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고인물은 노가다가 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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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을 만나기 전만 해도 임수아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물론 캠퍼스의 퀸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그냥 완전히 평범한 대학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초인이니 뭐니 하는 세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평범한 생활은 23살의 어느 날 끝을 고하고 말았다.
평소 그녀의 미모에 혹해 있던 사내.
1년 내내 스토킹하던 예비 범죄자는 으슥한 새벽을 틈타 임수아의 집에 침입해 강간을 시도했다.
다행이라면 평소 꼬이는 놈들이 많아 호신용 스프레이를 몸에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 불행이라면 스프레이가 정확히 눈에 분사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따가운 정도의 고통을 느낀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빌라를 나왔다.
만약 그에게 각성이라는 큰 사건이 닥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끝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각성하게 된 사내는 발화의 특성을 이용해 빌라를 전소全燒시켰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 임수아도 각성을 했다는 것이다.
완전히 다 타버린 빌라에 펼쳐진 구현의 능력. 그것은 공간 자체를 분리할 정도로 강력한 던전을 생성했다.
덕분에 발화로 인해 불에 타버린 주민들의 영혼, 그리고 방화범인 사내도 단절된 공간 속에 갇히고 말았다.
너무도 강력한 힘을 한 번에 분출해 버린 데다가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임수아는 꿈에 빠져들고 말았다.
마치 지금 일어난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듯이.
꿈을 꾸는 중에도 그녀의 구현화 능력은 발휘되었고, 몇몇 개의 인형이 만들어졌다.
평소 꿈꾸던 자신의 미래.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초인을 가르치는 선생 임수아가.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는 빌라 주민들의 인형이 말이다.
*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새끼가, 모든 비극의 원인인 강간범이자 방화범이다.
무의식중에 펼쳐진 임수아의 능력으로 인해 던전이라는 분리된 공간 속에 갇혀버린 머저리.
하지만 그리 만만한 녀석은 아니다.
도무지 열 수 없는 옥탑방 문 앞,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임수아의 힘을 먹어치워 던전의 최종 보스가 되어버렸으니까.
능력만으로 보자면 하급 던전에 어울리지 않는, 꽤 강력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씨발. 그깟 여자 하나 따먹는 게 뭐가 대수라고. 씨발, 개씨발.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
저 중얼거리는 말만 들어도 알겠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병신새끼다.
취직이 안 되면 자기 같은 인재를 몰라준다고 회사 탓.
인생이 안 풀리면 부모가 뭘 해주지 않아서 그렇다며 부모 탓.
범죄를 저질러 놓고 다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재수 없어서 걸렸다며 세상 탓.
“미친 새끼.”
미친놈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미친놈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난 그럴 마음이 없다.
다만 이 엿 같은 일을 벌인 미치광이에게 쓴맛을 보여줄 뿐이다.
“넌 진짜 편하게 뒈지진 못할 줄 알아라.”
“키킥! 개소리!”
봐라. 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나불댄다.
힘 좀 흡수해서 좀 강해졌다 이거지?
하지만 넌 모를 거다.
편하게 죽일 거였으면 처음 기습에 창을 사용했겠지. 그런데 넌 편하게 죽을 자격이 없다.
최소한 이곳에서 죽어 나간 이들의 반, 아니 반의반만큼이라도 고통을 느껴봐야지.
“씨발, 너나 뒈져!”
나는 녀석을 보지 않았다.
욕설을 내뱉는 순간, 엄지와 검지를 튕기려는 그 동작을 관찰하는 중.
쉭!
힘을 싣지 않았다. 오직 빠르기를 위한 찌르기를 펼쳤다.
“악!”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는 속도보다도 내 창이 더 빨랐다.
학주나 검왕은 쉽게 막았을지 몰라도 고작 하급 던전의 강간범 따위가 막을 만한 일격은 아니다.
특히 빠르기로 인해 피해가 강력해지는 신창의 특성이 발동해 녀석의 손을 뭉개 놓았다.
[중급 창법(Lv 7)이 4% 상승합니다.]
역시!
임수아의 강력한 능력을 흡수한 만큼 녀석은 강하다. 덕분에 어마어마한 숙련도의 상승을 볼 수 있었다.
“악! 아파, 아프다고!”
창날에 찔린 손을 털며 물러난다.
녀석의 발화 특성은 신체 부위를 마찰시켰을 때 발휘된다.
발휘되면 귀찮다. 그래서 공격의 기회도 주면 안 된다.
“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지!”
“아악!”
콱!
연달아 찌른 창이 녀석의 발가락을 헤집어놨다.
녀석이 가장 쉽게 마찰을 일으킬 만한 요소, 손과 발을 묶어버렸다.
웬만하면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
쩌저적!
빙결의 힘을 담은 젤루의 권능이 녀석의 입과 양팔, 그리고 두 다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를 가는 것 또한 마찰을 일으키는 행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쓸데없이 능력만 강해서는.”
그건 이 개새끼에 대한 아주 객관적인 평가다.
임수아의 능력을 흡수해 강해진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녀석에게는 전투 센스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각성한 이후 평생을 이곳에 갇혀 힘만 먹어치웠다.
세 살짜리 아이에게 어른의 힘을 쥐여준 꼴이다.
“으으읍!”
발화의 능력을 봉쇄당한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것 정도다.
이런 모자라지만 사악한 녀석 같으니.
만약 내가 임수아에 관한 정보를, 녀석에 대한 특성을 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존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최초의 던전 탐사대가 당했던 비극을 되풀이하고 말았을 것이다.
녀석의 인생 중 가장 불행한 일이라면 나와 같은 회귀자를 만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숙련도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겠지.
“자, 그럼 시작해 보실까?”
내가 가디언들을 돌아보자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푹, 퍽, 쩌적!
능력을 봉쇄당한 녀석을 향한 통쾌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중급 창법(Lv 7)이 4% 상승합니다.]
[중급 창법(Lv 7)이 4% 상승합니다.]
[중급 창법이 Lv 7에서 Lv 8로 상승합니다.]
[중급 창법(Lv 8)이 3% 상승합니다.]
...
미칠 듯하게 오르는 숙련도를 보라!
“주군. 제 검법이 놀랄울 정도로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키야. 이거 진짜 개꿀인데?”
“인정.”
마찬가지로 숙련도라는 시스템에 영향을 받는 가디언들도 신이 났다.
나야 학주, 그리고 검왕을 통해 어느 정도 숙련도가 오른 상태라 이 정도지, 아마 녀석들의 숙련도는 그야말로 광란의 춤을 추고 있을 게 틀림없다.
“야야야, 이러다 죽겠다. 잠시 대기.”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작이 멈췄다.
“파트로나. 네 차례야.”
“네. 마스터.”
파트로나의 몸에서부터 황금빛 기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웬만한 신성력은 휘광輝光, 백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파트로나의 신성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태양신 아모스의 사랑을 받은 성녀. 그녀의 신성력은 신의 은총이 가득 담긴 황금빛이었다.
화악!
그 찬란한 빛이 구체처럼 뭉쳐 꿈틀거리는 개새끼에게 향했다.
황금 구체를 흡수한 녀석은 그것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치유와 재생, 그리고 기도. 파트로나는 자신에게 허락된 회복의 권능을 사용해 녀석의 상처를 말끔하게 치유했다.
일부러 치명적인 상처는 피했기에 아직은 나약한 파트로나의 신성력으로도 충분히 완치가 가능했다.
이것으로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파트로나 또한 짭짤한 숙련도를 얻을 수 있겠지.
“이, 이익!”
아직은 독기가 충만한 녀석을 보며 씨익 웃었다.
“젤루.”
쩌저적!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젤루의 빙결 마법이 작렬, 녀석은 마찰을 일으킬 만한 부위를 모두 봉쇄당하고 말았다.
“말했지. 넌 쉽게 죽지 못할 거라고.”
“읍읍읍!”
발버둥 치는 녀석을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새끼야. 넌 죄 없는 이들을 죽인 합당한 대가, 그리고 나를 위한 숙련도 노가다의 제물이 되어줘야겠어.
푹!
힘을 실은 창이 녀석의 허벅지에 꽂혔다.
[중급 창법(Lv 8)이 3% 상승합니다.]
[일섬(★★☆☆☆)의 숙련도가 1% 상승합니다.]
귓가로 파고드는 숙련도 상승 알림이 이렇게 유쾌할 수가 있나.
*
푸욱!
확연히 빨라진 창이 흐릿한 궤적을 남겨놓으며 녀석의 팔뚝에 파고들었다.
[축하합니다. 중급 창법이 Lv 9에서 격상해 상급 창법(Lv 1)이 되었습니다.]
[1레벨에 상급 숙련도를 소지했습니다.]
[‘칭호 : 창귀槍鬼’가 각인됩니다.]
[일섬(★★☆☆☆)의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일섬(★★★☆☆)’을 획득했습니다.]
마침내 오랜 노가다의 결실이 맺혔다.
상급 창법과 삼성三星의 일섬 획득.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은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콰득!
지금까지와 달리 창에 닿은 녀석의 팔이 그대로 절단되어 버렸다
이것이 숙련도의 변화가 낳은 결과다.
사실 초급과 중급의 숙련도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중급과 상급의 차이는 하나의 벽과도 같아서 상급에 들어선 순간 위력이 완전히 달라진다.
“으으읍!”
젤루의 빙결 효과로 인해 입이 막혀버린 녀석은 눈을 까뒤집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팔이 절단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겪은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끄으으...”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한 녀석은 기절하고말았다.
의식을 잃은 녀석을 응시한다.
동정심? 그 따위 감정을 느낄 턱이 있으랴.
강간을 시도했다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불을 질러 빌라 안의 모든 사람을 불타 죽게 만든 개새끼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숙련도 노가다로도 그 합당한 대가를 다 받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파트로나.”
내 부름에 파트로나가 신성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녀의 신성력으로도 절단된 팔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숙련도가 제법 올랐다곤 하지만, 아직 1레벨인 상태. 고위급의 신성 마법을 배워야만 절단된 상처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제발 죽여줘...”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숙련도 노가다, 아니 녀석의 입장에서는 잔인한 고문에 애원을 시작한다. 물론 녀석의 애원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길게 끌어온 숙련도를 끝내야 할 때가 되긴 했다.
“그래. 어차피 네 녀석의 쓸모도 다 했으니 끝을 보자.”
나도 원했던 것 이상의 결과를 얻었고, 가디언들 또한 숙련도 상승이 지지부진한 상태다.
욕심을 부린다면 조금 더 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 대비 효율이 높지 않다.
이번 노가다 말고도 다른 계획이 많이 세워져 있으니 굳이 이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겠지.
“아만.”
“부름에 대령했습니다. 주군!”
어느새 본래의 모습, 부정한 기운을 발산하는 죽음의 기사로 돌아온 아만이 무릎을 꿇은 채 답한다.
“끝장내.”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저벅저벅.
위풍도 당당하게 녀석을 향해 다가간 아만이 양손에 든 스톰브링어를 높게 들어 올렸다.
푸욱!
수직으로 떨어진 마검이 정확하게 녀석의 정수리로 파고들었다. 그 마지막 순간 녀석의 표정은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병신.”
하지만 녀석은 알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고문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최후라는 것을.
“집어삼켜라, 스톰브링어!”
스톰브링어에 새겨진 문자가 회색빛을 발산한다.
아아아-
마치 지옥에서 울부짖는 듯한 스산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변화. 진즉 죽음에 이른 녀석의 육신에서부터 희미한 안개와 같은 것이 나와 스톰브링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녀석은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
마검에 잡아 먹힌 영혼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공간에서 고통받게 될 테니 말이다.
“아주 사악한 영혼이로군. 스톰브링어가 이렇게 만족하다니.”
웅웅-
영혼을 집어삼킨 스톰브링어가 만족의 검명劍鳴을 토했다.
녀석에게 영원한 고통도 주고, 마검은 사악한 영혼을 흡수해 더욱 강력해진다.
숙련도 노가다부터 시작해 영혼 흡수를 통한 복수.
보아라. 이것이 바로 고인물의 철저한 설계라는 것이다.
[(필수)서브 퀘스트 : 빌라에 있는 모든 주민을 처치했습니다.]
철컥!
최종 보스를 마지막으로 옥탑방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지나 마침내 옥탑의 영역에 도착한 내가 본 것은 평상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는 여인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 마치 환자처럼 병색이 완연한 핏기 없는 피부. 심지어 하늘거리는 하얀색 원피스와 합쳐져 그야말로 청순가련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절로 눈이 가는 미모도 미모지만, 가장 특징 있는 점이라 한다면 역시 그녀의 주변으로 퍼져 있는 핑크빛 기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V에서도 몇 번 본 적 있는, 그녀만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오라였다.
“오호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콘셉트? 그렇다면 마스터. 이제 가서 뽀뽀로 공주를 깨...으악!”
자기가 더 흥분해서 설쳐대던 바포르는 파트로나의 스태프에 옆구리를 허용해야만 했다.
“조용히 하세요, 바포르.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이는 파트로나의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마스터. 설마 저년...은 아니고. 어쨌든 저 여인을 깨우는 방법이 설마 뽀뽀는 아니겠죠? 그렇죠?”
아무래도 이것들이 동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아닌데?”
무시무시한 파트로나의 눈빛을 뒤로한 채 꿈을 꾸는 임수아에게 접근했다.
철썩!
“악!”
찰지게 때린 싸대기에 강시처럼 몸을 벌떡 일으킨다.
“여, 여긴...?”
흑요석을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로 날 응시한다.
설명을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으나 굳이 내가 무얼갈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설마, 설마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던 건가요?”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끔찍한 기억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피하기만 해서는 현실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미망 속을 헤매겠죠.”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 잔인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나, 나 때문에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오빠들도, 주인아저씨도... 모두가 고작 나 하나 때문에... 흐윽!”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자기 때문에 빌라에 살던 모든 주민이, 가깝게 지냈던 그들이 잔인한 죽음을 맞이했다. 심성이 여린 그녀는 그 모든 사실이 고통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테지.
서러움에 흐느끼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블랙 포탈 사태 이후 절규하던 나와 닮았다.
물론 그건 나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발악한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재해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죽은 이들이 내뱉던 고통 어린 비명과 절규, 그리고 공포는 내 정신을 무너뜨릴 정도였다.
당시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종말의 날까지 나는 고작해야 게임 세계에 빠진 채 허송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임수아, 그녀도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될 인재다.
“바보같이 자책하지 말죠. 죄를 저지른 개새끼가 나쁜 거지,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물론 그 무거운 죄책감을 덜순 없겠죠.”
피해자는 피해자다. 그녀가 죄의식을 가질 이유는 없었지만, 이것이 내가 그녀를 찾은 이유 중에 하나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속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종말에 저항했던 초인. 종말을 막기 위해선 속죄라는 이름의 사명감으로 무장한 그녀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과거보다 더욱 강력한 힘으로 무장한, 종말에 대항할 수 있는 임수아를 원한다.
“속죄하기를 원하나요?"
그녀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속죄라고 했다.
자신으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빌라 주민들에 대한 속죄.
"그럼 제 손을 잡으세요. 기꺼이 그 기회를 만들어 줄 테니.”
그것이 그녀를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면 기꺼이 그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속죄를 넘어 인류의 희망으로 거듭날 유일한 기회를.
아, 물론 내 숙련도 노가다의 떠오르는 신성이 되어주는 것도 덤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