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고인물은 고개가 빳빳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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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에 발현된 오대 신기의 위력은 일대를 초토화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정면. 보이는 거라곤 무너진 건물의 잔해밖에 없다.
그나마 이게 다행한 거다.
만약 봉쇄의 스크롤로 인해 차원이 단절되지 않았다면 인근이 아니라 도시가 날아가 버렸을 테니까.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아직 녀석들, 종말의 기사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드레드 때와는 달리 그들의 죽음과 관련된 알림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르르!
역시!
밀어내는 힘에 의해 쌓여 있던 잔해 중 일부가 떨어진다.
잔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했던 종말의 기사들이었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면 벌집과 같이 구멍이 뚫린 육신이 점차 빛의 가루로 흩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대는 정말 강하구나...」
악귀와도 같았던 조금 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처연하고 슬픈 미소를 지은 모르가나가 먼저 입을 뗐고.
「우리는 패했고, 그대가 승리했다.」
「그대는 승리를 거머쥘 자격이 있는 영웅이다.」
귀네비어와 비비안 또한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이것들이 왜 이러지?
과거의 기억에 의하면 악담이란 악담은 다 퍼부으며 소멸을 맞이했는데.
「하지만 명심하라. 이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그와의 맹약에 따라 시련을 내리는 존재.」
「맹약에 따라 우리의 임무를 다했고, 이제 그대에게 더욱더 큰 시련이 찾아오리라.」
영문 모를 말이다.
묻고 싶은 말은 많다. 그러나 나는 끝내 입을 뗄 수 없었다.
스르륵-
모르가나, 귀네비어, 비비안.
과거 인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재앙의 존재가 빛의 가루가 되어 소멸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질병의 기사 귀네비어를 쓰러뜨렸습니다.]
[‘칭호 : 여왕의 최후’를 획득했습니다.]
[기근의 기사 비비안을 쓰러뜨렸습니다.]
[‘칭호 : 요정의 최후’를 획득했습니다.]
[죽음의 기사 모르가나를 쓰러뜨렸습니다.]
[‘칭호 : 마녀의 최후’를 획득했습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레벨이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8개를 획득했습니다.]
...
[종말의 네 기사를 단신으로 처치하는 경이로운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관리자가 당신의 굉장한 업적을 치하하지만, 그 보상에 관해서는 잠시 고민에 잠깁니다.]
종말의 네 기사를 모두 처치했다.
덕분에 레벨은 170이 될 수 있었지만, 레벨업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줄곧 의문으로 남았던 관리자의 보상. 어김없이 그 보상이 전해지는 듯했으나 갑자기 고민에 잠겼단다.
아니, 보상을 줄 거면 줄 거지 고민은 왜 하는 건데?
하지만 그 보상에 대한 의문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축하합니다.]
“뭐, 뭐야?”
갑작스레 들린 음성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건 평소 듣던 알림이 아니었다.
마치 지구 전체에 울리는 확성기와도 같다. 나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인류에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이 시간 지구는 종말의 시련을 무사히 완수했습니다.]
[경이로운 일입니다. 모든 차원 중에서 최하위에 속하던 지구가 중위권의 기록으로 시련을 완수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과거에는 겪지 못했던 상황에 어안이벙벙하다.
종말의 시련?
기록?
회귀자인 나도 모르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차원 레벨이 1에서 2로 격상합니다.]
[레벨이 상승해 최후의 종말이 연기되었습니다.]
[차원 레벨 상승으로 인한 두 번째 대격변이 시작됩니다.]
쿠쿠쿠쿵!
한 차례 진동이 세계를 휩쓸었다.
지진이 아니다. 모두가 선명하게 느끼는 그 진동은 지구 전체가 격하게 몸을 떠는 현상이었다.
[두 번째 대격변이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시련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어 종말에서 벗어나길 기원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종말의 기사를 처치했다는 기쁨도 잠시.
갑작스러운 변화, 그야말로 대격변으로 인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차원 레벨 상승에 지대한 공헌을 한 당신에게 관리자가 기쁨을 표현합니다.]
[관리자가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보십시오.]
격하게 기쁨을 표현하는 관리자라는 놈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
「조금 전 울려 퍼진 의문의 메시지로 인해 전 세계가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문의 메시지가 전했던 대로 실제로 종말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충격과 공포에 빠진 인류는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종말론을 외치는 일부 광신도들이 폭력 시위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곳은 영국 윌트셔 주, 솔즈베리 평원입니다. 세계의 진동과 함께 나타난 성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리는...」
「중국 광동성 십만대산에서 솟아난 전각의 정체가 연일 화제인 가운데...」
「지브롤터 해협에서 솟아난 신비의 섬. 사람들은 이곳을 전설의 해저 대륙, 아틀란티스라 부르고 있으며...」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나오는 거라곤 뉴스밖에 없다.
세계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 빠졌다.
왜 아니겠는가. 갑자기 울려 퍼진 정체 모를 음성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성과, 전각, 섬 등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강력한 결계로 인해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곳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초대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광의 권좌權座에 앉은 승리의 왕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단련의 권좌에 앉은 절세고수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신비의 권좌에 앉은 해저의 왕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불사의 권좌에 앉은 오만한 왕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정복의 권좌에 앉은 뇌전의 왕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지혜의 권좌에 앉은 애꾸눈 왕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
두 번째 대격변과 함께 계속 울리기 시작한 알림이었다.
그 초대 메시지가 어디서 온 것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세계 각지에서 솟아난 신비의 장소와 관련이 있을 터. 그리고 이 초대를 받은 이만이 결계를 뚫고 그 내부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스터. 계속해서 들려오는 이 귀찮은 알림은 뭔가요?”
「시도 때도 없이. 정말 귀찮은 알림입니다, 주군.」
“아오! 도대체 얼마나 초대를 보내는 거야!”
“질색. 거절. 단호.”
초대를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네 명의 가디언. 녀석들 또한 권좌에 앉은 정체 모를 놈들의 초대를 받고 있었다.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아요...”
“씨부우럴! 큰 형님. 자꾸 초대 날리는 이 쉐끼덜, 손 좀 봐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임수아와 막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저 권좌에 앉아 있는 녀석들이 부르는 건 선택된 인재라는 것이다.
이건 자랑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다.
적어도 지구 어디를 뒤져봐도 가디언과 임수아, 그리고 막내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는 없을 것이다.
괜히 어벤져스라 부르는 게 아니다.
이들은 내가 종말을 막기 위해 영입한 손꼽히는 인재였다.
만약 저 권좌에 앉은 놈들이 인재를 원하는 것이라면 가장 먼저 나와 내 주위에 있는 동료들을 원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인재를 원한다?
그 말인즉 인재를 모아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군?」
아만이 내 의향을 물었다.
지금쯤이면 뭔가 결정을 내렸을 거로 판단했을 테고, 녀석의 직감은 정확했다.
"초대를 받았으니 적어도 한 곳 정도는 방문해 주는 게 도리겠지.”
물론 그 모든 초대를 다 수락할 순 없다.
적어도 한 곳. 현재 나와 가장 연관이 있는 곳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멀린. 솔즈베리 평원 따블이요!」
물론 행선지로 가기 위해 빠른 택시 이용은 필수였다.
*
지잉-
공간을 넘는 특유의 현상과 함께 발끝에 지면이 닿았다.
고갤 들어 좌우를 살피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동산, 솔즈베리 평원이었다.
"..."
평소라면 내 요청에 한숨부터 쉬었을 멀린은 조금 전부터 아무 말이 없다. 마치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수행자마냥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
조금은 익숙한 평원을 어느 정도 걷자.
"우왓!"
"와아!"
일행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사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성이 돌연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장애물이라곤 하나 없는 평원에 갑자기 성이 나타났다?
인근에 시각을 혼란하게 하는 강력한 결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자네도 초대를 받은 모양이로군.”
높게 솟은 성벽의 입구. 그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 나에게 무참히 뚜드려 맞았던 윌리엄 아재와 원탁의 기사 11인이었다. 아, 물론 멀린도 포함해야겠지만 말이다.
예상한 이들의 등장이었기에 별로 놀랍지도 않다.
영광의 권좌. 그리고 승리의 왕이라는 단어를 통해 나를 초대한 주인이 누군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음. 너무 동네 옆집 들어가듯이 물어봤나?
“고민 중이야. 과연 이 경계를 넘어도 될지...”
윌리엄 아재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하긴, 고민이 될 만도 하다.
그들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강한 이끌림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체를 파악했다 해도 변화를 갑작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특성상 접근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
지금 그들은 경계에 서 있다.
이 변화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해야 할지.
“그럼 제가 먼저 실례를...”
하지만 나는 변화가 두렵지 않다.
맞서야 한다면 맞설 것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을 테니.
저벅.
모여 있던 그들 사이를 지나 활짝 열린 성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이잉-
익숙한 현상이 나를 반겼다.
아마 이곳, 성에 펼쳐져 있던 결계를 통과하는 현상일 것이다.
보통 사람은 결계를 넘을 수 없겠지만, 주인의 초대를 받은 나는 약간의 이명과 함께 그곳을 넘을 수 있었다.
빠빠라빰!
갑작스레 울려 퍼진 팡파르가 우리를 반기고.
철컥철컥.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포효하는 황금빛 사자 문양을 가슴에 새긴 풀 플레이트 아머의 기사 둘.
“카멜롯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왕과 위대한 기사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친!
저 강력한 기세를 흘리는 기사가 고작 안내를 위한 이들이라고?
“맙소사...”
“정말 카멜롯이었다니...”
뒤늦게 나를 따르던 윌리엄 아재와 원탁의 기사들이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지.
카멜롯.
신화나 전설에만 나오던 그 성을 실제로 목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나도 놀랍기는 하다.
다만 그들과는 조금 다른 목적이 있는 나에게는 환상의 성보다는 그들이 지닌 무력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안내를 맡은 기사 두 명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우릴 안내했다.
외성을 지나, 내성. 그리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 마침내 알현실에 당도했을 때.
“카멜롯의 손님을 맞이하라!”
우리의 등장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듯 중후한 음성이 성안에 울려 퍼졌다.
끼이익-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건만 알현실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으으..."
“어, 어어어?”
그와 함께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누가 시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가 힘으로 누른 것도 아니었다.
윌리엄 아재와 멀린, 그리고 원탁의 기사 11인 모두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제, 제길...”
「크으으으.」
그것은 가디언 사인방, 임수아, 그리고 막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 원인을 모를 턱이 없다.
구구궁!
지금도 계속 나를 짓누르는 절대적인 위엄에 저항한다.
알현실을 방문한 이들 중 오직 나만이 그 위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절대 굽히지 않는다.
자꾸만 내리누르는 위엄에 저항하며 고갤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호오?”
강력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는 12명의 기사가 양측으로 도열해 있다. 그리고 카펫의 끝,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왕좌에 앉은 금발의 미중년이 흥미로운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그렇군.
영광의 권좌, 그곳에 앉은 승리의 왕은 바로 아서.
전설에나 등장하는 왕국 카멜롯의 왕이자 엑스칼리버의 주인이기도 한 신화속의 영웅이다.
이야기 속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그 전설의 영웅왕이 오만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