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고인물은 오는 기연은 마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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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인생 이렇게 덧없을 줄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으면 연애도 해보고, 자식도 볼걸. 후우. 그래도 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갈 줄은 몰랐네."
한탄하며 자꾸 머리를 서민석 쪽으로 들이민다.
아무리 봐도 저건 취객 그 이상이 아니다.
“그, 그게 아니고...”
어딜 봐도 무례한 그 행동에도 서민석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물러나기 바쁘다.
당황한 게 녀석뿐일까.
“어, 어흠!”
“크흐흠!”
낄낄. 우리 대단하신 5대 길드의 수장들 표정을 봐라.
아니, 형이 거기서 왜 나와? 한때 유행했던 그 말이 절로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도 조아리게 할 수 있는 양반들이다.
당연히 대한민국 내에서는 자신들이 곧 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게 참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발상이란 말이지.
대한민국을 벗어나는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특히 그 상대가 십왕 중 검왕의 위를 차지한 윌리엄 아재라면 말 다 했지.
“조금 전에는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왜, 이제는 자신이 없어졌나?”
장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고오오-
마치 대기가 윌리엄 아재 주변에만 몰아치는 것처럼 기이한 흐름을 보였다.
콰콰콰콰!
그건 폭풍 전 고요였다. 별안간 대기의 흐름이 사나워졌다.
흔히 십왕을 논외의 존재라 부른다. 그것은 이들이 자연재해와도 걸맞은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 있으면 나와라. 그 도전, 기꺼이 받아줄 테니.”
파직, 파즈즈!
소용돌이치는 대기의 흐름 속에서 황금색 스파크가 튄다.
와, 이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건 윌리엄 아재가 지닌 고유의 초인력이 발휘될 때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이었다. 그 기세가 허리케인과 같다고 해서 일부 지역에서는 검왕을 폭풍의 신으로 부른다고도 들었다.
정말 화가 났을 때, 혹은 적을 눈앞에 두었을 때야 비로소 일어나는 그 현상에 우리의 수장님들은 어떻게 대처하려나.
“기, 기세를 거두어주시오.”
“오, 오해였소. 오해. 설마 애송이 녀석과 통화를 하는 게 당신일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요.”
조금 전 거만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키야. 랭킹에 취한다. 저게 바로 초인 랭킹 8위, 검왕의 위상이라는 거다.
아무리 우리의 위대하신 수장들께서 랭킹 500위 언저리에서 놀고 있다고 하지만, 윌리엄 아재와 비교하는 건 반딧불과 태양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단적인 예를 들어볼까?
랭킹 500위 대의 다섯 명과 랭킹 100위가 생사의 결투를 펼친다고 생각해 보자.
랭킹의 구조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 대다수가 랭킹 500대 다섯 명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멋모르고 하는 소리다.
랭킹 100위부터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초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계, 왕계, 기사계, 그리고 인간계가 있는데, 이 중 신계는 랭킹 1위인 무신에게만 허락된 것이며, 왕계는 십왕, 그리고 기사계는 랭킹 100위 안에 포함된 89명을 뜻한다.
100위 밖을 인간계 하나로 뭉뚱그린 것은 그만큼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한 우리의 다섯 수장님께서 검왕에게 개긴다? 그건 나 죽여 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하하!”
허리케인, 그 가공할 만한 기세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내가 검왕이다.
덤비는 새끼는 모조리 동강 내 버릴 거야.
그러한 의지를 보여주었던 검왕은 사라지고, 대신 유쾌한 동네 아저씨와 같은 윌리엄 아재가 웃음 짓고 있었다.
“놀랐습니까? 이게 바로 신사의 나라 영국식 농담입니다. 하하하하.”
저거 100% 거짓말이다.
나를 비롯한 장내의 모두가 안다. 조금 전 기세는 그냥 농으로 발산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조금만 더 열 받은 상태였다면 이 자리에 있는 다섯 수장의 목은 달아났을 것이다.
외교 문제?
그딴 걸 걱정할 레벨이 아니다.
십왕의 위라는 건 사소한(?) 외교 문제도 무시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자리였으니까.
“그, 그렇군요.”
“하, 하하하. 영국식 농담은 참으로 살벌하군요.”
“어이쿠. 정말 목이 달아나는 줄 알았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꼬리 내린 강아지마냥 호응한다.
해야지. 이건 부장님의 농담을 받는 정도와는 다르다. 죽기 싫으면 호응해줘야만 하는, 아주 살벌한 농담이었다.
“자, 그럼 이 깜찍한 이벤트를 선물해준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다섯 수장을 한 차례 훑은 그 시선이 내게 향했다.
윌리엄 아재가 내게 볼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너희가 볼일이 있는 건 다 알지만, 그렇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당장 꺼지라는 말이다.
“어흠. 그럼 저희는 이만...”
“바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커흠, 커흐흠!”
그래도 눈치는 꽤 빠른 지 다섯 수장님께서 빠르게 퇴장한다.
보통 영화나 소설을 보면 후에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 그런 의지라도 보이곤 하는데, 이건 뭐 아무런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검왕의 비호를 받는 이상 섣불리, 아니 절대로 건드릴 수 없다고 빠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에 대한 굴욕이나 좌절? 그딴 게 있을 턱이 있나.
반딧불이 태양을 보고 자신의 빛이 밝지 않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격한 차이는 ‘포기’라는 단어를 생산할 뿐이다.
“청년. 아니, 이연우.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지?”
은근슬쩍 어깨에 손을 올리는 그 모양새는 어렸을 적 으슥한 골목에서 자주 접해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거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고양이를 물리치려다가 호랑이를 끌어들인 것만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이 단순한 내 착각이길 간절히 바라본다.
*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망나니 같은 녀석 하나를 손봐주고, 널 죽이려는 하이 랭커 하나도 덤으로 죽였다? 그것도 너와 네 동료의 힘만으로?”
조금 전 상황을 전해 들은 윌리엄 아재가 새삼 신기한 놈 다 보겠다는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뭐, 요약하자면 그렇게 되겠죠. 거기에 몇 가지를 더하자면 어떻게든 나를 이용하려는 5대 길드의 수장들이 찾아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고, 그 위기를 넘기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 이 말이지?”
“어흠. 뭐, 이용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목숨이 위태위태한 여린 학생 하나를 구해줬다고 생각하시면 좋지 않을까요?”
“말도 안 돼!”
윌리엄 아재가 대답도 하기 전에 끼어든 건 보랏빛 로브의 마법사였다.
“아, 여긴 멀린. 본래 이름은 헨리 올리버인데 본명 말고 자꾸 멀린이라고 불러달래서 그렇게 부르는 중...”
“윌리엄!”
본명을 언급하는 게 싫었던지 버럭 소리친다.
마법사. 그는 동그란 안경을 쓴 중년인이었다.
일부러 길러놓은 듯한 콧수염이 둥글게 말린, 한눈에 봐도 조금 또라이와 같은 그는 내게도 익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헨리 올리버. 초인 세계에서는 멀린으로 통하는 대마법사.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그 능력은 여러 마법 특성 중에서도 탑.
초인 랭킹 97위, 시공간의 마법사 멀린. 윌리엄의 단짝이라고 불리는 소울 메이트였다.
“아, 그래. 본명 이야긴 됐고. 그래서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건데?”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고. 이제 갓 18살 정도 된 애송이...아, 이건 실례. 어쨌든 아직 여물지 못한 이 청년이 하이 랭커를 쓰러뜨렸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말이 안 돼. 나도 20살 쯤에 레드 포탈도 단신으로 막아냈는데.”
“아니 그건 윌리엄, 너 같은 괴물이니까 가능한 거고.”
“얘도 괴물이야. 내가 예전에 언급했었잖아.”
“괴물은 무슨. 아무리 봐도 그리 대단한 능력은 있어 보이지...아, 이것도 실례. 그리 대단한 재능이 있어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멀린에게는 대상의 재능을 파악하는 특수한 특성이 있나 보다.
뭐, 워낙 다양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니 개인의 특성 탐지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크흑. 가슴이 쓰리다.
교장 할배 때도 템빨 특성에 F 클래스를 받질 않나, 이번에는 대놓고 재능없는 놈이라는 소릴 듣네.
아마 이 자리에 가디언 녀석들이 있었다면 더욱 비교질을 당했겠지.
녀석들을 미리 바빌론에 돌려 보내놓은 건 신의 한 수였다.
이왕 게임 능력을 전해 줄 거면 캐릭터 능력을 그대로 전해주던가. 왜 맨날 사람 서럽게 이런 취급을 받게 하고 그럴까.
만약 신이, 초월자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너어는 정말 나아쁜 놈이다.
“어허! 내가 말했지. 보이는 재능이 다가 아니라고. 물론 타고 난, 선천적인 재능은 조금 부족할 수 있겠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해.”
“얼씨구? 괴물 중에서도 괴물 같은 네 녀석이 그런 말을 하니까 정말 안 어울린다. 너는 양심이라는 게 있냐?”
하긴. 윌리엄과 멀린, 이 두 사람의 재능은 사기 중에서도 사기다. 물론 그것이 온전한 그들만의 재능이 아니라는 비밀을 나는 알고 있지만 말이다.
“연우 학생의 말은 사실일세.”
보다 못한 교장 할배가 끼어들었다.
“내 명예와 모든 것을 걸고 결투의 공증인으로 참여했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데에 내 목숨을 걸어도 좋아.”
“으음...”
교장 할배가 목숨까지 걸었으니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리라.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공석空席에 어울릴 만한 인재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어. 아무리 윌리엄, 자네가 추천을 했다 해도.”
“물론이지. 내가 건의를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차차 생각해 보자는 거였고. 어차피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쪽으로 몸을 의탁할 것 같으니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겠지.”
보통은 둘의 대화를 뚱딴지 같은 소리라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왜 멀린이 이토록 내 역량 평가에 열을 올리는지. 그것은 지금의 대화와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윌리엄과 멀린, 그리고 원탁圓卓의 후예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재를 찾고 있었다.
스톤 헨지의 비밀이 밝혀진 지 수십 년.
그 동안 적당한 인재를 찾지 못해 공석이었던 원탁의 한 자리. 그 주인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애써야만 했다.
하지만 과거, 그들은 종말의 날이 올 때까지 그 주인을 찾지 못했다.
검왕과 원탁의 후예 모두가 장렬히 사망했던 버킹엄 전투. 그 전투가 일어나기 하루 전, 윌리엄 아재는 한탄했었다.
「공석으로 남은 원탁의 한 자리가 애석하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재만 있었다면 이리 허망하게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검왕인 그가 패배를 직감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 이후 윌리엄 아재와 세간에 화제를 몰고왔던 원탁의 후예들에 관한 비밀이 세상에 밝혀졌다.
크흐흐. 사실 윌리엄 아재와의 인연을 만든 건 숙련도 노가다를 위한다는 명목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내 생각대로 윌리엄 아재는 나를 안중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지금이 나를 어필할 결정적인 기회였다.
“아뇨. 잘못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바로 여러분들이 찾던 그 인재가 맞습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뻔뻔. 얼굴에 철판 깔고 달라고 떼를 쓰면 웬만하면 넘어오게 되어 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도 모르는...”
“아뇨. 다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
이번에는 윌리엄 아재도 흥미롭다는 듯 반응한다.
“물론이죠. 수십 년간 공석이었던 원탁의 마지막 십이좌十二座.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최후의 시련, 갤러해드의 창을 제가 획득해 보이겠습니다.”
“뭐, 뭣?!”
"맙소사..."
낄낄. 놀라는 두 사람의 반응이 아주 즐겁다.
윌리엄의 인연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바로 고인물의 설계다.
일단 기연은 먹고 봐야지.
과거 누구도 차지하지 못했던 갤러해드의 업은 이제 제가 차지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