.
여기서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꺾어어야 됐나.
[지옥의 유황 냄새가 짙어집니다.]
망설이지 않고 이 미로를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귓가에 울려 퍼지는 알림 덕분이었다.
친절한 내비게이션 덕분에 복잡한 미로를 헤쳐나갈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다른 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지옥의 유황 냄새가 매우 강렬합니다.]
앞을 막고 있는 건 지금까지 보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인골의 벽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벽의 중앙 부근에 박힌 푸른 빛의 두개골이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인간의 두개골도 아니다.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길쭉한 도마뱀의 두개골과 흡사하다고 해야 하나?
“뭐, 답은 간단하지.”
벽이 막으면 벽을 부수면 그만.
콰앙!
적당히 힘을 실은 주먹질로 수천 년간 그 자리를 지켜오던 인골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역시!”
과연 내 문제풀이 방식은 옳았다.
인골의 벽이 무너지고, 그 너머에 보이는 건 거대한 문이었다.
양문형의 문을 장식한 건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은 채 뒤엉켜 있는 인간이었다. 마치 소용돌이가 치듯 인물들이 서로를 휘감은 그 광경은 뭔가 오싹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단지 시선을 옮긴 것뿐만 아니라 기감을 확장해 인근을 살폈지만, 느껴지는 건 없었다.
음. 아무리 봐도 별다른 수문장은 없어 보인다.
설마 그냥 문 열고 들어가면 지옥이라는 허접한 설정은 아니겠지?
혹시 하는 마음을 품은 채 곧장 문에 손을 가져갔다.
쿠쿵!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린 것처럼 찰나의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지옥의 입구, 헬 게이트를 발견했습니다.]
[미발견 지역의 탐색을 통해 ‘타락한 전사의 성지 지옥Hell’이 업데이트됩니다.]
그건 일전에도 겪은 바 있는 대규모 업데이트였다.
여기서 말하는 미발견 지역이라는 건 악마들의 거주지, 지옥을 말하는 것일 터. 쉽게 말해 새로운 필드의 업데이트였다.
[타락한 전사의 성지 지옥 패치가 완료됐습니다.]
[지옥에 입장하겠습니까?]
[Yes / No]
“가야지.”
입장 여부를 묻는 알림에 망설이지 않았다.
동료들과 같이 갈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옥은 오직 악마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바포메트의 가면과 같은 특수한 스킨이 없다면 입장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나의 몫. 혼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입장 여부를 판별중입니다...]
[필수 조건인 악마 종족을 충족했습니다.]
[최소 레벨인 250 이상을 충족했습니다.]
[최소 무구인 신화 등급을 충족했습니다.]
[삐익! 입구를 열기 위한 영혼 제물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입구를 열기 위해서는 100,000P에 해당하는 ‘혼Soul’이 필요합니다.]
최소 레벨과 무구는 합격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혼. 그리고 난 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다.
『혼
종류 : 퀘스트 아이템
설명 : 인간이 지닌 생체 에너지. 혼은 헬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촉매다.』
씨부럴!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툭.
인상을 찡그린 사이 바닥에 떨어진 건 불길한 보랏빛을 내뿜는 단지였다.
[지금 제공한 ‘영혼의 단지’에 100,000P의 혼을 모으십시오.]
[인간을 죽일 경우 그 혼이 알아서 영혼의 단지에 머물게 됩니다.]
[참고로 인간 한 명당 1P의 혼을 수집할 수 있습니다.]
헬 게이트를 열기 위해 필요한 혼은 100,000P. 쉽게 말해 10만 명의 인간을 죽여야만 이 빌어먹을 문을 열수 있는 것이다.
“씨발, 이걸 말이라고!”
절로 욕설이 튀어 나왔다.
100,000명의 무고한 인명을 해치라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자. 본격적인 아마겟돈이 발발한다면 100,000명의 희생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수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눈앞에 있다.
과연 이를 걷어차는 게 옳은 판단일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역겨운 변병일 뿐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정작 그 당사자가 되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 잠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나는 에오스의 고인물이다. 몇 년간에 걸친 노력의 정수가 인벤토리 안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어떤 난관도 템빨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이니.
떠올려라. 분명 인벤토리 어딘가에는 지금 난관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열쇠가 있을 것이다.
"그래!"
한참 동안 인벤토리를 뒤지던 중 환호성을 터뜨렸다.
내가 손에 쥔 건 헬 게이트를 여는데 필요한 영혼의 단지와도 같은 둥근 단지였다.
덜그럭.
마치 어둠을 삼킨 것처럼 칠흑빛의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진동하고 있었으며, 검은 안개와도 같은 기운을 발산했다.
『죽음의 창조자 데미아의 성물함
종류 : Unknown
설명 : 오르쿠의 대공 중 1인, 죽음의 창조자 데미아의 영혼이 담겨 있는 성물함. 수많은 영혼을 먹어치운 그의 영혼은 매우 불안정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그건 파칼리스 대륙을 침공했다가 내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오르쿠의 대공 중 하나, 죽음의 창조자 데미아의 성물함이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네크로맨서이자 아크리치이기도 했던 녀석은 생전에 수많은 영혼을 먹어치운 괴물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어서 인벤토리를 차지하기만 했던 골동품. 드디어 오늘 이 녀석의 사용처를 발견하게 되었다.
퍼억!
망설이지 않고 성물함을 깨부셨고.
휘오오!
부서진 성물함에서 뿜어져 나온 희끄무레한 기운이 매서운 속도로 영혼의 단지에 빨려 들어갔다.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 잡고 흔드는 것처럼 영혼의 단지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헬 게이트를 열기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영겁의 시간 동안 닫혀 있었던 지옥의 입구가 마침내 개방됩니다.]
화악!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부터 선명한 연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와 나를 삼켰다.
저항할 수 없는 흡입력에 저항하지 않은 채 몸을 맡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타락한 전사의 성지, 지옥에 입장했습니다.]
[이런! 당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백작이로군요.]
[다행히도 비어 있던 척박한 영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지옥의 구석에 위치한 척박한 영지를 개척하십시오.]
지옥의 입장과 동시에 장르는 RPG에서 RTS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