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고인물은 펫도 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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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실.
컴컴한 실내를 비춰주는 것이라곤 타들어 가고 있는 양초 하나뿐. 하지만 미약한 그 불빛을 통해 장내의 광경을 엿볼 수는 있었다.
족히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타원형의 테이블에는 정확히 18개 자리만이 마련된 상태였다.
그중 빈 좌석은 하나. 하나같이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린 17명의 존재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 혼의 기억을 통해 확인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18의원 세르게이가 사망했다.”
타원형의 끝, 상석에 자리한 1의원이 입을 열자.
“대단한 루키가 등장했군.”
“루키는 무슨. 이미 루키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는 실력이던데.”
“릴리트를 일격에 소멸시키다니...”
그 말에 보태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명색이 동료가 죽었지만, 이에 대해 애석함을 표하는 이 하나 없었다.
물론 이들이 비정한 탓도 있겠지만, 동료의 죽음을 잊게 할 만큼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초인이 베놈의 18의원 중 하나, 세르게이를 쓰러뜨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소환된 릴리트마저도 소멸시켰다.
장내에 자리한 이들 모두가 세르게이를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는 강자라곤 하지만, 릴리트마저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 릴리트를, 고위급 악마를 일격에 소멸시키다니. 놀람을 넘어 경악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처분은 결정되었습니까?”
장내의 소요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난 후 다섯 번째 자리의 의원이 물었다.
“회유.”
1의원이 간결하게 답했다.
“역시!”
“하긴 저 정도 실력이라면...”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베놈이란 집단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규칙은 약육강식이었다.
강력한 능력을 타고났다는 건 그만큼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을 벌레로 취급하는 이 집단에서 무력이 곧 법이었다.
세르게이는 약해서 죽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강자가 대체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방안은 없을 것이다.
“이미 적의를 품은 것 같던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5의원이 조심스레 의견을 전했다.
회유가 가장 좋은 방안인 건 사실이지만, 그게 쉬울 턱이 없다.
세르게이의 죽음과 함께 그가 남긴 혼의 기억이 의원들에게 전달되었다.
생생하게 펼쳐지는 기억의 영상 속에서 확인한 것은 베놈을 향한 그의 적대감이었다.
베놈에 대한 강렬한 적의. 기억을 들여다본 모두가 그것을 짐작하고 있던 바다.
“특별히 그분의 지시로 회유를 위한 선물을 마련해뒀다. 고유 번호 11번을 부여받은 마창魔槍과 21번 갑옷. 강력한 힘을 원한다면 우리의 제안을 거절할 턱이 없겠지.”
베놈에 가담한 장인. 그가 제작한 수많은 무구 중 고유 번호를 부여받은 아티팩트는 이곳에 있는 의원들마저 탐내는 보물이었다.
“만약 그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듯, 5의원이 다시금 물었다.
“같을 길을 걷지 못할 위험 요소는 마땅히 제거해야겠지.”
회유가 아니면 죽음뿐.
베놈은 후에 큰 위협이 될 만한 골칫덩이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번 임무는 5, 10, 11, 16, 17의원. 다섯 명이 함께 움직인다.”
베놈은 이번 사태를 좌시할 마음이 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한 수. 그들은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섯 명의 의원을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
[마스터의 영역에 도달해 듀얼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원하는 특성을 선택하십시오.]
왕좌의 홀, 흘리드스캴프에 앉은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넋 놓고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선택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오스에선 플레이어가 100레벨에 도달하게 되면 듀얼 특성이 활성화된다.
특성이란 달리 말해 직업과 같은 것이다.
최초 나는 창을 주 무기로 선택해 창사槍士의 길을 걸었고, 창과 관련된 숙련도 및 스킬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0레벨부터는 조금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게 듀얼 특성이다.
내 눈앞에는 다양한 특성을 담은 단어들이 떠 있었다.
신성, 화염, 빙결, 비전 등, 눈앞에 있는 특성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나는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화염’을 선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순간부터 나는 창에 불꽃의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창에 속성을 담을 수 있는 마창사魔槍士. 그것은 창을 선택한 플레이어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유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 많은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시금 경고하는데, 경지에 접어들거든 다른 길에 눈독을 들이지 마라. 이 스승이 창안한 창의 길은 한눈을 팔면 안 되느니라. 창, 창, 창! 네 녀석은 자나 깨나 창만을 생각해야 하고, 창의 길 위에서 죽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경지에 들어설 수 없으니...」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트리플 마스터에 근접했던 창신. 그의 창법을, 오의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특성을 선택할 수가 없다.
이 망할 놈의 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인 거다.
[듀얼 특성으로 ‘창’을 선택하겠습니까?]
[Yes / No]
화려한 마창사여 안녕.
현실에서도 나는 창 덕후의 길을 가련다.
[주의하십시오. 한 번 선택한 특성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듀얼 특성으로 ‘창’을 선택하겠습니까?]
[Yes / No]
이것 봐라.
시스템조차도 만류하는 일이다.
지금 내가 하는 게 그런 미친 짓인 거다.
하지만 번복은 없다. 우직한 길이긴 하나 창신이 가고자 했던 길은 절대자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나를 더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라.
[듀얼 특성으로 ‘창’을 선택했습니다.]
[창으로 행하는 모든 공격 및 숙련도, 스킬의 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창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해 더욱더 깊은 뜻을 깨우칠 수 있게 됩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른 스킬과의 시너지는 포기했지만, 대신 창의 기본적인 위력이 대폭 상승했다.
그뿐인가. 창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면서 창신이 내게 남겨준 강력한 비기와 오의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게임에 이어 현실에서도 창 덕후가 된 셈이다.
「깡패, 요청했던 창과 갑옷이 완성되었다. 얼른 찾으러 와라.」
이어진 창 덕후의 길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파베르의 의지가 전해졌다.
곧바로 왕좌를 벗어나 녀석이 있는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열기로 가득한 대장간 안. 파베르 녀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눈깔을 왜 그렇게 떠?”
“깡패, 놀라지 마라. 내 대장장이 인생의 걸작품이 탄생했다!”
아하!
왜 재수 없는 표정을 짓는가 했더니 이번에 완성된 무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실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저 깐깐한, 방망이 깎는 노인과 같은 녀석은 매번 제작하고 나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툴툴댔으니까.
후우. 그래서 더 걱정이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이번에 제작한 건 내가 쓸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지?”
조금 전까지 싱글벙글하던 녀석이 무섭게 노려본다.
“여차여차한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이번에 내가 100레벨로 폭렙을 했거든. 아무래도 68레벨 제한은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대목에서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며 녀석을 응시했지만.
“그거라면 문제없다.”
녀석의 분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문제없다고?”
“그렇다, 깡패. 이번에 완성된 걸작은 레벨 제한을 받지 않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
마치 자랑스러운 자식을 보여주듯 양손으로 받쳐 든 것을 건넸다.
“랜스Lance?”
녀석이 건네준 건 랜스였다.
일반적인 창이 날카로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이건 그냥 널찍하고 뭉텅하다.
보여주기 식 토너먼트인 마상시합을 위해 고안된 창.
“나보고 이걸 쓰라는 건 아니지? 그리고 왜 창 하나뿐이야. 갑옷은?”
어이없다는 듯 녀석을 째려봤다.
“쯔쯔. 내가 이런 무지한 깡패 녀석이 뭐가 이쁘다고 그렇게 노력했는지.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그 내부를 봐라. 네 녀석 눈깔은 장식이냐?”
오냐. 만약 내가 확인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하면 그날이 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거신창巨神槍
종류 : 창(일체)
등급 : 신화
착용 효과 : 고유 권능 ‘거신의 창’ 사용 가능
주인의 마력과 함께 명령 ‘디비전Division’을 통해 창과 갑옷으로 분리 가능
설명 : 적룡왕 플람메우스와 마룡 테네브레의 이빨과 뼈를 통해 제작된 신기.
파베르의 실험 정신이 들어간 이 작품은 자칫 잘못하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실패작으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원망이 듣기 싫었던 파베르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완성할 수 있었던 일체와 분리의 무구다.』
“으응?”
일단 등급은 신화급으로 매우 성공적이다.
그런데 뭔가 설명이 모호하다. 일체와 분리의 무구?
게다가 신화 등급이면서 무슨 착용 효과가 이렇게 부실하지?
“그러니까 마력을 흘러 넣은 후에 디비전...”
파파팍!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랜스를 구성하고 있던 파편이 흩어져 내 몸을 감쌌다.
그것은 뭐랄까. 마치 변신 소녀나 로봇이 삼단 변신 합체할 때의 그런 광경이라고 해야 하려나?
“우오오!”
나도 모르게 환호하고 말았다.
“그렇지!”
파베르 또한 다르지 않다.
사내라면 알 것이다. 어렸을 적 본 변신물의 주인공이 된다는 심정이 어떠한 것인지.
변신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창과 갑옷으로 분리되어 나의 무기와 방어구가 되었다.
“죽이는데?”
설혹 마음에 든다 해도 재수 없는 녀석에게 욕이나 한바탕 퍼부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분리된 창과 갑옷은 내가 봐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적빛을 띤 창과 검은 광택의 플레이트 아머. 용을 형상화한 듯한 형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상대의 마력과 함께 성장하는 에고Ego의 무구. 네 녀석의 레벨이 성장할 때마다 능력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녀석의 말이 맞다.
아오스에 존재하는 무구 중에는 플레이어와 함께 성장하는 형태도 있었다. 에고를 지닌 무구가 바로 그것. 파베르 녀석이 완성한 거신창은 그러한 신비한 능력을 갖춘 아이템이었다.
“최대 성장 제한은?”
“200레벨까지는 가능할 거다.”
“역시 그 정도가 한계네.”
익히 예상했다.
설정상 파베르의 제작 한계는 250레벨까지다.
물론 그 한계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최고의 재료를 준비해야만 한다.
적룡왕과 마룡의 부속품은 200레벨이 한계.
여전히 창고에 박힌 ‘그것’을 꺼내기 전까지는 한계치의 무구를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수고했어. 이 정도면 당분간 무기나 갑옷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흥! 네 녀석의 칭찬 따위가 듣고 싶어서 만든 건 아니다.”
츤데레 녀석.
말은 그렇게 하면서 칭찬 한마디에 입이 귀에 걸렸구만.
“다음에도 볼 일 있으면 들를게.”
“다음은 없을 거다.”
“어, 그래. 나도 사랑해.”
“...”
몸서리치는 녀석을 뒤로한 채 대장간을 나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창과 갑옷을 손에 넣었다.
성장하는 무구라니. 그렇지 않아도 레벨에 맞춰 무기나 방어구를 교체하는 것도 상당히 귀찮았는데 수지맞았다.
이제 특별한 위기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무기나 방어구를 교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룰루~!
뜻밖의 성과에 콧노래를 부르며 부지런히 이동했다.
무기와 방어구를 얻었지만, 아직 내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100레벨이 되면서 내가 얻은 혜택은 듀얼 특성만이 아니었다.
펫. 플레이어의 전투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콘텐츠가 해금된 것이다.
대장간에서 조금만 더 가면 보이는 금색의 문. 이곳이 바로 각종 펫이 보관된 ‘부화의 방’이었다.
끼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입할 수 없었던 문이 너무도 손쉽게 열렸다.
후욱!
대장간과는 달리 따뜻한 정도의 온풍이 나를 반겼다.
마침내 드러난 전경. 사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널찍한 공간. 그곳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다양한 종류의 알이었다.
메추리 알부터 타조 알까지, 크기도 제각각 모양도 제각각인 알.
누군가 보면 알 장사라도 하는 줄 알겠지만, 이게 내 노가다의 결실이다.
펫은 캐릭터의 전투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캐릭터 본신의 능력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아이템과 펫이었다.
주위를 장식한 수많은 알이 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저 멀리, 유리 상자 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하나의 알에 향해 있을 뿐이다.
드드득!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유리 상자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황금알.
“드디어 보게 되는구나!”
종말의 날 직전. 나는 내가 모은 다섯 개의 전설급 펫을 조합해 부화하지 않은 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이 황금알이다.
조합한 이유는 하나. 아오스 역사상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신화급 펫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끝내 그 결과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종말이 코앞인데 고작 게임의 펫 따위를 누가 신경이나 쓸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지금에서야 그 결과를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신화급 펫을 얻을 확률은 낮다.
재수 없으면 조합에 사용된 전설급 펫과 똑같은 게 부화할 수도 있는 것.
뭐, 그것도 괜찮다.
전설급 펫이라 해도 내게 어마어마한 보너스 능력치를 전해줄 테니.
끄그극-
아귀가 잘 맞물린 유리 상자를 들어 올렸다.
드득, 드드득!
주인을 알아본 듯 황금알이 더욱 강렬하게 떨기 시작했다.
“신화로 가즈아!”
긴장되는 속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힘껏 소리 지르며, 진동하고 있는 황금알에 손을 가져갔다.
쩌저적!
내 손길이 닿은 그 순간 황금알에 균열이 일었고.
빠각!
기다렸다는 듯 황금빛 광채를 뽐내는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축하합니다. 신화 등급의 펫, 마수의 왕 레비아탄Leviathan을 획득했습니다.]
“레, 레비...”
솔직히 기대했지만, 막상 또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신화급 펫의 탄생. 하지만 나는 그 감격의 순간을 만끽할 수가 없었다.
[탐지의 완드가 침입자를 감지했습니다.]
[구속의 완드가 침입자를 속박합니다.]
[강력한 외부의 힘이 속박을 파괴합니다.]
집 근방에 설치해놓은 각종 완드가 불법 침입자를 알려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