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고인물은 분노를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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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100.
「아아, 국민 여러분 보이십니까. 블랙 포탈이, 종로의 악몽이 다시금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미 이곳 등촌동 전역에 퍼진 차원의 균열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지난번 종로의 악몽 때보다 더욱 영역이 거대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사실상 이것이 대한민국의 종말이 아닐까, 예상되는 바입니다.」
TV의 화면 가득 비친 젊은 남자 리포터가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현장의 긴박감?
생생한 정보 전달?
그런 건 없다. 절망이라는 기운에 잠식된 리포터가 할 수 있는 일은 압도적인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차원의 균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등촌도 전역을 감싼 검은 기운. 마치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는 그것의 정체는 포탈이었다.
대격변을 일으킨 이상 현상. 이계가 차원을 넘을 때 나타나는 징표였다.
파츠츠!
먹구름과 같이 등촌동 전역을 잠식하던 검은 기운이 공간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마침내 공간이 찢겨 나갔다.
개천開天. 마치 하늘이 처음 열렸을 때와 같이 찢겨 나간 공간 속에서 무수히 많은 존재가 떨어져 내렸다.
“%!$!#!#!”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인간 같기도 한, 하지만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이종족. 그들의 언어는 지구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콰콰콰쾅!
그들이 휘두르는 손짓에 불덩이가 날아가고, 번개가 쳤다.
도시는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저항은 미미했다.
“아악!”
“누가 좀 제발...”
“도와줘!”
카메라 너머. 공간의 결계에 갇힌 시민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이 믿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초인은 등장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블랙 포탈의 규모를 짐작한 정부, 초인 협회, 그리고 길드 측에서 등촌동의 구조를 포기한 까닭이다.
무리하게 등촌동을 지키는 것보다 최대한 준비하고, 병력을 모아 화곡동에서 맞서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초인이 나서지 않는 이상 일반 시민은 공간의 결계를 깰 수 없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결국, 등촌동 시민들은 대의라는 이름 아래 무참히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지옥에서 온 사자들처럼 학살을 자행하는 이계인들. 그들에게 자비심은 없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핏줄기와 효시를 위한 목적으로 잔인하게 꿰뚫린 시체.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이리라.
“으아앙!”
온갖 비명 속에서도 똑똑히 울려 퍼지는 울음.
이제 갓 5살이나 되었을까. 양 갈래 머리를 예쁘게 땋은 사과 원피스의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email protected]#$%!#”
울음소리에 반응한 이계인들 일부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울고 있는 아이. 설사 짐승이라 해도 동정심이 일 수밖에 없었으나 이들에게 마음이란 게 없는 듯했다.
화르르!
손에서 일으킨 불꽃을 가볍게 던진다.
여자아이가 잿더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펑!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날아가던 불덩어리는 강력한 힘으로 인해 공중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
그 앞을 막은 건 흡사 환자와도 같이 창백한 피부,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자랑하는 젊은 여인이었다.
“야야,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를 건드리는 건 아니지 않아? 이 좆같은 새끼야!”
푸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조금 전 어린아이를 공격했던 이계인의 몸이 양단되며 쓰러졌다는 것.
“하여간 평소에 요란한 것들이 꼭 이럴 때 도움이 안 돼요. 정부는 씨발. 협회는 더한 놈들이고. 길드, 이 새끼들은 거의 뭐 인간쓰레기지, 뭐.”
투덜대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여자아이를 안아 들었다.
“에구구. 울지 마요. 언니가, 아니다. 그건 양심에 어긋나서 안 되겠고. 이모가 맛나는 거 사줄 테니까. 뚝!”
세기말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달래기.
“으아아아앙!”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 번 울음이 시작된 아이를 그치게 하는 건 정말 큰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시집도 안 간 처녀가 광폭화한 아이를 달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
“*^%!#%%”
소리의 근원지로 이계인들이 모여들었다.
블랙 포탈이라 하면 병력 하나하나가 웬만한 초인 뺨치는 정도. 그들 수백이 몰려드는 광경은 충분히 공포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이런 씨발 새끼들아. 너네 그 더러운 면상 보느라 애가 울잖아!”
마치 물구나무를 한 것처럼 그녀의 머리칼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스스스스-
몽환적인 느낌의 핑크빛 기류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서걱, 퍼퍽, 쾅!
작은 소요가 일었고, 침묵이 찾아왔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핑크빛 기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타난 건 놀랍게도 과거의 십왕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포탈로 인해 십왕 중 오왕五王이 사망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인 건 분명 십왕 전원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 구현의 마녀 임수아가 지니고 있는 ‘구현’의 특성.
“끝장내 버려!”
그녀의 명령과 함께 십왕은 각자의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종말의 날까지 고작해야 100일. 등촌동에서 일어난 블랙 포탈은 오직 그녀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종식되었다.
*
바퀴벌레처럼 종말의 날까지 생존한 나는 그 광경을 TV로 봤었다.
꺼지지 않은 카메라 사이로 펼쳐지는 종횡무진 활약. 구현의 마녀 임수아는 그렇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물론 종말의 날, 그 강력함을 자랑하던 그녀 또한 오만의 군주에 의해 찢겨 죽었지만 말이다.
뭇 사람들은 말했다.
미망에서 깨어난 지 2년. 고작 2년 만에 그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좀 더 빨리 깨울 수 있었다면 종말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희망을 품은 사람 중에는 하나가 바로 나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깨어난 사건 등의 흔적을 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선견지명이었다.
자 봐라. 지금 나는 임수아가 잠들어 있는 빌라에 서 있다.
미래에는 3년 뒤에나 일어날 일을 저지르고자 하는 중이다.
“준비는?”
결의에 찬 가디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울부짖어라. 스톰브링어Stormbringer.”
그리고 그 순간.
으드득-
뼈가 뒤틀리는 괴이한 소리가 들린다.
입고 있는 옷 사이, 뼈로 짐작되는 하얀 무언가가 줄기를 뻗는 것처럼 교차했다.
징그러운 그것이 곧 검의 형태를 완성했다.
롱 소드Long Sword 형태의 검. 회색으로 물든 날에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어떤 문자가 빼곡하게 양각되어 있다.
저것이 바로 마검魔劍 스톰브링어다.
죽음의 기사 아만이 가진 고유의 무기였다.
“스톰브링어? 그거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거 아냐?”
“제 마력에 감응하는 무기여서 그런지 위력이 많이 감소하긴 했으나 여전히 쓸만 합니다.”
고유 무기라 그런가?
능력은 많이 약화 됐어도 적당히 쓸 만한 모양이다.
하긴 특수 능력 자체가 사기니까.
아만을 제외한 나머지 가디언들은 미리 준비해 둔 1레벨짜리 장비를 착용했다.
1레벨이면 구멍 난 팬티나 양말이나 있을까, 착용할 게 있기나 한가.
물론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만, 나와 가디언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아오스에 존재하는 아이템 중에는 ‘레벨 제한 감소’라는 특이한 효과가 붙은 것들이 존재한다.
본래는 100레벨 착용 제한이 있어도 20레벨 제한 감소 효과가 붙으면 80레벨에서도 착용할 수 있는 방식.
고레벨 무기, 그리고 등급이 높을수록 많은 수의 효과가 붙는데 효과가 중복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하면 조금은 웃기는 상황이 발생한다.
『신창神槍 - 인중지룡人中之龍.
종류 : 창
등급 : 성유물
착용 효과 : 레벨 제한 25 감소
레벨 제한 25 감소
레벨 제한 25 감소
레벨 제한 25 감소
엔 비테의 룬 : 레벨 제한 감소 효과 2배 증가
특수 효과 : 창의 찌르기 속도만큼 피해량 증가
설명 : 비범한 재능을 가진 창사槍士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벼려낸 창. 창에 머문 창사의 영혼이 인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청룡의 비늘을 사용해 벼려낸 강력한 성유물. 그것도 레벨 200이라는 제한이 붙은 창을 쥐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런 페널티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게 다 레벨 제한 감소 효과 덕분이다.
성유물에 붙는 효과는 4개. 그 모두가 레벨 제한 감소였고, 심지어 엔 비테의 룬을 이용해 효과를 2배로 증가시켰다.
그 말이 무엇이냐. 레벨 1에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창이라는 것이다.
언제 한 번 제대로 부캐를 키우고 싶은 마음에 각종 레벨 제한 감소 효과의 아이템을 모았었다. 그것이 고스란히 복으로 돌아온 셈. 덕분에 나와 가디언 모두는 1레벨 제한의 고등급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고인물의 준비성이라는 거다.
만약을 대비한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던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이잉-
귓가로 이명이 파고든다.
분리된 공간을 억지로 파고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 명색이 현역으로 초인을 뛰었던 만큼 그 현상은 익숙하기만 했다.
마치 빠르게 감기를 한 것처럼 주변 사물이 휙휙 지나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
그 모든 변화가 끝이 날 무렵 나는 볼 수 있었다.
“똑같네?”
분리된 차원 안에 입장했지만, 조금 전과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내 앞에 있는 건 빌라였고, 나는 그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던전 : 임수아의 꿈’에 입장했습니다.]
[(필수)메인 퀘스트 : 미망에 사로잡힌 임수아를 깨우십시오.]
[(필수)서브 퀘스트 : 빌라에 있는 모든 주민을 처치하십시오.]
친절하게 던전 임무에 관해서도 설명해 준다.
보통은 클리어 보상도 같이 나오겠지만, 이 던전은 어디까지나 임수아의 개인 특성으로 인해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보상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던전 정보를 읊으며 지하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 길지 않은 계단을 내려가자 오른쪽과 왼쪽으로 101, 102호라 표시된 문을 볼 수 있었다.
어차피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빌라에 사는 모든 주민을 처치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걷어찼다.
쾅!
반쯤 뜯겨 덜렁거리는 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서자.
“누, 누구요?”
온수 매트에 몸을 누이고 있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다 늘어진 흰색 런닝셔츠와 반바지 사이로 드러난 팔과 다리는 앙상하기 그지없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럽게 만든다.
“젊은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마, 말로 하게. 돈이라면 얼마 없지만, 그냥 내어 드릴 테니...”
“이게 무슨 일이야!”
황토색 개량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옆에 섰다.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달은 듯 팔짱을 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쯧. 아직 멀었구나.
이 모든 게 허상, 인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동정심 때문에 선뜻 손이 나가질 않는다.
“주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진정한 신하는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
망설이는 내 행동을 감지한 아만이 움직이려 했다.
“자릴 지켜.”
하지만 녀석을 만류했다.
고작해야 과거의 허상 따위에 얽매여 무슨 큰일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시작은 내 손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부디 편히 잠들기를.”
던전이 생성된 과정, 그 의미를 알고 있기에 가벼이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게 무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순간.
퍼퍽!
빠르게 두 번, 연이어 찔러 들어간 창이 노부부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털썩.
나약한 육신이 허물어진다.
[중급 창법(Lv 7)이 0.01% 상승합니다.]
[일섬(★★☆☆☆)의 숙련도가 0.005% 상승합니다.]
티도 안 나는 숙련도의 상승이 있었다.
당연하다. 지금 쓰러진 이들은 별다른 힘을 가지지 못한 과거의 잔재에 불과하니 말이다.
화르르-
쓰러진 시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평생을 노력했는데 왜?」
「이제야 편히 좀 살려고 했는데 대체 왜?」
불길에 휩싸인 화인火人. 그것이 바로 노부부의 정체였다.
“신속하게 제압한다.”
굳이 내 말이 아니었어도 이미 가디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콰드득-
허공에 생성된 거대한 고드름 두 개가 그대로 노부부에게 직격 했다.
물리적인 타격도 무시할 순 없지만, 젤루의 공격이 치명적인 건 그 이후다.
쩌저적!
고드름에 타격 당한 부위가 얼어붙었다.
빙결 효과. 특히 젤루는 거의 100%의 확률로 적에게 빙결 효과를 주는 사기 캐릭터였다.
스팟-
잠시 굳어버린 상태의 화인을 향해 창을 찔렀다.
퍽!
목젓을 관통한 창이 삐죽이 튀어 나왔다.
[중급 창법(Lv 7)이 1.5% 상승합니다.]
[일섬(★★☆☆☆)의 숙련도가 0.4% 상승합니다.]
확실히 조금 전과는 달리 숙련도 상승이 다르다.
당연하다. 화인이 된 이상 더는 나약한 노부부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초인에게도 심각한 화상을 입히는 강력한 불속성 인형.
「억울해!」
그건 목젖이 꿰뚫렸어도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지금의 광경만 봐도 알 수 있다.
탓-
지면을 박차 재빨리 거릴 벌렸다.
“나를 넘어서지 않는 이상 주군에게 접근할 수 없다!”
그 공간에 아만이 파고들었다.
서걱-
수직으로 그어진 스톰브링어가 정확히 화인의 정수릴 갈랐다.
화르륵!
갈라진 그 틈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감쪽같이 육신을 재구성한다.
분명 보통의 일격이었다면 그냥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스톰브링어는 괜히 마검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휘우우웅!
스톰브링어의 날, 그곳에 새겨진 문자가 회색빛을 발산했다.
「크아아악!」
숱한 공격에도 좀처럼 반응하지 않던 화인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스톰브링어는 영혼을 흡수하는 마검. 상처에 스며든 저주가 생기를 흡수하는 중이었다.
역시 최강의 탱커 아만.
기본적인 방어 스킬도 그렇지만, 스톰브링어를 통한 피흡은 녀석을 아오스 최강의 탱커로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아만이 앞에 있는 이상 적의 공격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신이 당신을 보호할 거에요.”
그리고 아만과 파트로나가 만나면 그 시너지가 더욱 증폭된다.
후미에서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파트로나가 축복을 내렸다.
지잉-
곧 나를 비롯한 모두의 주위로 황금빛 투명한 보호막이 생성되었다.
모든 피해를 흡수하는 보호막. 특히 강력한 보호막의 효과가 적용되는 파트로나의 축복은 일반 보호막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으리얍!”
나머지 하나의 화인과 격렬한 드잡이질에 바쁜 바포르.
솔직히 녀석은 걱정해 줄 이유가 없다. 염제의 불꽃을 지니고 있기에 모든 화염 속성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곳 던전에서 녀석에 대한 걱정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 숨을 못 쉴까봐 걱정하는 정도였다.
바포르를 향한 시선을 돌렸다.
화인을 상대로 여유로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만의 뒤에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게임의 역할로 보자면 아만은 탱커, 그리고 내가 딜러다.
탱커가 저렇게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 나는 내 일에 집중하면 된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화인. 하지만 고도의 집중과 예지를 통한 그 움직임의 동선이 보인다.
“합!”
짧은 미래를 예견하듯, 접점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퍽!
[중급 창법(Lv 7)이 2% 상승합니다.]
[일섬(★★☆☆☆)의 숙련도가 1% 상승합니다.]
[초급 고도의 집중(Lv 3)이 25% 상승합니다.]
[초급 예지(Lv 2)가 30% 상승합니다.]
[초급 혼신의 일격(Lv 2)이 30% 상승합니다.]
[화인을 처치했습니다만 허상에 불과해 경험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숙련도를 욱여넣은 한 방. 그 덕분에 모든 숙련도를 소량씩 상승시킬 수 있었다.
「아아아!」
나머지 화인 또한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이했다.
불꽃이 꺼진 화인은 나와 가디언의 숙련도 제물이 된 채로 소멸을 맞이하고 말았다.
“숙련도 상태는?”
“최고예요, 마스터.”
“이 정도 성장이라면 금방 예전의 힘을 회복할 것 같습니다. 주군.”
가디언들 또한 나와 같이 숙련도에 영향을 받는 존재. 특히 거의 모든 숙련도가 초급에 불과한 녀석들은 그 상승 폭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빠르게 가자.”
“네. 주군!”
우리에게 있어서 이곳은 위험천만한 던전이 아니라 안전하게 숙련도를 올릴 수 있는 노다지였다.
*
다세대 주택답게 빌라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흔히 반지하라 부르는 지하에는 노부부와 술에 취한 아저씨가. 1층에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부부와 독립한 것으로 짐작되는 젊은 사내 셋이 있었다.
물론 그들을 처리하는 게 그리 썩 내키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으애앵!”
씨발.
내 눈앞에 있는 건 갓난아기였다.
부모가 되는 신혼부부는 이미 우리의 손에 의해 소멸을 맞이한 상태. 남은 건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잠이 깬 이 갓난아기 뿐이었다.
이제 갓 100일이 지났을까. 오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녀석은 있는 힘껏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마스터...”
연민이 가득한 눈빛의 파트로나가 나를 응시했다.
숱한 사선을 넘은 그녀 또한 갓난아기를 처리하는 일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모양.
“주군. 이번에야말로 제가...”
“아니, 됐어.”
다시 한번 아만을 제지했다.
비록 허상에 불과하나 어쩌면 이곳에 그들의 영혼이 묶여있는지도 모른다.
아만이 지닌 스톰브링어는 영혼을 흡수하는 마검.
녀석에게 처릴 맡기는 건 그들의 영혼을 더욱 고통받게 하는 일이다.
평소 영혼이나 신 따위에 관심도 없었겠지만, 회귀를 한 이상, 어떤 초월자의 개입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더는 무시할 수가 없다.
“내가 한다.”
이를 꽉 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을 만든 ‘그 녀석’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진다.
장담하건대 녀석은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황혼의 인생을 즐기려던 노부부, 이제 갓 사회 생활을 시작한 젊은이, 그리고 100일된 갓난아기와 함께 불에 타버린 이들. 그들의 고통을 몸속에 새겨주고 말리라.
“씨발.”
씹어 내뱉듯 거친 욕설과 함께 창을 찔렀다.
「캬악!」
곧이어 화인으로 탄생한 아기를 손쉽게 처리했다.
기분이 더럽다. 사전에 이런 정보를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막상 그것을 겪게 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오른다.
“...”
숙련도의 기쁨 따위는 잊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최상층, 옥탑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맙소사!”
3층과 옥탑을 구분지어 놓은 문 앞. 그곳에 쭈그려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우릴 반긴다.
“사, 살려 주세요. 저는 괴물들과는 다릅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요. 우연히 이 지옥 같은 곳에 갇힌 생존자입니다!”
간혹 던전 안에 갇혀버린 생존자를 볼 수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녀석은 분명 던전 안에 갇힌 생존자가 맞다.
“초, 초인 맞죠? 제발 이 곳에서 저를...”
퍼억!
그러나 달려오는 녀석에게 내가 건넬 수 있는 건 구조의 손길이 아니라 분노의 주먹이다.
“어째서?”
입술이 터진 듯 피를 흘리는 녀석.
“주둥이 다물어, 이 강간범 새끼야. 아니 방화범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도 아닌 발정 난 개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분명 녀석은 던전의 생존자가 맞다.
하지만 여기에 몇 가지 정보가 더 붙는다.
각성 전이었던 임수아를 강간하려 했던 발정 난 개새끼, 그리고 그것에 실패하자 홧김에 불을 질러버린 방화범.
“킥! 어떻게 알았지? 제법 눈치가 빠른 녀석인데?”
하얀 야구 모자 사이로 드러나는 녀석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다.
강간범이자 방화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뒤틀린 시간 동안 임수아의 힘을 흡수해 몬스터화가 되어버린 던전의 최종 보스. 이 악몽의 공간을 만들어낸 개새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