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Katechon (2)
민혁의 집으로 향한 강현은 암호화폐를 원화로 출금하려면 처리할 일이 많으니 그때까지만 도와 줬으면 좋겠다고 정식으로 털어놓았다.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민혁은 한동안 묵상에 잠겨 있다가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르는 질문은 없었다.
그렇게 빚잔치가 시작되었다.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받고 선불 휴대폰을 개통하고 공인인증서도 새로 만들기. 근처 신협에서 계좌를 뚫기(신협의 각 지점은 개별 법인이기 때문에 시중 은행과 달리 압류를 피해갈 수 있다). 대형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하루에서 오천만원씩을 출금하기.
은행 사이트를 뒤덮은 보안 프로그램 앞에서 고함을 내지르거나 21세기인데도 팩스를 보내야만 하는 세태에 좌절을 느끼기도 했지만 일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다른 친구들과도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셨다. 자잘하게 남아 있는 빚도 해결했다.
이자까지 쳐서 사백오십. 맞지.
계산이야 맞지. 갚으라고 준 돈은 아니었긴 한데.
아무튼 받아.
도대체 어디서 뭐 하다가 왔길래 그러냐.
원양어선 한 바퀴 타고 왔다. 왜.
진짜 문제는 은행에 드나들 필요도, 서류를 볼 필요도, 끔찍하게 무거운 사이트 때문에 머리를 싸매 쥘 필요도 없을 때 왔다. 강현은 여전히 민혁의 집에 머물렀고 그가 출근한 동안에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했다. 도시를 기르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들. 그래서 다른 문명들을 무릎 꿇리고 궁극적인 승리로 나아가는 것들.
그는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저장된 파일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일을 반복했다. 혹은 끝을 보기 직전에 멈췄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결국엔 하나로 줄일 수 있었다. 충분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 그런데 좋음이라는 게 뭐지? 그게 도대체 뭐야? 미친 짓이었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얽매인 것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도 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게임을 즐기는 게 아니라 도를 닦는 것 같다고, 혹은 고행이나 자해처럼 보일 때도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몇 백억은 죽였을 거야."
"게임 이야기지?"
"게임에서―응―게임에서. 그런데 이 숫자들이 다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냐. 예를 들어 보자. 너랑 내가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신이 나타나서 오늘 당장 지구를 끝낸다고 말하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테니까, 지금은 여러 가지로 안 좋으니까 고통 없이 지구를 끝내 주겠다고 하면. 그래서 문명이 쌓아온 게 모두 무의미해진다면. 그리고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게 정해져 있었고 우린 알게 모르게 그런 계획들을 따라왔을 뿐이라면. 그러면 어쩔 거야."
민혁은 대답에 앞서 거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열린 문 사이로 천주교 특유의 십자가상이 보였다. 성당은 오래전에 나가지도 않게 된 놈이 무슨 자랑이라고 저런 걸 걸어 두고 있었다. 세례명이 바오로였던가.
"받아들여야지."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지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 봐. 자유의지 같은 거. 삶의 의미 같은 거. 멋지고 좋은 거. 네가 잘 아는 거 있잖아."
민혁은 하고 싶은 말부터 제대로 정리해 보라고 말했다. 질문 자체가 불명확하고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는 게 강현의 입장이었다. 실랑이가 잠시 오갔고 민혁은 한숨을 내쉬고는 처음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강현의 물음은 너무 광범위한 주제에 다각도로 걸쳐 있기 때문에 요지를 분명히 세우지 않는다면 대답이 어렵다는 것. 하지만 자유의지라는 단어 자체만 논해 보자면, 그것이 반드시 숭고함이나 고결함을 내포하진 않는다는 것. 그게 정말로 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거니와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이라 믿는 것들도 사실은 환경이나 태생적 조건에 의해 주어진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 따라서 자유의지에의 선호는 사람이 삶에 대해 지니는 긍정적인 편향과 비슷한 감각이리라는 것.
"그게 망상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야?" 강현은 반사적으로 묻고서는 흠칫 놀라 덧붙였다. "아니야. 넌 뭔가 대답을 할 거고 네가 옳을 거야. 난 잘 모르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영원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게 낫겠는데. 네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매사에 의미를 찾고 정당성과 중요성을 부여하려는 습관이 있지. 남의 일에 대해서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나. 그런데 네 말대로 이런 의미부여는 그 사람의 주관적 세계를 벗어나면 금방 효력을 잃곤 해."
급기야 민혁은 노량진 학원 강사와 유치원 선생님 사이의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카뮈니 네이글이니 하는 이름들이 휙휙 지나갔다. 행위자적 관점을 벗어난다면, 정당화의 체계 바깥에서라면 그런 의미부여는 곧잘 힘을 잃지만, 그래서 만사가 공허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회의가 비극과 직결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네이글의 주장에 따르자면 자기를 초월해 관찰자의 입장에 올라서는 것이야말로, 즉 영원의 관점을 취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도대체 뭐라는 거야? 강현은 볼로디아가 현실정치 이야기를 하던 순간을 복기했다. 확실히 이런 소리보다는 보편복지의 기치 아래 질병과 노화를 없애겠다는 선언이 더 현실청치에 가까운 것 같기는 했다. 현실정치라니. 도대체.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마. 나 지금 머리가 안 좋아. 지능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지능이 뭐냐. 지능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 아무튼. 몸이 안 좋은 거랑 비슷하게 머리가 안 좋아. 그러니까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마."
맥없이 중얼거린 강현은 첫 번째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신이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면 어떻게 하지? 더 좋은 게임판을 가져오겠다고 하면?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인간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그런 일을 한다면?"
"받아들여야지."
"그러면 우린 너무 초라해지지 않냐."
"그렇겠지. 그런 점에서는 신이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그런데 왜?"
"네가 정확히 무슨 답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신이 당연한 세계에서는 그 초라함에 대한 감각조차도 다르겠지.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도 다를 테고. 그래도 우리네 관점으로 말해 보자면, 결국 내 생각은 이거야. 진짜 문제는 신이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신이 없는 거라고."
"무슨 뜻이야?"
"전능하고 선한 신이 세상의 문제를 하루아침에 없애 준다면 좋겠지. 철학 같은 건 제쳐 두고, 나도 그게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해. 삶의 의미를 논하기 전에 세상에는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으니까. 사회 구조의 문제로 보든 간에, 일차적 폭력으로만 간주하든 간에 그건 어쨌든 고통이야. 그러니 네가 말하려는 건 구원이라 부를 수 있을 테고."
"그래."
"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 없다고 봐야겠지. 아주 먼 미래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구원이 언제일지는 누구도 모르고,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그러니까 신을 향한 기대를 삶의 방식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거야. 사람 한 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아주 오래 걸리는 게 우리의 현실이고. 마찬가지야. 세상은 그런 식으로, 하루아침에 좋아지진 않아."
그리고 상담 권유가 이어졌다.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약을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판단력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강현은 소용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친구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검사도 치르고 상담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놀랍도록 잘 말했다. 사업이 망할 무렵에 교통사고까지 났는데 그런 사건이 절묘하게 겹친 탓에 성격이 염세적으로 변했고, 종교적인 믿음과 비관 몇 가지도 함께 얻었다고.
몇 차례의 내원 후에 상담사는 강현이 우울증이 있긴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훌륭하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자신이 솔직히 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세상에 가서 사람도 여럿 죽였고 신들과도 친해졌으며 도시 하나가 무너지는 것도 눈앞에서 보았다고 읊기 시작하면, 그런 일들 때문에 끔찍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면 대번에 새로운 질병 코드가 생길 것이다. F20. 조현병. 혹은 그와 비슷한 범주로 묶이는 병명들.
티아, 어떻게 생각해요? 티아?
그래요, 늑대의 꿈은 없고 신들도 천사도 황제도 저승의 청지기도 정원사도 늑대인간 왕도 동생을 가둔 노인도 마법도 환술도 몸이 커지는 고양이도 수정 속에 멈춘 도시도 황금색 미궁도 걸어 다니는 시체들도 그 무엇도 없지요. 이렇게 떠드는 건 인생이 망할 뻔했다가 투자 한 방에 대박이 난 정신병자일 뿐이고요. 빚을 갚고도 17억이 남았고 좋은 친구도 있는데… 나한테는 그런 것들이 모두 있는데… 그런데 나는…….
강현은 병원 화장실 거울에 대고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사실 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지구로 돌아오기도 전부터. 어차피 천년만년 친구 집에 얹혀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그는 철학은 잘 몰랐지만 한국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았다. 돈에 대해서라면 무조건 민혁보다 잘 알았다. 비록 사업이 망했을지라도.
민혁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강현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하루 종일 생각해 봤는데."
"어."
"넌 결혼을 해야 돼."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몇 년만 있으면 마흔인데. 할 상대도 없다."
"아니야. 그래. 할 사람 없으면 결혼은 안 해도 돼. 그런데 아파트는 하나 계약해. 지금까지 빌라 살았다고, 빌라가 편하다고 신축 빌라 같은 거 사지 말고."
강현은 개인지갑 주소를 적어준 다음 거기에 남은 비트코인을 거래소로 옮겨서 출금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대시세가 한 번 왔다가 갔다지만 사업가의 감으로 보아서 이게 끝물은 아닐 것 같다고, 하지만 분산투자는 중요하니까 서울 내 준신축 아파트를 하나 자가로 마련하라고 했다. 그런 것들을 하나씩 말해 가면서 그는 실로 초현실적인 기분을 느꼈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는 미궁에서 외부조와 내부조를 가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돈 이야기라니.
어쨌든 강현은 시민단체를 차리거나 거액의 기부를 하거나 이상한 사회과학 출판사를 세우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찾아가서 죽여 버릴 의향이 있다고, 그러니까 반드시 아파트를 사고 장기적으로는 탄소배출권 관련 종목에 투자하라고 덧붙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죽일 거야. 만약 하고 싶으면 노후대비 끝낸 다음에 해. 그러고는 미리 적어둔 워드 파일까지 인쇄해서 넘겨주었다. 민혁은 받지 않고 손등으로 쳐냈다.
"너 약 안 먹었지."
"먹었어. 어차피 지금 먹고 있는 거 우울증 약밖에 없어."
"아니야. 일단 강의 다 뺄 테니까 내일 아침에 같이 병원부터 가 보자."
"받아. 안 받으면 너랑 나랑 연 끊는 거다."
"그걸 갑자기 남한테 줄 이유가 없잖아.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나 제정신인데."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강현은 조금 기다리다가 민혁을 불렀다.
"정민혁."
"어."
"내가 자살을 왜 안 했는지 알아?"
"지금 바로 응급실 갈 거니까 옷 제대로 입어."
"이 돈을 왜 벌어왔다고 생각해?"
"당장 옷 입어."
폐쇄병동에라도 넣으려는 모양이지. 안정제도 실컷 먹이고. 나는 제정신인데. 미치긴 했어도 여전히 제정신인데. 강현은 말없이 민혁을 노려보았고 민혁도 그랬다. 긴 침묵이 흐르고는 민혁이 먼저 일어섰다. 세수라도 하는지 물이 세면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현도 일어섰다. 그는 쏴아아, 하는 물소리와 풀벌레 울음 같은 도어락 소리와 민혁의 고함과 그 모든 소란을 뒤에 남긴 채 어둑한 빌라 골목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서울의 인파가 강현을 휩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미리 챙겨둔 비상금이 잡혔다. 5만원권 세 장.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하룻밤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편의점에서 아쿠아 3미리 세 곽을 산 다음 아무 데로나 갔다. 숙박요. 예. 샤워를 하지도 않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맞은편 벽 TV의 꺼진 화면에 이불깃이 어른어른 비쳤다. 리모콘을 눌러 전원을 넣자 액정 오른쪽 상단에 시간이 표시되었다. 아직 저녁이었다. 이런 식으로 뛰쳐 나오기 전에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배달 음식점을 알아보는 대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 있자니 다시 소리가 점점 커지고 멀어졌다. TV를 끈 다음에도 울림은 남아 강현의 곁에서 윙윙거렸다. 그는 세상과 격리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남은 일들을 생각했다.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구할 세계가 없었으며 가족이 없었고 빚도 없었다. 돈은 물론이고 친구도 없었다. 해야 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가진 것. 방금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까지 정리했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이 모두가 내 것이다, 나한테는 여전히 몸뚱이가 있고 시간이 있고 돈이 있고 친구들이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고마운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다, 민혁은 나를 걱정하고 아껴 주는 좋은 친구다, 하는 말들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강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필터에서 입을 떼고 반대쪽을 물었다. 마른 담뱃잎이 침에 젖으면서 혀 전체에 쓴맛을 퍼뜨렸다. 시선을 천장에 고정한 채로 담배를 씹기 시작했다. 찢어진 종이가 잇새에 달라붙었다. 잎담배를 씹는 미국인들은 폐암 대신 설암에 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가 유독 노래진다고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므로 구강건강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순식간에 담배의 반절이 뱃속으로 사라지고는 필터만 남았다. 그는 필터를 협탁에 올리고 다음 담배를 물었다.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더니 귓전에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가슴과 머리가 맞닿은 것처럼. 좋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정말로 오랜만이다. 다음, 다음, 다음. 쓴맛은 당연해지고 머리만이 윙윙 돌더니 심장이 몸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완전한 해방감 속에서 그는 다시 빛을 보았다. 그것은 객실의 전등일 수도 있고 죽음 직전의 환시(幻視)일 수도 있었다. 혹은…….
"이런 씨발."
파울리스의 면상이 눈앞에 있었다. 계약서를 썼던 그 사무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