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고인물은 숙련도 노가다에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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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수박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오색영롱한 구슬.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그것은 내 기억 속에 없는 전리품이었다.
기억이 다를 가능성은 없다.
공주시에 떨어진 악룡의 재앙은 각종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었다. 그도 그럴 게 던전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뛰쳐나온 몇 안 되는 특히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연합 전선을 펼친 5대 길드와의 치열했던 전투는 물론 악룡이 드롭한 전리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방영된 전리품 중에 눈앞의 오색의 구슬, 아니 보옥寶玉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 악룡과 이무기 상태에서 전리품이 달라지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보옥을 제외한 모든 전리품이 똑같다.
이무기의 사체 옆을 장식한 전리품. 녀석의 칠흑빛 비늘이 알알이 박혀 있는 그것은 착용자의 마력을 대폭 증가시켜주는 아티팩트가 틀림없었다. 임수아의 전력 상승을 위해 노렸던 바로 그것 말이다.
흠. 그런데 이게 그렇게 고민할 일인가?
기억과 다른 전리품이 나와서 놀란 건 사실이지만, 하나 더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수아 씨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보옥부터 챙긴 후 임수아에게 말했다.
“네, 네? 그럼 이게 전부...”
“어차피 저나 애들은 더 강력한 아이템이 널려있으니까요.”
“아, 그렇죠.”
내 기억을 공유하고 있던 임수아가 이내 수긍했다.
제한에 걸려서 그렇지, 레벨만 쭉쭉 올리면 이까짓 이무기 아티팩트 따위는 보물 축에도 끼지 못한다.
문제는 이것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어디까지나 레벨에 묶여 있는 나와 가디언만이 사용할 수 있으니 현실의 아티팩트는 임수아가 사용하는 게 맞다.
“그럼 사양 않고,”
마지막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고서는 지면의 아티팩트를 줍는다.
이무기가 선물(?)한 건 하나의 세트로 이루어진 복장이었다.
검은 광택으로 번들거리는 가죽 상하의와 장갑, 그리고 부츠. 사이사이 비늘로 장식된 알 수 없는 장식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아티팩트에 주인이 어딨겠마는 어딜 봐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착용해야 할 만한 종류긴 하다.
“와, 몸속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아요.”
눈을 동그랗게 뜬 임수아가 감탄한다.
그럴 것이다. 명색이 천 년의 고행을 쌓은 이무기가 준 아티팩트다. 최상위까진 아니겠지만, 모든 초인이 탐을 내는 상위의 아티팩트인 건 확실했다.
“어때요?”
퍽 마음에 든 듯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돈다.
“과연 주군이십니다. 어쩜 이렇게 어울리는 선물을 준비하셨는지. 그 혜안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오, 아가쒸. 참으로 섹시하십니다.”
“어울림. 박수.”
시커먼 사내새끼들의 평이야 뭐, 별다를 게 있을까.
“어머머! 마치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려요. 특히 여기, 장갑에 들어간 나비 장식이 우아한 듯 고풍스러운 멋이 나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리고 여기 부츠는 어떻고요. 깃털 장식은 마치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임수아와 파트로나는 평생의 절친을 만난 것처럼 복장에 관해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관심을 옮겨 손안의 보옥을 응시했다.
보통의 아티팩트는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어떠한 효과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다르다. 분명 기이한 힘이 느껴지긴 하는데 도무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보통은 관찰이나 탐색의 특성이 있는 초인에게 의뢰하겠지만, 내가 누구인가.
찌익!
인벤토리에서 꺼낸 스크롤을 찢었다.
[‘아이템 확인 스크롤(Lv 9)’을 ‘???’에 사용하겠습니까?]
[Yes / No]
혹시 몰라 레벨 9까지 확인 스크롤을 찢었다.
이거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티팩트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을 터.
망설이지 않고 ‘Yes’를 선택했다.
[관찰의 권능이 ‘???’에 스며듭니다.]
[‘천 년의 여의주(不)’가 확인되었습니다.]
“여의주?!”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릴 내고 말았다.
여의주라니. 용이 천지의 조화를 부리기 위해 사용한다는 그 여의주를 말하는 건가?
“...”
한창 토론을 나누고 있던 파트로나와 가디언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하지만 그 시선에 신경 쓸 새가 없다.
확인 스크롤을 통해 눈앞에 나타난 창. 그것은 여의주라는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 년의 여의주(不)
종류 : 둔기
등급 : Unknown
레벨 제한 : 없음
착용 효과 : 불완전하게나마 조화造化의 권능 사용 가능
설명 : 이무기가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행하며 쌓은 기운이 담겨 있는 여의주. 불행하게도 용이 되기 직전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여의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과연 예상했던 여의주가 맞긴 하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점이라면 온전한 용이 가지고 있던 그 여의주가 아니라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
그제야 과거에 없었던 여의주가 추가됐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를 격상시킬 만한 힘이 필요하다. 물론 그 조건에 부합되는 게 여의주였다.
무려 천 년간의 정기가 쌓인 여의주를 복용하여 존재의 격상을 이루고, 마침내 용이 될 수 있는 것.
하지만 우리 불쌍한 이무기는 용이 되기 직전 내게 뚜드려 맞고 여의주를 떨궈버렸다.
녀석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내게는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마스터. 손에 들고 있는 건 뭔가요?”
파트로나의 질문에 장내의 관심이 여의주로 모였다.
“여의주라는데?”
“여의주요?”
이 세계에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한 가디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설마 용이 입에 물고 있다는 그...?”
“예. 그 여의주가 맞아요.”
“와, 여의주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임수아가 신기한 듯 가까이 다가왔다.
이 순진한 아가씨야. 누군들 여의주 보는 게 처음이 아닐까.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거든?
“응?”
가까이 다가오는 임수아. 그리고 놀랄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화악!
그냥 있어도 오색의 광채를 뽐내던 여의주가 강렬한 빛을 뿜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
놀란 임수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여의주의 광채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아, 설마?
그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잠시, 잠시만요.”
놀라서 섣불리 다가오지 않는 임수아를 향해 오히려 내가 다가갔다.
와나. 이건 뭐 미러볼인 줄 알았다.
임수아에게 다가갈수록 오색의 여의주가 내뿜는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이 새끼. 아무래도 주인을 가리고 있는 것 같다.
녀석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시커먼 사내 새끼는 싫어요.
예쁜 여자가 좋아요.
오냐. 예쁜 여자에게 가라, 이 새끼야.
“아무래도 이 새끼...아니. 여의주가 수아 씨를 주인으로 선택한 것 같네요.”
“그, 그게 의지도 가지고 있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아무리 봐도 흘러가는 상황이 그렇게 보이네요.”
대번에 여의주를 내밀었다.
여의주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권능이라도 있을 줄 알고 슬쩍했는데, 주인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임수아를 위해 준비한 던전. 그리고 여의주 또한 그녀를 선택한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아티팩트 때와는 달리 조금 망설인다.
“받아요.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도 아무 쓸모 없을 것 같으니까.”
여의주가 임수아를 원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여의如意와 조화造化.
아무리 생각해도 여의주가 지닌 권능은 임수아의 구현화 능력과 연관이 있다.
이건 짐작이긴 하지만, 여의주를 가진 임수아는 마치 이무기가 그러하듯 진정한 용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죄송하게도...”
머리를 긁적인 그녀가 여의주를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악!
보다 선명해진 오색의 광채, 아니 칠색의 광채가 장내를 뒤덮었다.
씨부럴. 역시 여의주 새끼는 내가 아니라 임수아를 원하고 있었던 거다.
“아아!”
여의주를 손에 쥔 임수아가 황홀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잠시 후, 칠색의 광채가 사라졌고, 몽롱한 눈을 한 임수아를 볼 수 있었다.
“어때요. 쓸만합디까?”
툭 던진 내 물음에 그녀의 상념이 깨졌다.
“보여드릴까요?”
조금 전과는 달리 자신이 넘치는 모습.
오호라. 왠지 내 숙련도 제조기 능력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그 능력의 차이 때문에 당분간은 활용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건만,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다.
“확인도 해볼 겸 아주 센 놈으로다가 구현해 보세요.”
“전과 같이 오만의 군주로 할까요?”
한동안 나와 가디언의 좋은 노가다 제물이 되어주었던 오만의 군주. 그 대단한 격으로 인한 보너스 때문에 한동안 숙련도 노가다에 매진할 수 있었지만, 숙련도가 오르면 오를수록 떨어지는 기본 숙련도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녀석이기도 하다.
“아뇨. 이번에는 적룡왕으로 하죠.”
“적룡왕이라면 아오스에 등장했던 플람메우스를 말하는 거죠?”
“예. 그놈이요.”
여의주로 인해 얼마나 능력이 상승했는지 가늠할 수 없다.
혹 재수 없으면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용살자의 피와 마룡의 독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적룡왕을 구현하길 권했다.
“잠시만요.”
스으으-
임수아의 몸에서부터 익숙한 핑크빛 기류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익숙한 광경. 하지만 여기에 더해 그녀가 손에 쥔 여의주에서부터 강렬한 칠색 광채가 더해졌다.
기류와 칠핵 광채가 하모니를 이루며 특별한 형상을 만들었다.
「캬아아!」
“워, 씨발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뭉쳐진 기류에서 나타난 건 조금 전 이무기를 동네 새끼 뱀으로 만드는 거대한 존재였다.
용암을 연상케 하는 붉은 광택의 비늘, 활짝 펴진 날개는 주변을 모두 가릴 정도로 거대했으며 아가리에서는 혓바닥과 같은 불꽃이 넘실댄다.
게임의 최종 보스로나 나타날 법한 에인션트 드래곤Ancient Dragon. 아오스 시절 내게 공략당했던 붉은 도마뱀이 임수아의 구현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플람메우스...”
“이거 흥미진진하잖아!”
플람메우스의 인형을 본 가디언들이 눈을 빛냈다.
녀석들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고작해야 인형에 불과하나 아티팩트, 그리고 여의주의 보조를 받아 탄생한 녀석의 힘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마치 전기가 통하듯 찌릿찌릿한 감각이 녀석에게서 느껴진다.
킁킁. 녀석에게서 진한 숙련도 대박의 냄새가 풍겨온다.
“흡!”
적어도 용족에 관해서는 만전. 그렇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창을 뻗을 수 있었다.
[허상에 불과하나 위대한 격을 지닌 인형을 공격했습니다.]
[절정급 창법(Lv 3)의 숙련도가 0.5% 상승합니다.]
[신룡의 땅을 지배하는 군주, 적룡왕 플람메우스의 허상을 공격해 엄청난 숙련도 보너스를 얻었습니다.]
[모든 숙련도가 700% 상승합니다.]
한 방에 3.5%!
역시, 이 새끼는 대박인 게 확실하다.
*
「캬으으...」
쿠웅!
사방이 불꽃으로 가득한 폐허. 그곳에 붉은 도마뱀 녀석의 거대한 덩치가 허물어졌다.
[허상에 불과하나 위대한 격을 지닌 인형을 처치했습니다.]
[절정급 창법 Lv 5가 절정급 창법 Lv 6으로 상승합니다.]
[절정급 고도의 집중 Lv 4가 절정급 고도의 집중 Lv 5로 상승합니다.]
[절정급 예지 Lv 3이 절정급 예지 Lv 4로 상승합니다.]
...
미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2~3레벨에 불과하던 각종 숙련도가 정말 미친 듯한 속도로 올랐다.
“우오오!”
“힘이 넘쳐 흐른다!”
가디언들도 상승한 숙련도를 느끼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렇게만 가면 진경眞境에 도달하는 건 문제도 아니겠는데?”
절정의 윗 단계인 진경.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그 경지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원탁의 기사들이여, 원탁회의를 소집하겠다. 거듭말하는 데 긴급사항이다. 단 한 명도 불응하지 말고 모일 수 있도록.」
상승한 숙련도에 기뻐하던 중 뇌리에 전해지는 의지가 있었다.
윌리엄 아재다.
원탁의 기사, 그들의 힘을 계승 받은 이들의 정신과 감응해 어디에 있든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
몇 번 그 의지에 불응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원탁회의다. 인류를 위협하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소집하는 공식적인 자리. 특히 참석 불응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있는 것을 봐선 아주 중요한 사건이 터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