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고인물은 우리엘도 엿 먹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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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한 거절에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본다.
순식간에 변화하는 그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있다.
아마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벌써 주먹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의 주제를 아는 천사였다.
내가 손가락만 까닥해도 먼지가 될 존재. 그렇기에 조금의 불만이 있어도 감히 강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그렇군요. 다짜고짜 미카엘의 그릇이라니. 다급한 마음에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테지요. 흠. 어쩔 수 없군요. 이건 기밀에 속하는 사실이지만, 특별히 연우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곁눈질로 동료들을 훑은 아드리엘이 입을 다물었다.
「현재까지 전황은 천상에 아주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대신 의지를 전달했다.
호오? 이건 솔깃한 정보인데?
「악마 녀석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엌?!」
마찬가지로 의지를 전달한 그 순간, 깜짝 놀란 아드리엘이 펄쩍 뛰었다.
「어, 어떻게 천음天音을?」
천음?
아. 어느 부분에서 놀랐나 했더니 의지를 전달한 부분이었구나.
천사 녀석들이 머물고 있는 천상이란 곳은 완전 오지인가보다.
천음이라는 것이라고 해봐야 마력을 미세하게 조절해 퍼뜨리는 것. 물론 지구에 이 정도의 경지까지 도달한 이가 많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계속 하죠.」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천사와 악마간의 균형에 관한 내용은 내게 무척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 알겠습니다.」
황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드리엘이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천상은 타락한 어둠의 자식들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것. 그건 바로 중간계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타락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타락했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사도邪道, 사악한 마음을 품은 이들이 만연하다는 뜻입니다.」
「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좀 타락하긴 했다. 당장 나오는 뉴스만 봐도 말도 안 되는 사건과 사고가 난무하지 않던가.
우스갯소리로 악마도 와서 배워야 할 지경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니 더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조금 전에도 설명드렸지만, 어둠의 자식들이 빙의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중간계에는 녀석들이 빙의할 만한 그릇이 널린 상태였던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한 만큼 악마쪽 병력이 접근하기가 용이하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적어 천상의 병력이 현신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반대로 어둠의 자식들은 쉽게 빙의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금 전 많은 수의 적들이 추격했던 것도 이와 같은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악마가 사악한 마음에 파고든다면 천사는 선한 마음을 통해 현신한다는 것. 물론 녀석이 말하는 선과 악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대로 가면 악마 녀석들이 중간계를 먹을 테니 미카엘이 현신하도록 도와달라는 말이죠?」
「정확합니다.」
잔챙이들 가운데 보스를 땋!
그것만으로 불리한 전세를 역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나죠? 굳이 내가 선택된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순수한 궁금증이기도 했지만, 정보를 캐내려는 의도의 질문이기도 했다.
생각할 게 많은 듯 잠시 나를 바라보던 아드리엘.
「중간계에서 연우님의 카르마karma가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카르마?」
「업보業報, 쉽게 말해 선행과 악행의 수치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연우님은 중간계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선업善業을 가지고 있습니다. 치천사 미카엘이 현신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가 아니고, 뛰어난 인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말이 걸리긴 하지만, 대충 알겠다.
아마 그간의 활약을 통해 카르마, 선업이라는 것을 많이 쌓은 모양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껏 내가 행해왔던 일을 떠올려보면 하나하나가 인류를 종말로 이끌 수도 있었던 재앙이다. 그 모든 위기로부터 인류를 구했으니 녀석이 말했던 선업이란 게 어마무시하게 쌓였을 터.
굳이 내게 접근한 이유가 확실해졌다.
「만약 연우님이 미카엘의 그릇이 되어 천상의 전쟁을 돕는다면 순식간에 전쟁을 종식,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어둠의 자식들로부터 중간계를 지킨 영웅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 격정에 젖은 눈으로 응시했지만, 내 입장에서 그건 가당치도 않은 조건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차고 넘치는 영웅입니다만?」
몇몇 이들에게 사이비 교주라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현 인류의 정점인 건 분명하다.
고작해야 영웅 취급 좀 받겠다고 육신을 넘긴다?
도대체 이 녀석은 생각이란 걸 하고 말을 내뱉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같은 영광을 마다하겠다는 말입니까?」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불가. 자, 다시 시작해보죠. 다른 조건은?」
물론 어떤 조건을 제안해도 미카엘의 현신을 수락할 마음은 없다.
궁금한 건 하나. 천상이 제안할 수 있는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천상에서 교신이...」
아드리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화악!
푸른 빛의 광채가 뿜어져 나와 장내를 뒤덮었다.
강렬한 빛에 의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드리엘. 아니. 그곳에 서 있는 건 조금 전의 아드리엘이 아니었다. 화르륵!
지면에 새겨진 푸른 불꽃의 원. 그곳에서 느껴지는 건 조금 전의 아드리엘을 뛰어넘는 아득한 힘이었다.
「나는 신성한 불꽃 우리엘Uriel. 그대와 아드리엘과의 대화를 전해 듣고 있었다.」
우리엘이라.
꽤 높으신 분이 행차하셨다.
아마 천상에서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야기의 방향이 아드리엘의 권한을 넘어섰던지.
「그대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으나 내게 허락된 시간이 부족하구나.」
그렇겠지.
아드리엘의 발 밑에 새겨진 푸른 불꽃의 원이 위태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엘 또한 미카엘과 같은 치천사. 어떻게 중간계에 현신했는지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방법이 아닐 게 분명했다.
“이제야 이야기가 쉽겠네. 그래서 천상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은 뭐죠?”
우리엘이라면 천상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건을 말할 수 있을 터.
「영원불멸한 중간계의 왕. 그대는 영원토록 중간계를 다스리는 유일한 왕이 될 것이다.」
오오!
과연 스케일이 다르다.
앞뒤 잴 것도 없다는 듯이 영원불멸한 지구의 왕이라.
확실히 끌릴 수밖에 없는 제안이지만.
“거절.”
내 대답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왜지?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을 텐데?」
아드리엘과는 달리 내 거절 의사에도 짐짓 태연한 모습이다.
아니면 높으신 분의 체면상 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보나. 왜? 왕 시켜준다 그러면 넙죽 받아들일 줄 알았냐?”
「...」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우리엘의 표정이 굳는다.
하나도 안 무섭다. 편법을 이용해 현신한 녀석이 중간계에서 물리력을 행사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드리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하나같이 속이 시커매서는. 아닌 말로 미카엘 녀석이 내게 현신하면 내 육신이 어떻게 된다는 어떤 말도 없잖아. 혹시 모르지. 치천사 정도 되는 존재가 현신하게 되면 그 인간은 반드시 소멸하게 될지도.”
의중에 있던 말을 꺼냈고, 꽤 효과가 있었다.
움찔. 한 차례 몸을 떠는 우리엘 녀석을 보니 100%다.
짐작했던 대로다. 치천사 정도 되는 존재가 현신한 인간은 99.99%의 확률로 뒈지는 거다.
죽어버린 녀석에게 영원불멸의 왕을 약속한다?
모든 게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
“악마가 중간계에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엿이나 잡수셔. 네 녀석들도 중간계를 먹으려는 수작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천사는 선이고 악마는 악이다?
개소리. 선악의 기준은 내가 판단하는 거지, 녀석들이 정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꺼져. 천사고 나발이고, 네 녀석들과 손잡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천사와 악마, 두 세력 모두 인류를 위협하는 적이라는 것.
「자신감이 넘치는군. 인간.」
굳어 있던 표정을 푼 우리엘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피어났다.
「네 녀석은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그건 잘난 네 힘이 참으로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그리 말하며 기분나쁜 미소를 짓는다.
[삐이이!]
갑작스러운 변화
흘리드스칼프가 장내가 떠나가도록 경고음을 발산했다.
[절대적인 마력을 품은 존재가 접근 중입니다.]
절대적?
바빌론이 ‘절대적’이라는 표현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지잉-
곧이어 탐지 마법을 통한 영상이 나타났다.
「이 놈!」
맹렬한 속도로 바빌론을 향해 접근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익숙한 얼굴의 다섯 명.
“베놈?!”
과거의 기억을 통해 남아 있는 얼굴의 주인공은 베놈의 18의원 중 다섯이었다.
솔직히 한 동안 잊고 지냈다.
베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적의 등장으로 신경을 쓸 새가 없었던 것.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녀석들이 예전의 베놈이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릴리트, 알메리스, 루므얄, 이제제엘, 알레스티키파. 모두 지옥의 귀공자들이로군.」
우리엘을 통해 녀석들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드리엘을 포위했던 악마와 같이 어깻죽지에 솟은 검은 날개, 그리고 이마에 솟은 붉은 뿔이 돋보인다.
아마 저 뿔이 악마들의 계급을 나타내는 것일 터.
「그대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것 같군.」
그렇겠지.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릴리트는 일전의 소환으로 내게 소멸당한 바 있으니까.
그 원한을 잊지 않고 이렇게 달려오는 중일 것이다.
「이거 참 큰일이로군. 지옥의 귀공자라 하면 조금 전 상대했던 전투 악마와는 급이 다른 존재. 그대는 천상의 도움 없이 지금의 위기를 넘길 수 있겠는가?」
우리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빤하다.
저 악마들에게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미카엘의 그릇이 되라는 말.
“싫은데?”
[지켜보지.」
여유만만. 그러나 녀석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흘리드스칼프가 왕좌의 주인, 이연우에게 반응합니다.]
[바빌론이 전투 태세로 전환합니다.]
[현재 사용 가능한 능력은 ‘마력포’, ‘소멸포’가 있습니다.]
[아직 충전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 신살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남김없이 퍼부어서 적을 죽여.”
[목적은 적의 소멸. 모든 방어 시스템을 활성화 해 섬멸하겠습니다.]
콰콰콰콰!
바빌론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 하지만 그건 조금 전보다 미약했다.
「강력하군. 하지만 그것으로 하지만 그것으로 귀공자를 쓰러뜨릴 순 없다.」
사실이다.
여전히 펼쳐진 영상 속. 육신 주변으로 검붉은 보호막을 형성한 악마 녀석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바다.
조금 전 악마들을 상대하느라 쓸데 없이 마력을 낭비해버렸다.
섬멸포는 분명 강력한 방어 수단이지만, 한 번 사용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미카엘의 그릇이 되겠다고 하면 어둠의 자식들을...」
“엿이나 잡수세요!”
그러나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것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사람 무시하네.
마왕도 아니고 고작해야 귀공자 계급의 악마들에게 당할 것 같냐?
꽈악!
인벤토리에서 꺼낸 거대한 창, 진 궁니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웅웅웅!
한껏 내 마력을 머금은 창이 붉게 변했다.
“입구를 열어!”
그그긍!
명령을 통해 바빌론의 입구를 열었고.
“적을 꿰뚫어라, 궁니르!"
그대로 투창했다.
핏!
내 손을 떠났으나 여전히 붉은 궤적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영상. 그곳에서도 붉은 궤적이 어지러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절대명중의 속성을 지닌 진 궁니르는 다섯 악마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고.
푸확!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위업 : 지옥의 귀공자’를 획득했습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레벨이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8개를 획득했습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레벨이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8개를 획득했습니다.]
귓가에 들리는 건 기분 좋은 레벨업 알림과.
「맙소사!」
마찬가지로 기분 좋은 우리엘의 감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