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고인물은 회귀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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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내를 지배하는 건 정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딜 봐도 초딩으로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새파란 동자승이 랭킹 2위의 권왕을 물러서게 한 것이다.
그냥 물러난 것도 아니다.
내부를 뒤흔든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한 웅큼의 피를 토했다.
누가 봐도 경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태연할 수 있었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모른다.
무신이 대단한 건 그 자신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휘하 제자들도 역량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은 모르는 비밀. 하지만 회귀자인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폭력은 죄악입니다.”
합장한 동자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죄악이라면서 찰지게 때린 너는 뭔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 깜찍하게 생긴 동자승의 이름은 노뜨락. 몽골어로 주먹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어느 정신 나간 부모가 주먹이라는 이름을 지어줄까.
사실 그건 무신이 직접 하사한 가명이었다.
휘하의 십삼 제자는 모두 특정한 단어를 뜻하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노뜨락, 주먹이라는 뜻의 이름을 하사받은 이유는 그가 무신의 권법을 전수받은 계승자기 때문이다.
괜히 무신이 아니다.
십팔반무예에 통달한 무신은 그것을 하나씩 떼내어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그냥 보기에는 귀여운 동자승인 노뜨락은 권법에 통달한 절대자였다.
그래.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랍긴 하다.
태연은 개뿔. 어떻게 저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대단한 스승이 있다지만 노뜨락은 어린아이였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무예를 단련했다고 해도 채 10년이 되지 않는 것.
고작 10년을 연마해 40년 동안 절대자로 군림한 권왕을 패퇴시킬 수 있다?
무협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약을 밥 먹듯이 먹고 고수들의 벌모세수에 지나가던 은거기인이 공력을 모두 전수한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다.
맨 손으로 공격했다고 하나 권왕은 각종 상위의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물론 내 눈높이에서 보자면 왜 저런 넝마를 입고 있나 싶지만, 그래도 지구에서는 꽤 괜찮은 아이템인 건 분명하다.
온갖 아티팩트로 치장한 그가 보통의 법의를 걸친 노뜨락의 일권을 버티질 못했다.
수준 차이가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이야, 쥐방울만한 게 주먹 좀 뻗을 줄 아네?”
그 높은 경지를 파악한 바포르가 반응했고.
“고인물...”
“템빨의 왕...”
곧바로 경계하는 시선이 이어졌다.
나를 바라보는 윌리엄과 닉 아재의 두 눈에서 느껴지는 건 농도 짙은 살의였다.
뜻. 단단히 세뇌를 당한 듯 나를 불구대천지의 원수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여기에 수왕인 다샤 타란도 포함된다.
랭킹 10위. 러시아를 대표하는 물의 능력자인 금발의 아가씨는 당장에라도 나에게 달려들 듯한 태세였다.
그 반응을 보고 있자니 권주들 사이에서 얼마나 미운 털이 박혔는지 알 수 있다.
질투가 나겠지.
온갖 감성팔이를 동원했지만, 나 혼자 신도를 독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경계를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이, 지금 우리 큰 형님 노려 보는 거야? 콱 마! 눈깔 먹물을 쪽 빼먹어 버릴라! 눈 안 깔아?”
역시 우리의 행동대장.
막내 녀석이 노골적인 적의를 참지 못한 채 강렬한 기세를 방출했다.
휘오오!
녀석을 중심으로 4대 속성력이 매섭게 소용돌이 쳤다.
육위계 던전에서 얻은 속성력과 강력한 아이템의 보조를 받은 녀석의 수준은 예전의 그 허접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바하무트에게 한 방 먹였을 때와 비교하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 난세의 시대에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수준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네 놈. 권주님의 행사를 방해하겠다는 건가?”
투툭!
노뜨락의 일권에 벽에 틀어 박혔던 권왕이 걸어오고 있었다.
“흐음?”
멀쩡한 그 모습에 노뜨락이 신음했다.
찰나지간 벌어진 일이었지만,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 일격은 매서웠다. 분명 예전의 권왕이었으면 꽤 낭패를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단련의 권좌의 사도였다.
사도는 권주에게 능력을 부여받아 더욱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쿠쿠쿠쿠쿵!
대기를 뒤흔드는 막강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근원지는 사왕四王. 이미 모종의 협약이 있었던 듯 나를 향한 막강한 기세를 방출하고 있었다.
“어이쿠, 이거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네...”
움찔한 막내가 내 뒤로 숨었다.
그 모습이 얄밉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거둔 식구인 것을.
“한판 하자는 거면?”
얄미운 녀석을 대신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마라.”
“여기가 네 녀석의 무덤이 될 것이다.”
콰콰콰콰!
절정에 이른 기운이 유형화되어 휘몰아쳤다.
분명 그건 예전의 십왕을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임에 분명했다.
그들의 힘이 아니다.
제각기 주인으로 섬긴 권주들이 그들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그 정도가 지나치다.
어마어마한 권능을 빌려주고 있는 것을 보니 제약으로 묶여있지 않은 사도들을 이용해 나를 제거할 심산인 것 같다.
이것들 봐라?
「감히 주군에게 적의를 보이다니. 내 당장 너희들을...」
“잠깐."
길길이 날뛰는 아만을 제지했다.
생각해 보니 빡친다.
권주도 아니고 고작해야 사도 따위가 나를 어떻게 해 볼 작정인 거다.
이건 내가 얕보이고 있는 거 맞지?
“주제를 알아야지. 몸 성히 못 돌아가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파앙!
찰나의 순간 분출된 마력의 파동이 일대를 지배했다.
슈슈슈슉!
그 마력에 반응한 수천 자루의 창이 장엄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어느새 180레벨을 달성했다. 무한궤적의 마력 파동에 반응한 창의 종류가 더욱더 늘어난 것.
「뀨우!」
마력에 반응한 건 창만이 아니었다.
내 의지에 감응한 레비가 사나운(?) 울음과 함께 아공간을 찢고 나왔다.
화악!
일순간 장내에 파도가 쳤다.
파도는 형체를 만들었고, 수백 미터에 이르는 몸체가 완성되었다.
「카아악!」
본체화를 이룬 레비의 포효가 포탈라궁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아직 완전하진 않으나 분명 그건 용족의 고유 권능인 피어Fear였다.
마력에 실린 절대적인 위엄.
공간을 지배한 수천 자루의 창.
그리고 마수의 왕 레비의 본체화까지.
“죽고 싶으면 한 마디만 더 해. 아주 벌집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
"..."
아무리 권주를 등에 업은 사왕이라 해도 찍소리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할 마음 없으면 당장 꺼져. 오늘은 특별히 넘어가 줄테니까.”
물론 진심으로 죽일 생각은 없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피해자였다.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물었고, 그로 인해 세뇌를 당한 피해자.
죽음을 각오한 채 덤빈다면 모르겠지만, 일단은 위협으로 만족할 생각이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들의 정신을 장악한 권주가 사라진다면 다시금 본래의 정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두, 두고 보자…”
“반드시 이 치욕을 갚을 테니.”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물러났다.
그들만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권주.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무모하게 덤벼 쓸만한 장기 말을 잃는 것 보다는 한 발 물러서는 것을 선택했을 터.
꽁지가 빠져라 도주하는 사왕을 응시했다.
멀찍이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
내 진실된 힘의 일부를 본 노뜨락.
두 눈동자가 화등잔 만하게 커진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갸초 님을 뵙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의미가 없는 물음이었다.
무신, 그를 만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들이댈 수 없어서 정중하게 의향을 물었다.
“죄송합니다.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을 들일 수 없습니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노뜨락이 합장을 풀지 않은 채로 고갤 저었다.
조금 전 사왕의 방문과 다르지 않은 거절의 의사였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초대장을 받는 수밖에.”
의미심장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노뜨락의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초대를 받는 것. 그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바포르!”
“예압!”
호명에 반응한 바포르가 성큼 다가왔다.
“네가 나설 차례다.”
“오, 진짜? 내가 줘패도 되는 거야?”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해 봐.”
“오예!”
기뻐하는 바포르와 노뜨락을 번갈아 바라본다.
무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초대장을 얻는 방법. 그것은 13층에 이르는 궁을 지키고 있는 그의 제자 13명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
스슥!
손 끝에서 그려진 현란한 검의 궤적이 공간을 지배했다.
그것은 마치 무한한 검이 생겨 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콰콰콰쾅!
하지만 그보다 더욱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각 방패. 해골 문양이 그려진 방패가 요란하게 움직이며 그 궤적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던 것.
절대의 방어를 펼치는 건 녹색 부정의 아우라를 뿜어대고 있는 아만이었다.
「좋은 검법이다. 허나 변화에 집중한 나머지, 위력이 아쉽구나.」
공방의 와중에도 부족한 부분을 지적한다.
아만, 이 녀석.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상대를 기만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어디 이것도 막아보시오!”
그 도발에 열이 받았는지 중년의 승려가 공중에 몸을 띄웠다.
“일도양단!”
힘찬 기합과 함께 손에 쥔 검을 내리 그었다.
콰콰콰!
마치 검과 하나가 된 듯한, 절정의 검법이었다.
「좋은 검이다!」
아만 또한 그 기세를 읽었는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남을 칭찬할 틈이 있다는 건 그 여유를 상징하는 것.
부웅!
그의 마력에 반응해 거대한 기의 방패가 생성되었다.
오밀조밀한 마력에서 느껴지는 건 견고함. 그것은 절대의 벽이었다.
콰쾅!
모든 것을 뚫는 검과 모든 것을 막아내는 방패가 충돌했고.
쿠콰콰!
충격파가 장내를 뒤덮었다.
콜록!
이 망할 놈의 먼지.
저 녀석은 빨리 승부를 내랬더니 온갖 폼이란 폼은 다잡고 있네.
기회가 되는 대로 정신 교육을 시켜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드러난 장내의 상황을 응시했다.
빠캉!
승려가 쥐고 있던 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두동강났다.
“소승이 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3층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마지막 제자 간그가 패배를 인정했다.
검이라는 뜻을 가진 그는 마지막 13층을 지키는 무신의 수제자였다.
“이제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셈이로군요?”
“그러합니다. 스승님이 계시는 성인의 예배당으로 드시지요.”
간그가 합장을 하며 공손히 고갤 숙였다.
조금 전까지 우리는 무례한 침입자였으나 13명의 제자를 모두 쓰러뜨려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손님이 되었다.
「검사여. 참으로 좋은 승부였다.」
아직 승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아만이 칭찬했지만.
“소승은 검사가 아닙니다. 그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수도자일 뿐.”
손사래를 치는 그를 뒤로한 채 백궁을 지나 홍궁에 들어섰다.
일반 승려와 방문객이 머물 수 있는 백궁과 달리 홍궁은 신성한 의식을 치루는 장소. 그렇기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진입할 수가 없었다.
길게 이어진 회랑을 지나 홀의 북쪽, 오직 자격이 주어진 이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성인의 예배당을 마주했다.
굳게 닫힌 예배당 문 앞.
「마침내 초대를 받은 성인聖人이 도착하였구나.」
끼이익-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의지와 함께 예배당 문이 열렸다.
금빛으로 물든 예배당 안. 주변의 장식물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예배당의 중앙, 그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젊은 승려였다.
이마에 박힌 노란 보석. 적색과 황색이 조화된 법의를 걸친 그는 내가 아는 무신이 분명했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완전히 개안해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습니다. 소승은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설마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거?
“대단치 않은 재주입니다. 혜안意眼은 때때로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볼수도 있으니.”
혜안이라.
그 사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니. 과연 무신인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척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것을 먼저 밝힐까 합니다.”
마치 그의 눈에 벼락이 치는 것처럼 번득인다.
“소승은 환생자還生子입니다.”
그건 분명 충격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리 크게 놀라지 않는다.
가디언들이야 원체 이상한 일을 많이 겪은 백전노장이었고, 임수아와 막내의 경우에는 내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오, 반갑습니다. 저는 회귀자回歸子인데.”
회귀자도 있는데 환생자가 있다고 놀라워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