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고인물은 랭킹 1위도 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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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하!”
아, 정말. 이렇게 웃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블랙 포탈로 인해 심신이 망가진 이후로 소리 내어 웃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회귀를 통해 과거로 돌아와 보니 실제로 내가 겪었던 그 미래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과거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면 아무리 아저씨의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봤어도 이렇게 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라는 사실이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라는 건 곧 일어날 미래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미리미리 준비하는 중이다.
그 계획의 일환이 아저씰 만나는 것이었다.
아저씨와 만나 가디언들의 가장 큰 문제, 인적 사항을 해결했다.
가디언은 원래 게임에 소속되어 있었던 NPC. 당연히 이들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등록되지 않은, 어떻게 보면 국제 미아인 상태였다.
기본적인 인적 정보도 없다면 앞으로의 모든 활동에 차질이 있을 터. 아저씨는 이 문제를 해결해줄 좋은 인맥이었다.
초인 스카우터의 경우 자신의 나라는 물론 해외에 있는 인재들을 발굴해 귀화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
일반인의 경우야 복잡한 귀화 절차를 밟겠지만, 초인의 수가 곧 국력이 된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더욱이 사인방의 특성을 확인한 아저씨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미 모든 일을 끝마쳤을 것이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부탁한 일까지도 말이다.
띵동!
때마침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양반은 못 된다니까.
핸드폰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발신인은 아저씨다.
인적 등록은 물론 따로 부탁한 화랑 입학 추천도 해결해 놓은 상태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고작 2시간 만에 정부는 물론 아카데미까지 구워삶다니. 실적만 나쁘지 다른 일은 일사천리다.
이것으로 당장 오늘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시각은 9시 10분. 가디언들은 바빌론으로 돌려보냈고, 기숙사 방 안에는 오직 나만이 있다.
흐흐흐. 바로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스럭.
혹여나 튀어나올 훼방꾼을 견제하며 꺼낸 건 근처 가게에서 사 온 치킨이었다.
종이상자 안, 기름종이에 싸인 황금빛 자태의 치느님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오, 믿습니다. 치느님. 당신만이 저의 유일한 구세주이옵니다.
튀김옷 사이에 감춰진 온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며 내 코를 간질인다.
고소한 기름 냄새부터가 압권이다.
야식의 일인자는 치킨, 그리고 치킨의 일등 국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별도로 구매한 콜라가 미지근해지기 전에 일단 한 모금.
크으. 목을 쏘는 듯한 이 탄산의 자극이 너무 좋다. 콜라가 아니라 맥주였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아직 육신의 나이가 18세라 함부로 알코올을 반입할 수가 없었다.
입가심한 후 황금빛 자태의 치느님을 뒤적거린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 다르지만, 치킨을 사 왔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먹는 부위는 닭 다리다.
바삭!
오동통하게 오른 다리 살을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한 튀김옷 너머 쫄깃한 식감이 입안 가득 퍼진다.
바삭함과 쫄깃함이 어우러져 입안을 행복하게 만든다.
하지만 언제까지 닭 다리에만 의존할 순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건 닭 다리만이 아니다.
닭 다리와 함께 치킨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날개. 이것도 보통의 유혹이 아니다.
쩌억!
일단 날개의 밑 부분을 떼어낸다.
누구는 이것도 고소해서 먹는다곤 하는데 나는 그런 취미가 없다.
뼈를 제외한 내가 버리는 치킨의 유일한 부위 중 하나. 하지만 아쉬워할 틈이 없다.
2개의 뼈 사이를 감싸고 있는 날개 특유의 부드러운 살이 입안 가득 퍼진다.
가끔 생각한다.
치킨은 다리와 날개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왜 다리와 날개는 2개뿐인 건가. 퍽퍽한 가슴살 대신 다리와 날개로만 이루어지라고. 하지만 그건 키메라가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
순식간에 날개 2개와 나머지 한 짝의 다리를 뜯는다.
몇몇 사람들은 다리 살 특유의 누린내가 싫다고 한다. 물론 난 육향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가끔 그 누린내가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아삭하고 시큼 달콤한 치킨 무를 한 조각!
아삭!
그러자 느끼함과 특유의 잡내가 엑소시스트를 한 악령과도 같이 사라져버렸다.
맛있다. 그냥 동네를 지나치며 산 거지만, 조국의 치킨은 한 번도 날 배신한 적이 없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그래. 치킨에는 역시 스포츠 아니겠는가.
물론 치킨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스포츠 경기와 함께한다면 치킨의 맛은 배가 된다.
기름기가 묻지 않은 새끼손가락을 놀려 간신히 TV를 작동시켰다.
팟!
화면이 켜지고, 그곳을 가득 채운 뜻밖의 인물로 인해 채널 돌리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윌리엄?”
화면을 장식한 건 오늘 오후 한바탕 대련을 펼친 대상이기도 한 윌리엄이었다.
화면 오른쪽 상단을 보자 ‘검왕 윌리엄 그레이스 내한, 긴급 기자 회견’이라는 글귀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웬 기자 회견?
내 기억 속에 윌리엄은 조용히 영국으로 돌아갔었는데?
「여러분, 여길 보십시오. 초인 랭킹 8위이자 십왕 중 검왕의 위로 불리는 윌리엄 그레이스 씨가 깜짝 내한을 알렸습니다.]
공영, 케이블 할 것 없이 모든 방송이 윌리엄의 기자 회견을 송출하고 있었다.
제기랄. 오랜만에 박진감 넘치는 축구와 치느님을 함께 하려고 했더니. 아니 근데 저 양반은 갑자기 웬 기자 회견?
아무리 다른 십왕들과는 달리 대외적인 활동이 잦다 해도 언론에 노출 시키는 걸 자제한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윌리엄 씨.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한하게 된 이유가 있으십니까?]
질문권을 얻은 기자 한 명이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아마 그것이 장내에 모인 모든 기자, 그리고 이 방송을 지켜보는 이들의 궁금증일 것이다.
「본래의 목적은 화랑과 카멜롯의 협업을 위해서였습니다. 최근 화랑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초인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계시겠죠? 비록 카멜롯이 아직 까지는 세계에서도 명문으로 통하는 아카데미라고 하나 고여 있으면 언젠가는 썩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 특별히 내한하게 되었습니다.」
음. 정석이다.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질문인 만큼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화랑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사건이라는 말에 TV 너머의 장내에서 소란이 일었다.
검왕이나 되는 인물이 사건이라고 하니 뭔가 되게 큰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혹 화랑에서 불쾌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영국이 낳은 희대의 괴물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게 대한민국의 신세였다.
「아, 불쾌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라고 해야겠군요.」
어어?
뭔가 촉이 오는데. 저 양반 설마?
「B-4 클래스의 이연우 군. 설마 대한민국에 그토록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인재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혹시가 역시였다.
「이연우 군이라고 했나요? 윌리엄 씨가 보시기엔 그의 재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초롱초롱한 눈빛의 기자들이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윌리엄이, 검왕이나 되는 인물이 대한민국의 학생 하나를 극찬하는 중이다.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기에 어떻게든 이것을 끌어내기 위한 유도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연우 군의 재능이라. 흐음...」
희미한 미소를 지은 윌리엄이 좌중을 훑는다.
이 양반 제대로다.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과연 대외 활동이 많다고 하더니 언론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다 못해 능글맞을 정도다.
긴장감이 TV를 넘어 이곳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아씨,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또 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거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네.
도대체 저 아저씨가 날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나도 무척 궁금했다.
「단언하건대 제가 본 인재 중 최고입니다. 상식을 넘어서는 괴물. 감히 제가 측정할 수 없는 잠재력을 가졌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이고, 이 아저씨야.
띄워주는 건 좋은 데 아직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뻥을 쳐도 적당히 쳐야지. 최고라니. 내가 최고라니!
「그럼 윌리엄 씨는 그, 이연우 군의 재능이 어디까지 도달하리라고 보십니까? 무리 없이 성장한다면 십왕의 자리도 노려볼 수 있을까요?」
저 기자 새끼. 내가 이름 기억하고 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십왕에 비빈다고? 저게 월급 받고 할 말인가?
「글쎄요. 이 세계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아서 저도 정확히는 말씀드릴 수 없겠군요.」
그래. 아무리 내가 보인 게 있다지만, 벌써 십왕을 노리기엔 무리가 있지. 아니, 설사 그만한 재능을 보였다고 해도 저 자리로 가는 길이 쉬울 턱이 없다.
해마다 천재라 불릴 정도의 많은 초인 후보생들이 초인 세계에 입성한다.
그중에는 차기 랭커라 불리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는 기대주들도 있는데, 막상 패를 까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재능? 물론 재능으로만 따진다면 상위 1%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건 맞다. 하지만 초인이 사는 세계는 재능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재능이 뛰어나 오히려 빨리 죽는 경우도 봤고, 전혀 기억 속에 없던 이가 후천적으로 노력해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 내 신분이라고 해 봐야 아카데미의 학생이다.
섣불리 십왕이니 뭐니 말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습니다. 만약 무너지지 않고 확실히 성장만 거듭해나갈 수 있다면 언제고 십왕은 물론 무신武神의 차기 대권을 노려볼 수 있는 인재라고 말입니다.」
툭.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닭 다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직 살점이 꽤 남아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새가 없다.
그 한 마디를 남긴 윌리엄이 유유히 회견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윌리엄이 인정한 차기 랭킹 1위의 재목을 가진 이연우 군. 그는 현재 화랑의 B-4 클래스에 소속되어 있는 학생으로...」
「지금까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고 묵묵히 수행을 거듭해 후천적 특성을 개안한 것으로 알려져...」
「드디어 대한민국에도 왕의 위를 부여받은 인재가 나올 것인가...」
TV의 모든 채널이 온통 내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어떤 양심 없는 곳은 초상권 침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멀쩡히 사진을 걸어놓는가 하면 나도 듣도 보도 못한 신상을 떠들어댄다.
아직도 어안이벙벙하다.
나보고 무신의 자리를 넘볼 재목이라고? 티베트를 수호하는 그 미친 괴물과 비교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띠리리링!
방송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하루에도 한 두통 올까 말까 한 메시지가 수십, 수백 통, 심지어 전화는 끊이질 않고 계속 울려댄다.
핸드폰을 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는 와중.
띵동!
마침 도착한 메시지의 내용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윌리엄 그레이스-』
그제야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윌리엄 그레이스. 이 양반은 십왕 중에서 가장 정상적인 게 아니라 가장 또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