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Katechon (1)
…는 내 이름.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죽음.
* * *
마지막으로 마주한 장면은, 표범에게서 심장을 도려내고 두 손으로 쥐어드는 저승의 개. 그리고 어떤 소리. 형언할 수 없는 소리들. 이름. 이강현은 눈을 떴다. 햇볕이 잘못 쌓인 렌즈를 통해 들어오듯 여러 겹으로 갈라졌다. 빛 너머에서 노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이 흔들리며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여기 살아요? 고개를 흔들자 소리까지도 흔들린다. 여기? 여기가 어디야?
이곳은 어느 아파트 단지의 정자. 눈앞의 노인은 경비원 제복을 입고 있다. 지금 날짜가 어떻게 돼요? 10월 3일? 년도는? 2018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제 서른여섯이다. 경비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경광봉을 휘두르고 강현은 순순히 쫓겨난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오만원권 세 장과 더불어 접힌 종이쪽지가 잡힌다. 거기에는 대소문자와 아라비아 숫자의 무작위한 배열이 적혀 있다. 암호와 설명도. 500BTC가 담긴 암호화폐 지갑이다. 직전 한 주간의 인베스팅닷컴 시세 평균은 1BTC당 6,587달러. 37억.
이것으로 끝이어야만 한다.
* * *
텅 빈 자리에 이름이 돌아오자 늑대의 아홉 머리가 긴 잠에서 깨어났고, 이에 꿈이 멎었다. 정당한 신과 이방인들이 한데 모이자 저승의 청지기는 늑대에게 나아가 천 년간의 일을 고했다. 늑대는 어떤 일은 슬픔으로, 어떤 일은 기쁨으로 들었다.
늑대는 은빛매의 두 요정이 저지른 일에 크게 즐거워하여 그들의 영혼을 자신의 앞에 세웠다. 하나의 넋은 심장 안에, 다른 하나는 단검에 갇혀 있었으나 둘 모두가 늑대의 일부였으므로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섯 반신도 심장으로부터 나와 섰다.
바라는 바를 물었으나 그들은 허리를 굽히지도 무언가를 청하지도 않았다. 늑대는 이것 또한 기꺼워하며 그들을 애장품으로 삼았고, 정원사의 친척을 불러들였다. 그는 멈춘 꿈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쳤으며 늑대는 그 역시 다른 애장품의 곁에 두어 아끼고자 했다.
그후 해도 달도 멈춘 시간 동안 논의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노인이자 소년인 마법사가 말했다. 저승의 청지기와 정원사들이 말했다. 이방인들이 말했다. 비밀의 주인이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늑대의 딸이 말했다. 늑대가 결정을 내렸고 이로써 이방인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지금의 꿈은 적어도 천 년간 이어질 것이었다. 그 후에 그것은 작은 꿈의 방향에 따라 계속되거나 멈추어 새로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대신 이방인들에게는 끝을 예비시킬 책임이 주어졌다. 사람들에게 늑대의 존재를 밝히는 것과 언젠가 도래할 새로운 세계를 알리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이방인이 책무를 받아들이자 늑대는 그들이 자신의 앞에서 작은 꿈을 만들어내게끔 했고, 단검에서 거둔 넋들을 씻어 그곳에 보냈다. 이방인 하나와 사라진 도시의 주인이 이 꿈을 돌보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넋들은 원래 세계의 일을 잊고 즐거이 지내며 다양한 꿈을 겪게 될 것이었다.
한편 청지기는 늑대인간 왕과 따로 논의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다시 삿된 일을 벌일까 염려했고, 늑대에게 정원사가 받은 것과 같은 크기의 꿈 조각을 부탁했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땅을 거닐고 이방인들을 감독하며 저승의 작은 꿈을 살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꿈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곳에 야스와다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붉은 밤의 도시들Cities of the Red Night>
(윌리엄 S. 버로스, 문학동네, 양장본 초판)
420P, 세 번째에서 일곱 번째 문단까지.
* * *
이강현은 침착하게 할 일을 했다. 피시방으로 갔고, 기억을 되살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다음, 메일함에서 친구들의 아이디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로 와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SNS 계정도 알아내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는 모두 메세지를 보냈다. 두 해간 실종된 데다가, 계좌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공인인증서는 물론이고 신분증도 없이 내버려진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대안 중에서는 가장 현명하고 간편한 방법이었다.
이런 상황에 큰 불만은 없었다. 시체들과도 부대껴 보았고 유령의 땅도 밟은 판에 글줄 쓰는 일은 휴가나 다름없었다. 기왕 호텔에 떨어트려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싶기도 했지만 너무 큰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돈이라도 제대로 받았으니 다행이지.
그는 연락을 뿌린 뒤 신용불량자의 실종에 따른 법적 절차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건 꽤 귀찮을 듯했다. 남 계좌를 빌려 쓰는 게 아니라면 당장 비트코인을 돈으로 쥐기는 글러먹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국세청의 눈길이 따라붙는다. 원화로 출금하는 순간 그건 상대의 돈이 되고, 그것으로 자신의 빚을 갚는다면 양도세를 논해야 한다. 온갖 제약이 퍼즐 규칙처럼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통장은 모두 압류가 걸려 있을 것이고, 회생 절차는 나가리가 되었을 것이고, 신용불량 상태에서 이자도 계속 쌓였을 것이다. 공인인증서부터 해결해야겠군. 그러려면 휴대폰이 있어야 한다. 신용불량자는 휴대폰 개통이 안 되니 선불폰부터 뚫어야겠지. 그러니까 일단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이런 씨발.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돈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돈이 턱 생겼다지만 개인회생은 물 건너간 판이고 빚도 늘었을 게 분명했다. 가산금리까지 따박따박 매겨서. 15억이면 대강 처리를 하고서도 몇 천이 남으리라는 게 원래 계산이었는데 잘 따져 보자 각종 은행에만 바쳐야 할 돈이 이십억 언저리가 되고 말았다. 두 해를 꼬박 사라져 있었으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래도 국세청에 소상한 자금원을 해명할 필요는 없으니 잘 된 일인가. 예전에는 암호화폐니 뭐니 하는 것들은 시세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빚을 정석대로 갚으려면 반절이 넘게 날아갈 판이었다. 선택지는 다양했다. 5년을 행방불명 상태로 뻐기면 소멸시효가 지나 빚이 지워진다는 것은 신용불량자들의 상식이었고 정말로 그 짓거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말인즉슨 귀찮게 은행을 드나들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딱 3년만 더 얹혀 살면 37억과 함께 새 인생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친구든 친족이든.
강현은 잠시 계산기를 멈추고 자신이 이 짓을 왜 시작했는지 되짚었다. 친구들에게 낯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죄의식 없이 술자리에 나가고 싶어서, 미안할 일도 고마울 일도 다 지우고 싶어서 그랬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이딴 걸 부탁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쨌건 남인데. 그렇다고 해서 친척들을 찾아갔다가는 TV쇼의 주인공이 될게 뻔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거나, 궁금한 이야기가 있다거나 하는 류의 프로그램 말이다. 돈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으니까. 37억과 신원미상의 시체. 완벽한 헤드라인이군.
거기까지 생각하자 답이 나왔다. 은행 빚도 갚을 수밖에 없으리라고. 자신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빚이었다고. 게다가 37억이나 17억이나 큰돈이긴 마찬가지인데, 그리고 큰돈이라 쳐도 세상 하나에 비해서는 사소하기만 한데 그런 문제로 아등바등하고 싶지도 않았다.
민혁이 도착한 건 결론이 나고서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강현은 좌석 뒤편에서 뻗어오는 손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머리통이 PC방 특유의 형광빛 어둠 속에 떠 있었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걸 빼면 기억이랑 비슷했다. 곰 같은 덩치에 옆머리를 밀어 버린 헤어스타일. 턱수염. 얼굴로는 홍대 언저리에서 예술을 한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왔냐."
그렇게 물었더니 서른여섯 먹은 놈이 울기 시작했다. 온갖 고생은 자신이 했는데 멀쩡히 학원 강사 노릇만 하던 놈이 울고 있었다. 1500만원을 턱 빌려주고 병수발도 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제정신이 아닌 새끼였다. 강현은 민혁을 데리고 나간 뒤 편의점에서 아쿠아 3미리와 라이터를 샀다. 사방이 금연구역이었다.
어찌저찌 골목으로 들어가 두 대를 모두 태우고서야 민혁이 정신을 차렸다. 차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예전과 똑같은 구형 마티즈였다. 무심코 조수석에 발을 들이려던 강현은 성큼 가까워진 전면 유리창을 깨닫고 문을 닫았다. 세카두에서 타던 수레와는 조금 달랐고 강현에게는 그 차이가 바로 모든 것이었다. 미안, 내가 앞에는 못 타겠다. 대화는 그가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은 뒤에야 시작되었다. 민혁은 지금까지 어디에서 뭘 했냐고 물었고 강현은 그냥, 이라고 말했다.
"그냥 여러 가지 했어. 이제 돈 많아. 사십억쯤 덜 되게 있어. 코인으로. 은행 빚은 다 갚을 수 있는데 계좌에 압류 걸려 있으니까 이거부터 해결해야 돼."
"정말로, 도대체, 어디서 뭐 하다 온 거야?"
"필리핀 말라떼에서 살인청부업자 노릇 하다가 왔다."
"진짜야?"
"농담이야. 예전에 찾아봤는데 사람 목숨 별로 안 비싸. 저기 물가 싼 데 가면 백 아래로 되고 한국에서도 삼사천이면 하나 죽인다더라."
"이것도 농담이지?"
"이건 진담."
강현은 낄낄 웃었고 민혁은 더 묻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말할 필요 없는 낱말들이 입속에 쌓였다. 이 우주조차 아닌 곳에서 요정이랑 신을 망치로 때려죽이면 그만큼을 받는다고, 원래는 15억이었는데 연봉 협상을 잘 해서 두어 배가 됐다고, 그런데 자신이 제대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그래도 돈은 받았으며 여기는 지구니까 됐을 거라고.
강현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는 37억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무작위한 문자 배열만큼이나 허망하고 이상하게 들렸고, 홀가분한 느낌조차 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이스트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