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고인물은 크로노스에게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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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
본래는 종말이 올 때까지도 공석으로 남아 있어야 할 자리. 새하얀 베일로 덮여 있었던 마지막 한자리는 내 차지가 되었다.
아, 부담스럽다. 솔직히 이 자리가 너무 부담스럽다.
가장 뛰어난 기사의 자리라서가 아니다.
원탁에 앉은 11명의 기사, 저 아재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부담스럽다.
“...”
원탁회의가 시작된 지 수분이 지났다.
하지만 정작 언급했던 안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나만 바라보고 있다.
얼굴이 뚫어진다는 게 뭔지 오늘 확실히 깨닫는 중이다.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그만 보시죠?”
결국, 참다못해 한 마딜 던졌다.
“어, 어흠!”
“나도 모르게 그만...”
그제야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린다.
“이해하게. 자네가 어디 보통 유명해야 말이지.”
상석에 앉은 윌리엄 아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유명? 제가요?”
이건 또 무슨 소리냐.
갤러해드의 십이좌를 차지한 것 때문에 본 게 아니었나?
“자네는 뭐랄까. 음,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초인계의 아이돌? 뭐, 그런 존재라고 볼 수 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본인만 모를 뿐이지. 자네의 활약을 보게. 초유의 사태라 할 수 있는 블랙 포탈을 단신으로 제압한 건 물론 하이 랭커를 비롯한 랭커 100여 명을 단숨에 쓸어버렸지. 초인들 사이에서는 자네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괴물 루키. 초인 역사상 가장 미쳐 날뛰는 괴물이라고 부르더군.”
윌리엄 아재의 말에 뒤늦게야 내 활약을 돌아봤다.
괴물 루키라. 확실히 그 평가가 어울린다.
블랙 포탈만 해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데 정식 초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이 랭커 및 랭커 100여 명을 쓸어버렸다.
장담하는데 대격변 이후 이런 성장세를 보인 초인은 없었을 것이다.
“음.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네요.”
나도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던가. 이 주체못할 실력이 이제는 초인들 사이에서도 화자가 되는구나.
“이제야 알겠다? 겸손은 어디 갖다 버렸나?”
“이 정도 실력이 있는데 겸손까지 해야 하나요?”
“하하! 그렇지. 자네 같은 실력자라면 그 정도 패기는 보여야지.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단 말이야.”
윌리엄 아재의 날카로운 안광이 나를 훑는다.
위험하다.
이 호승심 강한 아재가 저런 식으로 바라본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가. 당장 엑스칼리버를 빼 든 채 대련하자고 우길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원탁회의를 소집한 안건은 뭐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작정한 윌리엄 아재와 대련했다간 몸 성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게 빤하기 때문이다.
“으음...”
효과는 굉장했다!
호승심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대번에 바뀌었다.
“조금 전, 멀린의 예언이 발현되었네.”
그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예언이 말입니까?!”
“이번에는 또 어떤...”
원탁의 기사 모두가 표정을 굳힌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시공간의 마법사라는 이명과 함께 ‘예언가’라는 명칭으로도 잘 알려진 멀린. 그에게는 예언이라는 강력한 특성이 있었다.
하지만 예언은 원할 때 언제든 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류를 위협하는 큰 위기가 닥칠 때면 불현듯 찾아온다.
방금 윌리엄 아재가 말한 멀린의 예언 발현은 인류에 커다란 재앙이 닥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발언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예언이 발현된 후 멀린이 의식을 잃었다는 사실일세. 지금도 40도가 넘는 고열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하고.”
“맙소사!”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로군요.”
원탁의 기사 모두가 침음성을 삼켰다.
사실 나도 조금은 놀랐다.
사실 원탁회의를 소집했을 때부터 보통 안건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이야.
예언의 특징 중 하나는 발현되고 난 후 찾아오는 몸의 이상이었다. 얼마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냐에 따라 사건의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는 것.
“지난 로마의 악몽 때도 의식을 잃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통칭 로마의 악몽이라 불리는 사건.
콜로세움 지하에 감춰져 있었던 던전이 폭발했고, 그곳에서 쏟아져 나온 검투사Gladiator들로 인해 수천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내 기억에도 생생히 남아 있는 이 사건을 예언한 대가로 멀린은 심한 열병을 앓아야만 했다. 하지만 의식은 잃은 수준은 아니었다.
수천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았건만 지금은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나지도 않는 중이란다.
“예언 내용은 어땠습니까?”
비록 뜬구름 잡는 말이긴 하지만, 상황을 묘사한 예언을 남긴다.
보통은 그 예언을 듣는다고 해도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르다.
이들에게는 미래, 그리고 나에게는 과거가 되는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예언 내용만 안다면 충분히 어떤 사건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학살의 거인이 내려와 붉은 악마의 숭배자들을 침묵케 하리라.”
“으음...”
“여전히 알 수 없군...”
과연 뜬구름 잡는 말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예언만 들어서는 단서를 유추할 어떤 내용도 떠올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학살의 거인과 붉은 악마의 숭배자라...”
윌리엄 아재의 말을 듣는 순간 번뜩이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항상 중요한 뭔가를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이 더러운, 간질간질한 느낌.
“^&!$^”
“%!^!#”
예언에 관해 원탁의 기사들이 토론하고 있지만, 그 어떤 내용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고도의 집중을 펼친 것처럼 기억의 단편을 뒤지고 또 뒤진다.
“아!”
마치 번개가 내리치듯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이마를 쳤다.
안일했다. 대한민국이라는 틀에만 갇혀서 넓은 범위를 바라보지 못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나?”
윌리엄 아재가 나를 응시했다.
“오늘 예정된 축구 경기가 있나요?”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졌다.
“축구 경기? 오늘이라면...”
“오후 3시, 올드 트래퍼드Old Trafford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긴 하지.”
아마 축구를 좋아하는 듯 가웨인이 대신 답했다.
이렇게 되면 확실하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끔찍한 재앙. 그것이 곧 있으면 터질 예정이다.
갑작스러운 질문으로 내게 모이는 시선을 무시하며 핸드폰을 열었다.
[PM 2 : 55]
씨발!
빌어먹은 학살이 벌어지기까지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 올드 트래퍼드로 가세요!”
“무슨 일이지? 올드 트래퍼드에는 왜?”
“맨체스터의 상징, 붉은 악마. 그리고 붉은 악마의 숭배자라는 건 맨체스터의 팬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말할 시간도 없어요. 그곳에 모인 수만의 관중이 위험하다고요!”
“이런!”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필이면 이럴 때 멀린이...”
윌리엄 아재가 안타까움의 탄식을 뱉어냈다.
공간 이동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기에 올드 트래퍼드까지 가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서 가보세.”
“알겠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아득히 넘어선 그들이라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5분. 이렇게 이동해서는 결국, 늦을 수밖에 없다.
“먼저 가겠습니다.”
찌익!
짧은 인사를 끝으로 귀환의 스크롤을 찢었다.
“자네...”
의문이 가득 담긴 윌리엄 아재의 시선을 뒤로했다.
슈슉!
익숙한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대리석 기둥과 바닥에 깔린 붉은색 융단. 그 중앙에 놓인 건 나의 왕좌, 흘리드스캴프Hlidskialf.
「지금 당장 왕좌의 홀로 모여!」
왕좌의 특수한 능력 중 하나인 확성의 기능을 활용했다.
“주군!”
“마스터!”
호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디언 사인방이 왕좌의 홀을 찾아왔다.
“전투를 준비해. 곧바로 이동한다.”
“이미 출정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주군!”
과연 전투 귀신들. 언제나 만전 상태였다.
사정 설명할 시간도 없다. 곧바로 흘리드스캴프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흘리드스캴프가 왕좌의 주인, 이연우에게 반응합니다.]
[현재 사용 가능한 능력은 ‘공간 전이’, ‘천리안千里眼’이 있습니다.]
“공간 전이.”
[어디로 이동하겠습니까?]
“영국의 맨체스터.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
[검색 중...]
굳이 바빌론으로 온 것은 흘리드스캴프의 공간 전이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기능 구동은 이미 확인한 상태다.
일전의 계룡산 이동도 이 녀석을 통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검색 완료. 영국,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으로 이동하겠습니까?]
“고!”
[공간 전이의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알림과 함께 내 육신이 공간을 뛰어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와아아!”
꿈의 경기장이라고도 불리는 올드 트래퍼드.
약 8만여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 안은 붉은 파도로 출렁이고 있었다.
홈 팀도, 그리고 원정팀도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은 노스트웨스트 더비라고 불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경기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양 팀 모두 팀을 상징하는 컬러가 붉은색. 그렇기에 레드 더비라고도 불리는 두 팀의 경기가 있을 때면 경기장은 온통 붉게 물들 수밖에 없다.
대격변과 함께 인류의 많은 문화가 바뀌었으나 축구 사랑은 여전했다.
초인이 없는, 일반인들의 순수한 스포츠 정신.
이러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대격변 이후 축구의 인기는 더욱 상승했다.
물론 축구 사랑이 더없이 뜨거운 영국이라면 그 열기를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특히 지역감정이 살벌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경기라면 열기가 뜨겁다 못해 폭발할 지경.
“병신 같은 리버풀 새끼들에게 한 방 먹여줘!”
“레드의 주인은 우리다! 맨체스터 녀석들 전부 죽어버려!”
양 팀 선수들이 입장하면서부터 열기는 더욱 가열되었다.
“...”
그러나 이 열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열정의 상징인 붉은 물결과는 전혀 다른 검은 로브를 착용한 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덕분에 성별이나 나이를 짐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선택받지 못한 가축들이여...”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그 음성은 건조하기 그지없다.
감상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양손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사락-
로브 자락이 아래로 내려가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인상적인 것은 오른쪽 팔목, 피부와는 대조되는 검은 문신이었다.
울부짖는 인간의 얼굴을 형상화한 그건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문양이었다.
인류의 적 베놈Venom.
초인은 선택받은 존재이며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가축이라 여기는 극단의 집단.
초인대란 이후 인류를 적으로 선포하며 테러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유일한 자’를 섬기는 광신도들이었다.
베놈이 있는 곳에 반드시 재앙이 닥친다.
만약 그 문양을 확인한 이가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살을 즐기시는 분이시여. 당신에게 제물을 바치노니...”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저주받을 언어는 경기장 안에 설치된 ‘제물의 덫’을 작동시키는 것.
콰앙!
수많은 관중이 밀집한 경기장 한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으악!”
“꺄아악!”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콰앙!
콰콰콰쾅!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터지고, 터지고, 또 터지고. 이곳에 모인 8만여 관중을 모두 죽일 것처럼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후두둑!
고깃조각이 된 육신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아아아...”
공포에 질린 이들이 허물어져 몸을 떨기 시작했다.
폭사해 흩날리는 파편과 호수처럼 고인 핏물.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맙소사! 이게 제발 꿈이기를...”
공포, 고통, 절망, 좌절.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터져 나오며 비극의 하모니를 이룬다.
“학살의 왕이시여. 이곳에 강림하소서!”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인신공양을 통한 소환의 의식. 수천 명에 달하는 인간의 죽음으로 소환되는 존재가 가벼울 턱이 없다.
쩌저저적!
조금 전까지 선수들이 있었던 경기장. 그곳에 지옥의 문이 열렸다.
지그재그로 갈라진 지면의 균열이 벌어지며 불길한 검붉은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이란 말인가!」
저 깊은 곳, 마치 심연에서 울리는 듯한 의지와 함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그것은 거인이었다.
우뚝 서면 경기장에 음영을 드리울 만큼 거대한 신장을 자랑하며 용을 형상화한 뿔 투구와 양손에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다.
수천 명의 인신공양을 통해 소환된 거인은 크로노스Cronus.
신화 속에서는 신으로 소개되었으나 정작 그 추악한 실체는 인육을 즐기는 사악한 존재였다.
「너희가 준비한 제물을 기꺼이 받겠노라!」
현신한 크로노스의 목적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인육과 학살. 하찮기 그지없는 인간의 비명은 그에게 아름다운 클래식과도 같았다.
후웅!
발을 떼는 순간 돌풍이 몰아쳤다.
“아, 안 돼! 제발, 제발!”
“살려, 살려주십시오. 크흐흑!”
그 거대한 발이 만들어 낸 음영 속에는 공포에 질린 한 가족이 있었다.
모처럼 큰돈을 들여 아기에게 경기를 보여주려 했건만, 막상 펼쳐진 현실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으아앙!”
부모의 두려움이 전염되어 울음을 터뜨리는 갓난아기.
아직 살 날이 창창한 아기는 다가오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그들의 동정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었다.
끈적이는 살의로 가득한 한 걸음이 기어코 그들을 짓밟을 무렵.
“더러운 발 치워 개새꺄!”
영국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한국어.
그와 함께 한 줄기 아름다운 궤적이 피어나 크로노스의 관자놀이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