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고인물은 노오력도 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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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우다!”
“검왕이 인정한 남자!”
“랭킹을 뒤바꿀 이레귤러!”
“무신의 차기 대권을 이을 남자!”
“이미 차기 십왕으로 내정된 세기의 천재!”
어째 나를 수식하는 단어가 하나 더 는 것 같은 건 비단 내 착각만은 아니겠지?
수많은 학생으로 북적거리는 구내식당. 그곳을 지나가는 내 귓가로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뭐, 이제는 익숙하다.
다만 매일 수식어가 하나씩 더 붙는 게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
“과연 주군이십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주군의 명성이 사해四海에 진동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요. 마스터는 파칼리스 대륙의 신인神人. 닭 속에 있어도 학처럼 고고한 위용을 드러내게 되어 있답니다.”
아마도 내 사생팬이 있다면 파트로나와 아만일 것이다.
이 녀석들은 부끄럼도 없는지 잘도 이런 말들을 지껄여댄다.
장담하건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이제 아카데미에서도 같이 생활하게 된 만큼 이런 칭찬에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후우. 벌써 한숨이 나온다.
“시끄럽고, 밥이나 먹자.”
가디언 사인방과 함께 구석진 곳, 빈자리에 앉았다.
아직 EX 클래스로 정식 허가가 나지 않아 여전히 B 클래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아마 조금 있으면 EX 클래스의 적당한 구색이 끝날 듯하다.
임수아, 아니 이제는 담임이 된 그녀가 한창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그녀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지만, 내 원대한 계획의 일부를 밝히긴 했다.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힘을 키울 거라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당신이 우리의 담임이 되어줘야겠다고.
어차피 나로 인해 생명의 구함을 받은 그녀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승낙했다.
지금 관련자와 만나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 점심만 먹고 나면 그 일도 대충 마무리 지어질 것이다.
“검왕의 인정을 받은 사람과 훈남 훈녀 조합. 와, 장난 아니다.”
나를 비롯한 새로운 얼굴, 가디언 사인방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기 그지없다.
하나같이 다 잘생긴 미남미녀 사인방과 세기의 천재 조합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문제가 있긴 하다.
그 눈총이 따갑다 못해 뚫릴 지경이다.
안 되겠다. 빨리 밥 먹고 여길 벗어나야겠다.
“일동 주목!”
허겁지겁 밥을 먹는 도중 장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다.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선글라스를 착용한 학주의 모습이 보인다.
“제군들. 지금 즉시 하던 행동을 멈추고 여기에 집중해라. 중요한 시청각 교육 이후 식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어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이게 무슨 상황?
웅성웅성.
나와 같이 의문에 빠진 아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조용!”
더욱 강력해진 학주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위협을 하듯 선글라스를 벗은 학주의 푸른 안광이 식당을 물들였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모두 동작을 멈추고, TV에 집중한다. 실시!”
“실시!”
학주의 위엄이 다시금 진동했다.
“실시!”
문제는 거기에 나도 포함된다는 거다.
아직도 몸이 기억하고 있나 보다. 학주의 몽둥이찜질을 말이다.
지이잉-
종잇장같이 얇고 거대한 스크린이 아래로 내려온다.
식사 중에 필요한 시청각 교육을 위해 마련된 장치. 좀처럼 식사 중에는 사용할 일이 없었던 기기이기도 하다.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 화면이 팟하고 켜지며 준비된 영상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발할라의 전사, MC를 맡은 석준현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으잉?
시청각 교육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웬 초인 프로그램?
발할라의 전사는 초인 세계에 관한 각종 정보를 전해주는, 예전의 연예 전문 프로그램과 같은 형식의 방송이었다.
대격변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 그런데 이런 방송을 틀어주는 저의가 뭐지?
「오늘은 특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카데미, 화랑의 교장 선생님이기도 한 이율학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많은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면 가득 잡히는 인물, 그는 나와 이곳 모두에게 익숙한 교장 할배였다.
맙소사!
설마 교장 할배가 나온다고 이 많은 인원의 식사를 중단한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최근 가장 이슈가 되는 건 검왕의 인정을 받은 천재, 바로 이연우 학생에 관한 것이겠죠.」
이런!
인터뷰 시작부터 내 이름이 언급된다.
사전에 질문과 답변을 맞춰뒀을 테니 이번 인터뷰의 주제가 나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다.
불길하다.
마치 검왕이 기자회견을 했을 때와 같은 불길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목을 옥죄는 듯하다.
「직접 교장 선생님께 묻겠습니다. 이연우 군은 어떤 학생인가요? 정말 검왕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하십니까?」
TV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그 시선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불길하다. 매우 불길해. 뭔가 터질 것만 같은 기이한 예감이 자꾸만 이거 올라온다.
「천재요? 허허허. 사실 처음 검왕의 그 말을 듣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검왕의 말을 부정하신다는 말씀이신지?」
「물론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연우 학생은 천재가 아닙니다.」
교장 할배의 말에 장내가 술렁인다.
하지만 난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이어지는 교장 할배의 말에 집중했다.
「검왕이 인정의 전면으로 부정하시는 건가요?」
「적어도 천재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해야겠지요.」
「흠. 마치 선문답을 하는 듯한 느낌인데요. 천재라는 부분을 부정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천재라는 건 타고난 재능을 갖춘, 선천적 재능이 뛰어난 인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아는 이연우 학생은 선천적인 재능은 단 하나도 가지지 못한 둔재에 불과합니다.」
“어쩐지. 갑자기 그런 인정을 받을 리가 없잖아?"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
이 새끼들 반응을 보면 마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 반전이? 그럼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연우 학생은 천재가, 십왕을 노릴 만한 재목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네? 그건 또 아니라니...」
진행자가 준비된 리액션을 보여준다.
온다, 온다. 교장 할배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내 눈에는 보이는 것 같다.
「타고난 재능은 둔재. 그러나 노력하는 재능만큼은 세기에 다시 없을 천재. 이연우 학생은 선천적인 재능이라는 벽을 넘어 고수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는 진정한 노력파입니다. 그런 이에게 천재니, 재능이니 들먹거린다? 그건 분명 모욕일 겁니다.」
아, 할배. 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 수식어가 또 하나 늘 모양이다.
「맙소사. 그의 선천적 재능이 둔재인데도 불구하고 검왕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게 되겠지요. 혹 우리 화랑의 클래스 시스템을 아십니까?」
「대한민국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얼마 전 내부 검사가 있었습니다. 그 검사에서 이연우 학생은 F 클래스를 받았다고 하면 모든 게 설명이 되겠지요.」
「헉?! F 클래스라고요?」
아, 제발. 그 어색한 연기를 그만두라고 MC 양반아!
「그럼 이연우 학생은 F 클래스에 배정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연우 학생의 재능은 노력하는 재능. 언제가 반드시 대성할 수 있는 그 잠재력을 내부에서는 EX 클래스로 판단한 상태입니다.」
「EX 클래스라뇨? 제가 알기로 화랑의 최고 클래스는 S 클래스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특별한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모아 EX 클래스라는, S 클래스의 상위 클래스를 신설하게 됐습니다. 장담하건대 EX 클래스로 구성된 학생은 장차 대한민국을, 아니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초인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중입니다.」
「오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그들이라면 대한민국 최초로 십왕의 위를 노릴 만한 재목이라는 거겠죠?」
교장 할배와 MC를 잡던 카메라가 줌인한다.
화면 속 교장 할배의 모습이 점차 커진다.
어느새 할배의 얼굴까지 줌인 된 카메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자신만만한 할배를 화면 가득 비추었다.
「그건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팟!
마치 짜놓은 각본처럼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시커멓게 변했다.
“시청각 교육 끝. 제군들은 다시 식사에 집중한다. 실시!”
“...”
그러나 학주의 위엄이 이번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맙소사. S 클래스보다 위라니...”
넋이 나간 아이들의 시선이 오직 나를 향하고 있다.
과연 교장 할배다. 설마 F라는 수치를 이렇게 이용할 줄이야.
순식간에 세간의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검왕이 인정한 천재에서 검왕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이 노력한 둔재로.
이러다가 나중이 되면 지구인이 아니라 외계인이라고 하는 거 아냐?
하하. 그런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왠지 진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곳이 앞으로 우리가 사용할 연무장이라는 거죠?”
“맞아요. 우리 EX 클래스의 전용 연무장이에요.”
내 정면에는 과거의 미망을 조금이나마 떨쳐낸 임수아가 있었다.
2시간 넘게 EX 클래스에 대한 설명을 듣던 그녀는 임시로 사용하게 될 창고 형태의 교실과 연무장을 차례로 소개해줬다.
사실 교실까지는 그리 놀라울 게 없었다. 교실의 구색만 갖춘 창고. 그게 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무장은 달랐다.
B 클래스의 연무장과 비교해 배는 넓어진 공간, 심지어 연무장 바닥과 벽은 초인들이 일으킨 충격에도 끄떡없는 강화 소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긴 교직원 전용 대련장이었던 것 같은데. 맞죠?”
“네. 맞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교직원들이 이용하던 전용 대련장이었어요.”
TV까지 나가서 기대해 보라는 둥, 홍보해대더니 통 크게 인심을 쓰긴 썼나 보다.
설마 교직원 전용 연무장을 내어줄 줄이야.
화랑의 교직원이라 하면 저마다 난다 긴다 하는 랭커들이다.
물론 하이 랭커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댔다 하면 다들 알 만한 수준의 강자들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공간을 학생에게 내어줬다? 이건 파격적인 걸 떠나서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기대의 반증이겠죠. 저도 처음 설명을 듣고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어요.”
임수아도 얼떨떨하기 매 한 가지였나보다.
하긴. 비록 꿈일지언정 인형의 기억은 고스란히 본체도 공유하는 상태였다.
F 클래스, 그것도 최하급 반에서 근무했던 그녀는 이러한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계속 그렇게 말을 높이실 건가요? 아무리 제가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선생과 제자 사이에 그렇게 말을 높이는 건 좀...”
불편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무리 보는 이가 없다지만, 담임과 제자의 관계다.
반 존대도 아니고 저렇게 높여 부르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주위의 눈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제가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니, 연우 님도 신경 쓰지 마세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진 모르겠는데 결의에 찬 저 눈빛을 보니 아무리 말해도 알아먹지 않을 듯싶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편한 대로 하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그 결의가 기쁘다.
여린 심성이 조금 마음에 걸렸었는데, 결의를 다졌다면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고. 그럼 슬슬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그래요.”
수업 방식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눈 뒤였다.
사실 그녀가 내게 가르칠 것은 없다. 오히려 구현의 능력에 대한 설명을 해줘야 하는 쪽은 나였다.
“조금 전에도 설명했지만, 선생님이 지닌 구현의 능력은 상상력을 통해 더욱 강력한 인형을 생산할 수 있어요. 물론 그것을 생성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도 늘려야겠지만, 그건 하고 싶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은 격이 높은 인형을 생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보죠.”
구현의 능력. 그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혹은 상상을 통해 허상이지만 실재하는 인형을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인형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세 살짜리 아이를 인형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장담하건대 그 인형은 발버둥 치는 것 말고는 그리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랭킹에 드는 초인을 인형으로 만든다면? 전투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는 병기가 탄생하는 셈이다.
완성된 인형의 격에 따라 전투력은 달라진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필요한 건 데이터였다.
초인은 물론 각종 괴수, 심지어 포탈의 존재 또한 좋다. 그 모든 데이터가 모인다면 그 능력 또한 격상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제가 또 특별히 준비한 게 있죠.”
임수아는 나와 함께할 동료. 그렇기에 그 선물을 미리 정해뒀었다.
인벤토리를 열어 바빌론의 창고에서 가져온 ‘선물’을 꺼냈다.
“선물입니다.”
마치 호박석과 같이 노란 마름모 형태의 보석.
“이건?”
“기억의 보석이라고 하는 귀한 물건이죠.”
아오스에는 여러 가지 편의성 기능을 가진 아이템이 존재한다. 그중 기억의 보석은 게임 활동 중 필요한 영상을 저장할 수 있는, 어찌 보면 녹화의 기능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본래는 3시간 정도의 영상을 저장하는 게 전부였으나 이게 현실로 넘어오면서 달라졌다.
[당신의 기억을 보관하겠습니까?]
[Yes / No]
일찍이 가디언들에게 실험한 결과 기억의 보석에 저장할 수 있는 건 내가 지닌 기억의 모든 것이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 종말을 함께 할 동료에게만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보석. 지금 이 작은 보석에는 내 모든 기억이 담겼다.
“선물이라면 감사히 받을게요.”
영특한 그녀는 단번에 선물에 어떤 의미가 있음을 깨달은 모양이다.
망설임도 없이 기억의 보석을 집었고.
“아!”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보석을 쥐는 순간 내 모든 기억이 그녀에게 전송이 된 것이다.
종말을 맞이했던 미래, 그리고 회귀, 현재까지.
귀찮게 설명할 필요 없이 기억의 보석 하나면 이 기적과 같은 일을 설명할 수 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과거로 돌아왔을 줄은...”
충격이 큰 듯했다.
하긴 아무리 그녀가 큰일을 겪었어도 곧 있으면 종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태연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다른 평범한 상황이라면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의 전이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다.
너무도 선명한, 내 감정마저도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잠시 말을 잇질 못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정신적 성숙을 이룬 그녀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해줄 말은 없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이것을 제게 준 건 상상력의 확장 때문이군요.”
이제야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정확합니다.”
내 기억 속에는 종말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초인들과 각종 이계의 존재, 괴수, 그리고 게임 속 활약이 담겨 있었다.
상상력이라는 것을 확장하는 데 이만한 영상 매체가 어디 있겠는가.
짐작하건대 지금 임수아는 과거 활약했던 초인 임수아보다 더욱 확장된 상상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아직은 그 힘을 다루는 게 조금은 어설플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연우 님과 가디언 분들의 숙련도를 위한 인형 생산이 되겠네요?”
“그것 또한 정확합니다.”
과연 영특하다.
내가 사람을 아주 잘 뽑은 모양이다.
“어떤 인형을 만들어 볼까요?”
“글쎄요. 그건 제가 지정하는 것보다 수아 씨가 직접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 기억을 공유했으니 이제는 조금 편하게 대해도 되겠지.
“흠. 마침 적당한 게 떠올랐으니 이걸로 해볼게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연무장 중앙으로 이동한다.
구현을 준비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아직은 그리 기대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내 기억을 전이 받았어도 아직 그녀의 능력은 미미하다. 명상과 잦은 구현 발휘를 통해 근본적인 에너지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그리 강력한 인형을 생산하지는 못할 것이다.
스스스-
구현 능력을 발휘할 때의 특징, 몽환적인 느낌의 핑크빛 기운이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예전 기억 속에서 본 것과 같은 강력한 기운을 이루진 못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내심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던 차였다.
“워, 씨발 깜짝이야!”
핑크빛 기운이 걷히고 드러난 존재를 본 나는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고오오-
불타오르고 있는 머리칼. 핏빛으로 물든 두 눈. 등을 장식하고 있는 한 쌍의 검은 날개.
고개가 절로 움츠러드는 위엄까지는 갖추지 못했지만, 그것은 내 기억 속 공포로 각인된 절대자의 모습이었다.
“오만의 군주?!”
골든 포탈을 찢고 나온 종말의 악마가 심연에 물든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