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고인물은 쓰레기도 잘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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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과 던전, 그리고 탑.
대격변은 단어가 가진 뜻 그대로 세계의 질서를 뒤바꿔 놓을 만큼의 충격을 인류에 전해줬다.
무수히 많은 변화 가운데서도 특히 기존의 질서를 파괴한 건 초인이라는 특별한 존재의 등장이었다.
만화나 영화, 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강력한 권능을 사용하는 인간. 이들의 등장 초기 세계는 공포에 휩싸여야만 했다.
초인이 지닌 힘은 단순히 이계의 적을 상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백, 수천의 인간을 사살할 수도 있는 위험한 힘이었다.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과연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가진바 힘을 악용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
초인대란超人大亂.
대격변 이후 발생한 초인들 간의 가장 끔찍한 전쟁.
통제되지 못한 초인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부딪쳤고, 그것이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당시가 초인의 힘에 대한 운용이 서투른 시기였다 해도 역사상 가장 많은 초인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무려 3,000만 명에 달하는 초인들이 활동했던 만큼 그들의 충돌로 인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힘으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초인이 희생되었다.
그 많은 초인이 싸워대는데 일반인들이라고 해서 멀쩡할까.
인명 피해는 물론 건물, 나아가 일부 국가는 멸망을 맞이하기도 했다.
인류 최대, 최악의 전쟁에 승자는 없었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뒤늦게야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지도자들에 의해 전쟁은 종식을 고했다.
끔찍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인류의 축복이자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초인, 그 힘을 통제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 일에 앞장선 것이 당시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던 초인, 소위 말하는 ‘선구자’들이었다.
초인대란과 같이 끔찍한 전쟁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초인들을 관리할 강력한 기관이 필요하다. 같은 뜻을 품은 그들은 초인들의 힘을 억제할 기관인 초인 협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최초 건립된 미국을 시작으로 러시아, 중국의 초인 강대국으로 뻗어간 초인 협회는 마침내 초인이 존재하는 전 세계에 지부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쉽게 부러지는 브레이크를 가진 초인들을 통제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초인의 등록과 질서 유지, 그리고 질서를 벗어난 이들에 대한 처벌까지.
물론 힘 위에 서려면 더욱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초인 협회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선구자부터 이어져 오는 ‘전승의 힘’을 지닌 괴물들. 능히 랭커들의 순위를 뒤바꿀 만한 능력을 지닌 괴물들이 항시 초인 협회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뿐만 아니라 엄선된 인재들의 도움으로 초인 협회는 초인들의 유일한 통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
정식 초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시청각 교육. 오늘도 어김없이 미래의 랭커를 꿈꾸는 십수 명의 초인 후보생들이 교육실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신성한 교육 시간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가관이다.
“하암...”
지루한지 교육 시간 내내 하품을 쩍쩍해대는 이.
“드르렁, 푸우!”
하품 정도는 양반이다.
몰려오는 수마를 극복하지 못해 휘모리장단으로 고개를 흔드는 이.
띠리리, 뿅뿅!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대놓고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말한다. 이들, 초인 협회가 있기에 인류는 평화로울 수 있다고...」
“평화는 무슨. 엿이나 잡수세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욕설에 장내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근원지는 영상이 출력되고 있는 스크린 옆, 현재 시청각 교육을 관리하는 사내 김영빈이었다.
충혈된 눈, 관리하지 않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얼굴을 덮고 있다.
하필이면 동네 백수들이 즐겨 입는 파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새여서 무시해도 괜찮을 것만 같은 모양새.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를 무시할 만한 정신 나간 이는 없었다.
지금은 이래도 협회 소속이 아닌 과거, 초인 시절 그의 이력은 화려했다. 랭킹 998위. 현역시절 투지 넘치는 그 활약으로 인해 투사鬪士라는 이명을 부여받은 하이 랭커가 바로 그였다.
“아아, 그냥 헛소리니까 다시 교육에 집중하세요.”
자신에게 쏠린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영상으로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순간의 관심이었을 뿐이다.
초인 후보생들은 의무 시간을 채우기 위해 다시금 영상에 집중, 아니 잠과 개인 활동에 빠져들었다.
‘평화? 지랄하고 자빠졌네. 협회야말로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해충이지.’
물론 조금 전 말은 헛소리가 아니다.
명색이 대한민국 초인 협회의 직원, 지부장만을 위로 둔 임직원인 영빈은 협회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초인 협회가 가지는 기능 자체에 대해 의심하는 건 아니다.
초인을 통제하기 위한 기관은 필요하다. 다만 현재의 초인 협회는 유명무실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초인 협회는 설립 당시의 사명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상실한 게 사명감뿐일까. 오히려 초인을 통제하는 유일한 수단이란 무기를 오용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결탁해 상대 세력의 정적을 제거해준다거나.
처벌해야 할 대상이 명백한데도 뇌물을 받고 모른 척 한다거나.
마땅히 지급해야 할 포상금을 미룬다거나 혹은 지급될 금액보다 적게 준다거나.
‘아무리 그렇다고 그 포상금을 꿀꺽하려고 하냐!’
영빈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임직원인 그가 평직원들이나 담당하는 시청각 교육을 관리하는 건 조금 전의 격렬했던 토론 때문이었다.
전 세계 최초로 발생한 블랙 포탈 사태. 화랑을 뒤덮은 차원의 균열에 대한 포상금 관련 문제로 지부장인 전두만과 싸우다시피 했다.
논쟁거리는 단순했다.
정식 초인으로 등록하지 않은 ‘그들’에 대한 포상금을 지급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지부장인 두만은 절차상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지급할 수 없다. 하지만 영빈은 이에 대해 반대를 표했다.
‘미친 새끼들. 어쩌면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킬 수도 있는 끔찍한 사태를 막았는데, 뭐? 절차상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지랄을 해라, 지랄을 해. 그게 말이나 되냐!’
물론 정식 초인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포상금을 받은 전례는 없었다. 초인이 아닌 이상에야 이계의 존재를 상대할 수 없으니 전례가 없을 수밖에.
그렇기에 이번 경우는 다르게 해석해야만 했다.
정식 초인으로 등록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아니 그들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초유의 사태를 무사히 막아냈다.
뇌라는 게 있다면 정식 초인이 아니어도 이에 대한 포상금을 지급하는 게 상식적인 일이었다.
‘상식은 무슨. 자기 잇속 챙기기 바쁜 돼지 새끼들이 그걸 신경 쓸 턱이 없지.’
대다수 초인 협회가 그렇겠지만, 특히 대한민국 지부는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된 지 오래였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미국에 위치한 본부나 러시아, 중국 지부는 처음의 사명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뻗어 나간 지부였다.
워낙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어 있다 보니 모든 곳에 본부의 영향이 미치기 어려웠던 것.
본부 또한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나라별로 거의 독립되어 있다시피 한 지부에 권한을 행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지부가 썩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곳이 대한민국 초인 협회였다.
썩다 못해 구더기마저 득실거리는 부패의 최고봉,
‘모든 게 전돼지. 그 씹새끼 덕분이지.’
전두만. 아니 영빈에게는 전돼지라 불리는 협회의 지부장이 그 원인이었다.
이미 이곳, 대한민국 초인 협회는 초인을 관리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쓰는 고유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사실상 전두만과 그 휘하에 있는 이들의 왕국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정부, 길드, 그리고 다른 나라의 불법 세력과 결탁해 자신의 배를 채우기 급급한 돼지들의 왕국.
‘진짜 이놈의 오지랖만 아니면 진즉 관뒀을 텐데...’
영빈은 매번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왜 이 돼지들의 소굴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처음 협회에 소속되었을 때 가졌던 사명감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마저 협회에서 나가버리면 대한민국 초인 협회는 그야말로 돼지들의 세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겠냐만은 적어도 적절할 때에 브레이크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찾아오고 있다.
본래 협회 내 팽팽하던 전두만과 영빈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버렸다.
정치질에 능한 전두만이 사전 물밑 작업을 통해 영빈의 세력을 천천히 갉아먹었던 것.
이제는 견제할 힘도 없다. 그렇기에 고작 토론 좀 벌였다고 좌천되어 이곳에서 평직원이 해야 할 교육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대로 가면 정말 끝이다. 망할 전돼지 녀석에게 시원하게 한 방 갈겨줄 또라이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 비열한 성격답지 않게 전두만은 현역 시절 영빈마저도 압도할 정도의 재능과 실력을 보유했던 초인이었다.
아무리 동방의 작은 나라라곤 하지만, 한 나라의 초인 협회 지부장이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관리라도 소홀히 했으면 모를까, 예전만 못한 영빈과는 달리 전두만은 아직도 현역 시절의 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돈을 쳐발라 각종 아티팩트로 무장했으니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을 게 틀림없었다.
어디 그뿐일까.
이익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그의 꼬임에 넘어간 하이 랭커들도 다수인 데다가 그와 연이 닿은 5대 길드, 그리고 각 나라의 세력까지. 그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언터처블Untouchable의 영역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접자. 나도 더는 못 해 먹겠다. 사명감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이제 그만 놓자.’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사명감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다.
꾸깃.
항상 품속에 넣어두고 있었지만, 꺼낼 수 없었던 사직서를 손에 쥔다.
결심을 마친 영빈이 교육실을 나왔다.
똑바로, 똑바로. 그의 걸음은 3층 끝에 자리한 지부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음?”
이대로 직행하는가 싶던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강력한 기의 파동!’
영빈과 같은 고수는 항상 일정 반경 내에 기감氣感을 펼쳐둔다. 예민한 그 기감에 포착된 것은 어마어마한 기의 파동이었다.
마치 일부러 보라는 듯 노골적으로 퍼져 나가는 그 흐름은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던 영빈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뭐, 뭐야?!”
마침 그와 같이 기의 파동을 감지한 전두만이 당황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평소라면 짧은 눈싸움이라도 펼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다.
휘익!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건물 밖으로, 기의 파동이 감지되는 근원지를 향해 뛰어갔다.
두 사람 모두 하이 랭커에 이른 강자들이었다.
순식간에 건물을 나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소란의 중심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 맙소사!”
두 사람의 눈동자를 채운 감정은 경악이었다.
펄럭펄럭!
중심지에서 약 10m 위 상공. 그곳에 거대한 뼈의 날개를 펄럭이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주종의 계약과 함께 검은 기류를 벗어난, 본래의 위용을 되찾은 본 드래곤 메투스였다.
당장에라도 레이저를 발사할 듯한 선명한 녹광이 두만과 영빈을 쏘아본다.
「캬아아악!」
장내를 떨어울리는 포효. 그건 단순한 포효가 아니었다.
“으으...”
하이 랭커인 두 사람에게도 공포라는 감정을 새겨주는 피어Fear. 일부 특별한 존재만이 발현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펄럭!
한 번의 위협으로 장내를 지배한 메투스가 활강한다.
놀라운 속도로 지면에 착륙한 녀석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저벅.
메투스의 등 뒤에 탑승해 있던 무리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순간 장내가 술렁인다.
지금 가장 이슈가 되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연우!”
“검왕이 인정한 남자!”
“랭킹을 뒤바꿀 이레귤러!”
“무신의 차기 대권을 이을 남자!”
“이미 차기 십왕으로 내정된 세기의 천재!”
“하이 랭커를 쓰러뜨린 이!”
“노력으로 재능이라는 벽을 뛰어넘은 자!”
“블랙 포탈을 단신으로 막아낸 괴물!”
그간의 활약상이 포함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감히 그 길을 막아서는이 없다. 홍해가 갈라지듯 나타난 인파의 길 사이로 걸음을 옮기던 이연우와 그 일행이 두만과 영빈의 앞에 멈춰 섰다.
“전두만, 이 돼지새끼야. 떼인 돈 받으러 왔다!”
지금껏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전두만을 향한 도발.
‘오셨다!’
그리고 영빈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세주, 아니 또라이가 지금 막 등장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정면. 그곳에 내 돈을 떼어 간 녀석이 보인다.
얼핏 보기엔 매너 있어 보이는 중년의 신사와 같지만, 그 속내는 시커멓기 그지없는 놈.
전두만.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다.
대한민국 초인 협회의 지부장이자 현역 시절 랭킹 700위까지 찍었던 하이 랭커. 지금까지 계속 초인 활동을 이어갔다면 대한민국 최초로 랭킹 500위 안에 진입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 강자였다.
흠. 있었을지 모르는 게 아니라 돈을 쳐바른 지금 실력이라면 충분히 랭킹 500위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몇몇을 제외한 대한민국 제일의 랭커.
이런 이력만 본다면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녀석의 본질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과거 녀석이 저질렀던 비리가 포착되어 초인 협회 본부 차원에서 징계가 이루어졌다.
협박, 살인, 심지어 간음까지.
그 악랄한 죄질로 인해 녀석은 초인들만 수용되는 그리스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로 보내졌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무기징역수로 영원히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면서 초인에 대한 특별 사면이 이뤄졌고, 녀석 또한 사면에 포함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이는 명백한 판단 착오로 드러났다.
종말의 날을 상징하는 징조 중 하나. ‘종말의 네 기사’가 화이트 포탈에서 나타났고, 이 중 전쟁의 기사가 지닌 광기에 침식된 전두만을 비롯한 범죄자들이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맹공. 그들로 인해 인류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으득!
과거의 기억만 해도 충분히 죽일 이유가 넘치는 녀석인데, 이제는 내 돈까지 떼어갔다.
장담하는 데 이 새끼는 살아 있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새끼다.
“떼인 돈이라니. 대체 누가?”
메투스를 보고 당황하던 녀석은 금방 평온을 되찾았다.
과연 대한민국 초인 협회의 지부장님이 아니신가. 저렇게 금방 평정을 되찾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이곳에 돼지처럼 탐욕스러운 새끼가 너 말고 더 있겠냐?”
이렇게 흥분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말하다 보니까 더 열이 뻗친다. 이 개새끼랑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눴다간 손이 먼저 나갈지도 모르겠다.
“말이 심하군. 이연우 군이라고 했던가? 도대체 그런 좋지 않은 말 버릇은 누구에게 배운 거지?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나?”
와, 이 새끼.
분명 내가 고아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발하고 있는 거다.
블랙 포탈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막아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발한다? 보나마나 믿는 구석이 있겠지. 그리고 녀석이 믿는 구석이라는 것도 빤하다.
두두두!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뒤로 나열하는 무리.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하이 랭커. 하지만 지금은 초인 협회에 소속되어 녀석의 손발이 된, 마찬가지로 개새끼들이다.
과거, 마찬가지로 전쟁의 기사의 권능에 침식되어 인류를 배반한 쓰레기들.
거의 백 명에 이르는 그들의 전력은 5대 길드 중 한 곳과 싸운다 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전두만, 이 개새끼가 힘을 믿고 마음껏 설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좋게 말할 때 포상금 가져와. 행정상 절차가 어쩌고저쩌고 이야기 할 거면 진짜 뒈지는 수가 있다.”
“하하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낭랑한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무모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도록 하지. 아, 그리고 블랙 포탈의 포상금에 관련한 일이라면 애석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정식 초인이 아니라면 포탈에서 발생하는 포상금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게 협회의 방침이야. 조금 서운하더라도 자네가 이해해야만 해. 방침이란 건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거니까.”
유들유들 웃고 있지만, 어딜 봐도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
녀석은 지금 매우 빡쳐 있다. 고작해야 애송이인 내게 모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웃으면서 받아넘기고 있지만, 그 속이 어떨지는 빤하다.
당장에라도 날 찢어 죽이고 싶겠지.
그런데 녀석은 알까?
나 또한 당장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간신히 살의를 다스렸다.
녀석의 면상을 보고 있으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갈 것 같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역시 아직 있구나.
내가 주목한 대상은 저 멀리, 줄곧 팔짱을 낀 채로 관전 중인 사내 김영빈이었다.
비리로 인해 무너지는 대한민국 초인 협회를 다시 일으킨 입지적인 인물.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협회를 지키던 그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본래의 기억대로라면 두만이 새끼로 인해 협회를 나갔어야 하지만, 아무래도 때를 잘 고른 것 같다.
종말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 초인 협회는 김영빈과 같은 사람이 맡아줘야만 한다.
“그래? 그럼 협상 결렬이네. 마땅히 받아야 할 포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하긴, 네 녀석이 저지른 일이 이것 뿐이겠냐."
"어디서 헛소릴..."
"대가성 청부 살인, 납치, 협박, 고문, 심지어 간음한 일반 여성을 유기까지 했더군."
"무, 무슨!"
당황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어낸 사실이 아니다. 과거 녀석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나왔던 내용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무리 자리가 사람들 만든다고 하지만, 너 새끼는 너무 나갔어."
“건방진!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지 마라!"
녀석 또한 폭발하고 말았다.
그 더러운 성질이었으면 진즉 폭발했어야 하는데, 이만큼 참은 것도 용하다.
“주군, 제가 선봉에...”
“아니. 됐어.”
심상치 않은 기세를 읽은 아만이 앞으로 나오려 했지만, 이를 제지했다.
어쩐지 오늘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다.
불같이 끓어오르는, 이 더러운 마음을 씻어내지 않으면 홧병으로 먼저 죽을 것 같으니까.
“이건 알아둬라.”
당장에라도 달여올 것처럼 기세를 끓어 올리는 녀석들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너희는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이놈!”
성난 분노를 표출한 녀석들이 움직인다.
키잉!
고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가며 전방을 주시했다.
어긋난 시간 속에서 발악하는 녀석들의 아우성이 보이는 듯하다.
꽈악!
새로운 창이 완성되지 못해 여전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건 신창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고작해야 1레벨에 불과한, 믿을 건 숙련도밖에 없는 내가 아니란 말이다.
이 손에 쥐어져 있는 게 설사 평범한 목창이라 해도 녀석들은 나를 막을 수 없다.
쾅!
진각을 밟자 바닥에 거미줄 무늬의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 반발력을 이용해 양손에 쥔 창, 신창을 힘차게 내뻗는다.
쉬이익!
앞으로 뻗어나가는 창이 더없이 선명하고 느리게 지나간다.
「찌르기. 그 극쾌에 도달하게 되면 다음은 회廻의 묘리를 실어야만 한다. 물론 절정에 이른 찌르기만으로도 웬만한 적은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좆같은 세상이란 게 또 그저 그런 녀석들만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 회의 묘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 네 녀석의 창은 진정한 파괴의 힘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단순히 찌르지만 않는다.
휘리릭!
뻗어나가는 창을 보며 손목을 돌린다.
그럼으로 인해 단순한 찌르기에 회의 묘리가 실리게 된다.
쿠콰콰콰콰콰!
내 창에서 비롯된 대기의 흐름. 그것은 마치 용권풍과도 같은 이상현상을 일으켰다.
근력과 민첩이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해야만 발현할 수 있는 창신의 비기 나선창螺旋槍.
“이건?!”
“미, 미쳤어!”
그 사나운 기세를 읽는다 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압도적인 속력과 파괴적인 힘 앞에서 쓰레기들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으니까.
쿠콰콰콰!
사나운 대기의 흐름, 그 안에 깃든 기의 폭풍이 녀석들을 휩쓸었다.
"아아악!"
울려 퍼지는 비명을 끝으로 기의 폭풍이 소멸했다.
사라진 그 자리, 전두만을 비롯한 똘마니 모두가 쓰러져 꿈틀대고 있다.
사나운 기의 폭풍이 노출되었다. 생명까진 잃지 않겠지만, 초인으로서의 활동은 끝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입신의 창법, 그 비기가 재현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절정급 창법 Lv 1이 절정급 창법 Lv 2로 격상되었습니다.]
[‘비기 : 나선창螺旋槍(★★★★★)’을 획득했습니다.]
저벅저벅.
귓가에 파고드는 알림을 들으며 묵묵히 걸어갔다.
수많은 초인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저들의 추악한 비리가 곧 세상에 밝혀질 테니 말이다.
“어, 어어?”
놀란 토끼와 같이 두 눈을 부릅뜬 김영빈이 눈앞에 있다.
“축하합니다.”
“네? 뭐, 뭘 축하를...”
갑작스러운 축하 인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그를 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지부장이 기능을 잃었으니 새로운 지부장이 된 것 아닌가요?”
“아!”
그제야 무언갈 떠올린 듯 감탄사를 내뱉는다.
전두만과 휘하의 부하들을 모두 제거했으니 이제 그가 새로운 지부장이다.
“그리고 포상금은 전 쓰레기 지부장과 달리 잘 해결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물론 당연히 내 돈이 되어야 할 포상금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