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고인물은 오의도 고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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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오하구나!”
“오만한 녀석 같으니.”
내 말에 반응한 건 금색 장발의 중년인과 검은 안대로 왼쪽 눈을 가린 백발 노인이었다.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들이 누군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제우스, 오딘.”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를 대표하던 주신, 아니 정정해야겠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던 절대자들이다.
이들과 동등한, 권주의 위에 앉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전설과 신화로 치부했던 그들이 고대에 존재했던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슨 이유로 다시 등장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전해지는 것처럼 신격을 이룬 존재는 아니라는 것.
만약 제우스나 오딘이 진짜로 신격을 이룬 존재였다면 지금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나와 동등한 입장이라는 것을 파악했기에 꿀릴 게 없다.
“그러셔? 그 오만한 녀석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렇게들 똘똘 뭉치신 건가?”
오만하다고?
내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겁쟁이들이 내뱉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역사 속에서 너와 같은 격을 이룬 존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도대체 네 녀석의 정체가 뭐지?”
내 정체가 궁금한 건 아서 왕만이 아닐 것이다.
갑작스레 권좌의 주인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압도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듣보잡 하나의 난입이야 얼마든지 용인하겠지만, 그 활약이 모든 권주를 뛰어넘을 정도라면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그걸 말해주겠냐?”
게임의 현실화. 그것은 내 히든카드나 다름없다.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아닌 이상에야 비밀을 공유할 마음은 없었다.
“흥! 네깟 녀석의 비밀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우린 각자의 자존심을 버린 채 동맹을 맺었다. 네 녀석이 최후의 권주가 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제대로 작정한 듯 노골적인 살의를 뿜어댔다.
찌릿!
유형화된 기세가 마치 수천 개의 가시처럼 온 몸을 찌른다.
오호라? 우리 권주님들께서 단단히 빡이 친 모양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걸?”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듀얼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기 전이라면 녀석들의 협박에 약간, 아주 약간이나마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다.
잔뜩 힘을 준 녀석들의 기세는 내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녀석들이 뭘 꾸미는지도 알았고, 이 정도면 됐다.
더 남아 있어봐야 험한 말이나 오고 갈 것 같으니 여기서 한 발 빼야지.
관리자 양반. 저 여기서 나갈랍니다.
[고인물의 권좌에 앉은 템빨의 왕이 권좌의 회담에서 빠지기를 요청합니다.]
보통은 관리자와의 접점이 없지만, 지금과 같이 특별한 이벤트 상황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나는 관리자에게 회담에서 빠지길 요청했고.
[관리자 Z가 요청을 수락합니다.]
[고인물의 권좌에 앉은 템빨의 왕이 회담에서 제외됩니다.]
그것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봐.”
지금은 그냥 인사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후면 지금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슉!
찰나의 순간 주변 풍경이 바뀌고.
“마스터!”
왕좌의 홀. 그곳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이 하나의 권능을 통해 관리자의 힘을 짐작할 수 있다.
공간을 넘은 느낌조차 없다. 그건 수많은 공간 전이를 겪어본 내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주군.」
사정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모두가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연장 챙겨. 조지러 간다.”
준비 시간? 그딴 건 개나 줘버리라지.
지금 이 순간은 얍삽한 권주 녀석들에게 철퇴를 가할 시간이다.
*
휘이잉!
시원한 바람이 부는 솔즈베리 평원.
흘리드스칼프를 통해 그곳으로 이동한 나와 일행은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한층 더 강력해진 부정의 오라에 둘러싸인 아만이 물었다.
비단 녀석만이 아니다. 일행 모두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주변, 탁 트인 평원처럼 보이는 그곳에 매복한 존재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냥 당해주진 않겠다는 거네.”
독백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욱 세밀한 컨트롤이 가능해진 기감에 잡히는 건 결계의 존재였다.
시야를 착란시키는 형태의 결계는 매복을 위해 마련된 것.
아마 멋 모르고 평원을 밟은 적이라면 매복한 그들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숨이 끊어질 것이다.
물론 그 멋 모르는 적에 나는 포함되지 않겠지만.
“아만.’’
「네, 주군!」
“쓸어버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전초전에 모두가 나설 필요는 없다.
든든한 아만이 선두에 선다.
내가 듀얼 마스터에 이른 것처럼 가디언 사인방 또한 똑같은 듀얼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
결계에 숨은 적, 카멜롯의 병력은 아만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푸욱!
갑작스레 무릎을 꿇은 아만이 지면 깊숙하게 스톰브링어를 꽃았다.
「일어나라, 제국의 병사들아. 옛 황제의 맹약에 따라 검을 들어라!」
휘오오!
울부짖는 아만의 외침과 함께 스톰브링어에서 새어 나온 연녹색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소용돌이를 구성하는 것. 그건 녹색 빛을 발하는 구체였다.
수십만 개에 이르는 구체의 정체는 아만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위탈로스 제국 병사들의 영혼이었다.
투투툭!
아만과 스톰브링어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구체가 지면으로 흩어진다.
드드득!
씨앗이 발아하는 것처럼 흙더미 위로 솟아오르는 건 언데드였다.
녹슨 갑옷과 무기를 착용한 언데드 군단은 위탈로스 제국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과 깃발을 아직도 손에서 놓지 못한 채였다. 하급의 스켈레톤 병사부터 시작해 구울, 듀라한, 드문드문 아만과 같은 죽음의 기사도 보였다.
척척!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언데드 군단이 정렬했다.
「위대한 황제를 위해 !」
「위탈로스 제국에 영광을!」
지하에서 울리는 듯한 의지가 전해진다.
언데드로 재탄생한 위탈로스 제국 병력. 듀얼 마스터에 이른 아만이 발휘할 수 있는 ‘제국의 망자’를 통해 구현된 것이었다. 황비와 황자에 의해 독살되기 직전 아만은 제국에 저주를 걸었다,
제국의 모든 인간은 죽어서도 영혼이 속박될 것이다.
저주는 강력했고, 제국민들은 사후 스톰브링어에 영혼이 속박되는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배신의 대가는 죽어서도 자유를 얻지 못하는 강력한 구속이었다.
「가라, 나의 병사들아. 주군을 위해 전장을 휩쓸어라!」
다시금 손에 쥔 스톰브링어를 휘젓자 제국의 망자들이 전진했다.
"적을 맞이하라!”
“카멜롯과 폐하를 위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계에 숨어 있던 카멜롯의 병력이 나타났다.
가슴에 포효하는 사자의 문양을 새긴 병력. 그들을 보는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허접하네.
매복해 있던 건 카멜롯의 정예 병력이 아니라 일반 병사들이었다.
차차창!
곧이어 두 세력이 충돌했고, 각종 병장기가 부딪치며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끄으악!”
“아악!”
전장에 울려퍼지는 건 고통에 찬 비명. 그러나 그건 오직 적군 진영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전투를 일방적이었다.
위탈로스 제국이라 하면 가장 강성했던, 어쩌면 대륙을 일통할 수도 있었던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물론 저주에 걸려 언데드가 된 상태지만, 고작 카멜롯의 일반 병사 따위가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주군의 행차다. 길을 터라!」
아만의 명령과 함께 전장 한복판에 길이 생겨났다.
저벅.
나와 일행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그곳 전장을 걸어나갈 수 있었다.
“폐하에게 가지 못한다!”
중간, 우리를 발견한 적군 일부가 길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황제의 행사를 방해하지 말라...」
서걱!
어느새 나타난 죽음의 기사가 막아서는 적을 베었다.
질적으로도 그렇지만, 병력 수도 압도한다. 우리의 길을 막아설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전장이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태연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목적지를 향한 여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멜롯 궁전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이쿠, 어지간히들 모였네.”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성벽을 까맣게 채운 건 카멜롯의 정예 병사였다.
일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들은 권좌의 격을 높여 부활시킨 이들일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다.
윌리엄 아재를 비롯한 사도와 원탁의 기사, 그리고 대마법사 멀린까지. 능히 일인군단이라 칭할 만한 그들이 막강한 기세를 흘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 중앙. 그곳에 오롯이 서 있는 건 아서 왕이었다.
“요새의 이점을 버린 채 곧바로 공격이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녀석들이 두려워하던 건 내가 아니라 바빌론의 방어 시스템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지트만 제외하면 별 볼일 없는 애송이.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네 녀석의 패인이라 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그 자만일 것이다.”
회담 때와는 달리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아서 왕. 그가 하늘을 향해 엑스칼리버를 들어 올렸다.
화악!
카멜롯 궁전 인근에서 색색의 빛이 번쩍였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각각의 문양을 새긴 대규모 병력이었다.
“이열?”
각기 다른 6개의 문양이 뜻하는 것. 그건 카멜롯을 제외한 다른 6개 권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와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어마어마한 병력이 주변을 포위했다.
동맹을 맺은 권주들끼리는 병력 이동도 자유로운 모양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주변을 포위한 병력을 훑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권주를 비롯한 신장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동맹에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은 사도까지가 한계인가보군.
뭐, 당연한 일인가?
아무리 동맹이라 해도 왕이 성을 비울 순 없는 법이니까.
“네 여정은 여기까지다!”
이미 승리를 따놓은 듯한 미소를 지은 아서 왕이 엑스칼리버를 내렸고.
두두두-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킨 병력이 매섭게 우릴 향해 쇄도했다.
키잉!
긴장이 절정에 달한 순간, 나는 나만의 시간 속을 거닐고 있었다.
「허어. 벌서 오의에 도달할 줄이야. 대체 네 녀석은 어떻게 되먹은 녀석이기에 이토록 성장이 빠른 거냐? 뭐, 가르치는 입장에서 그리 나쁘지는 않다만, 벌써 밑천까지 탈탈 털리니까 어째 기분이 좀 그렇구나. 어흠. 그래. 사족은 여기까지 하고. 제자야. 세간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고 있느냐. 그래. 전장의 지배자. 그건 이 스승이 전장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기 때문이니라. 지금 가르쳐줄 오의는 이 스승을 전장의 지배자, 사신이라고 부르게 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으니.」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 창신의 말이 들려온다.
「지금까지의 찌르기는 잊어라. 네게 가르쳐줄 오의는 찌르기를 벗어난 베기다. 허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은 피아를 식별하지 않는, 오직 살상을 위한 수라의 창법이다. 만약 네 영역밖에 아군이 있거든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꽈악.
손에 쥔 궁니르에 힘을 준다.
강력한 마력에 반응한 녀석이 창명을 토하기 시작했다.
「회풍回風. 창으로 원을 그려라. 네 사고의 영역이 닿는 모든 곳에 서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니.」
휘릭!
춤을 추듯 몸을 회전시킨다.
그러자 수평으로 든 궁니르에서 방출된 기가 고리의 형태로 퍼져 나갔고.
스팟!
갑작스레 울려퍼진 섬뜩한 소음과 함께 쇄도하던 병력의 움직임이 멈췄다.
"..."
1초간의 정적 후.
촤촤촥!
하나같이 허리가 양단 된 적 병력이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콰콰쾅!
영향을 받은 건 병력만이 아니었다.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던 성벽 또한 마찬가지.
거대한 흉터가 새겨진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입신의 창법, 그 오의가 재현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진경급 창법 Lv 1이 진경급 창법 Lv2로 격상되었습니다.]
[‘오의 : 회풍回風(★★★★★)’을 획득했습니다.]
창신에게 신의 이명을 선물했던 원동력. 일수에 전장을 지배하게 만드는 그 오의가 마침내 내 손을 통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