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보라색 밤 (5)
남자는 난간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며칠에 걸쳐 도시를 둘러보았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거센 환호성으로, 그리고 정적으로 변하는 것까지도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보라색 빛이 비쳐드는 호수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거울처럼 매끄러웠고 저 멀리에,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의 형상은 고색창연한 판화 같았다.
남자는 소리 내어 웃고서는 탁자 한가운데에 놓인 유리병을 쥐어 들었다. 마개로 막힌 병 안에는 온도 없는 불꽃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장난감을 다루듯이, 불꽃을 기울여 보던 남자는 문득 유리 너머에 익숙한 형상이 나타난 것을 깨닫고는 병을 내려놓았다. 초점 없는 보라색 눈이 테라스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벤트레스!"
"꽤 오랜만이군 그래.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이것까지 본 모양이지?"
"그럼, 다 알고 있었다고. 얼간이들은 안 믿었지만."
"난 널 의심한 적은 없어. 아들 이야기도 진지하게 들어준 거 알잖아."
"그런 것까지 기억하다니 고마운데."
"고마울 것까지야. 그래서, 피송곳니 꼬마도 신의 반려가 되었나?"
"가출한 동안 줄곧 산맥 너머에서 지냈다지 뭐야. 어린 나이에 대단한 일을 했지."
"할 이야기가 많겠는데. 일단 올라오라고."
쉭겐의 말에 뜻밖의 손님은 무색 마력을 써서 몸을 띄워 올렸고, 테라스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제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은빛매 본가를 돌아다니며 술을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벤트레스가 술병과 잔 두 개를 양팔에 낀 채로 돌아와서는 쉭겐의 맞은편에 앉았다.
"도시 사람들을 한순간에 죽인 소감은 어떠신가?"
"잠깐만, 내가 한 게 아니야. 별들이 시킨 것이지. 정확히 어떤 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여기에 앉아서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되짚어보고 있었거든."
"은빛매의 자제분께서는 꽤나 뻔뻔하시군. 그래도 생각을 했다니 들어나 보자고. 명반이 뭐라 했기에 이러고 있는 거야?"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술잔을 쥔 손이 벤트레스에게로 불쑥 다가왔다. 따라 보라는 투였다. 벤트레스는 기꺼이 병을 기울였다. 쉭겐은 음미하듯 한 모금을 삼켰고, 홀가분한 듯 웃었다.
"몰라. 며칠 내내 점괘를 한 번도 안 봤어. 꼴을 보기도 싫어서 던져 버렸거든. 별들한테 휘둘리는 게 싫어서 이 일을 벌였는데 결국 졌단 말이지. 왜 졌는지까지 물어보면 그건 정말 용납할 수가 없을 것 같았어."
"아니, 내 생각엔 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용납이 안 되는 일 같은데. 별이고 자시고 간에 지금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자다가 평온하게 가긴 했지만 아무튼 죄다 저승행이란 말이야."
쉭겐은 벤트레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잔에 남아 있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네가 상식인처럼 떠들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져."
"누차 말했다시피 난 야스와다에서 제일가는 지성인이야. 비록 여럿이랑 자고 다니고, 남의 숲에서 뒹굴고, 약과 술에 찌들어 지내고, 너 같은 놈과 친구긴 해도 정신은 아주 멀쩡하다는 거지."
"정신이 멀쩡하면 그런 짓은 안 해."
"나도 숨 돌릴 구석은 있어야지. 어쨌건 도시 전체를 제물로 바친 녀석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흙탕물과 구정물을 비교하고 있군."
"당연히 비교해야지. 흙탕물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진흙이 밑으로 가라앉거든. 위에 남은 물은 깨끗해지고."
벤트레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묶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겼다.
"아무튼 잔소리를 하러 온 건 아니니까 여기서 접자고.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별이 뜨고서도 잠이 안 와서 한참을 서성였지. 그런데 갑자기 새벽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걸 보니 정신이 확 들지 뭐야. 잠든 사람들은 다들 먼지로 변해서 사라지고. 그런데 나는 결말을 볼 때까진 살아있기로 대모님과 약속했단 말이야. 어떻게든 깨어 있어야 했지. 그래서―"
쉭겐은 엄지와 검지로 유리병의 병목을 쥐고서는 가볍게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불꽃이 확 튀어 오르듯 부풀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따로 배운 게 많거든. 아주 오래된 마법이야.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부터 있던 거지. 마개를 열기 전까지는 영혼이 흩어지지 않아."
"반신들이 알려준 모양이군."
"정확히는 대모님께서 배워 가르치셨지. 말 잘 했어. 이제 다 끝났으니까 서로 솔직해지자고."
이 순간은 벤트레스가 수십 해 전부터 고대해온 것이기도 했다. 야스와다를 뒤덮은 보라색 하늘을 본 날부터. 그리고 쉭겐과 함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았을 때부터. 쉭겐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고 벤트레스가 그 뒤를 이었다. 나우파나에 보내졌다가 카스바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것. 사촌동생에 대한 것. 환각. 다시 돌아간 폐허에서 화신 일행과 만난 것. 그리고 저승의 일까지.
"아하, 늑대가 바로 지고하신 분인 모양이군. 이제 보니 거기에서부터 계획이 엇나간 모양인데. 반신들께서도 저승에 대한 건 잘 몰랐거든. 정말로 신이었던 적도 없었고. 잠깐만, 그래―자미성의 위치가 변한 게 이것 때문인가? 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지고하신 분께서 이걸 원하셨기 때문에? 비록 깨어나진 못할지라도?"
"별점술은 잘 몰라. 하지만 자미성이 바로 그분의 뜻을 보여준다면, 아마도 그렇겠지. 나는 내가 겪은 일들이 우연은 아니었다고 믿어. 그게 우연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내가 폐허에서 미치고 카스바에 떨어졌던 건 운명의 안배였던 거야. 이 땅의 주인이 나를 그 역할로 점찍었기 때문에. 사촌동생의 목을 조르고 나트람에게 그 말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게 사실이라면 지고하신 분은 나보다도 더 사악한 존재일 것 같은데. 그런 역할을 맡기려고 널 그렇게나 괴롭혔으니 말이야. 생각해 보라고, 일꾼한테 줘야 하는 건 곡식 한 포대지 채찍질이 아니야."
"고통을 받았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것보단 낫지."
"내 말의 요지는 네가 억지로 의미부여를 해 가면서 위안을 받으려 한다는 거야―좋아, 지고하신 분께서 널 선택했다는 것까진 인정하겠어. 그게 우연이든 의도든 간에 말이야.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고통은 고통이야.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게 심보가 고약하단 것이지."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우러름을 받기 위해 있는 것 같던가?"
"아니지."
"세상이 어디 모두에게 선하고 옳고 좋은 적이 있었나?"
"그것도 아니지."
"그래, 가끔은 좋고 가끔은 고약한 게 세상이지. 그런 존재가 고약한 짓을 하는데 뭐가 문제야?"
쉭겐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젠장, 노예도 안 할 소리를 지껄이는군.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별들이든 지고하신 분이든 간에, 누군가한테 휘둘리는 삶이 어디 좋은 거냔 말이야. 명반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저 위에 있는 것들이 우릴 내려다보면서 가지고 노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거든."
"그런 이유로 사람을 다 죽이는 것도 잘 하는 짓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죽진 않았어. 다른 형태가 된 거야. 고통이나 슬픔도 없다고. 사람들에게는 이게 훨씬 나을 거라고 장담하지."
"아무튼."
벤트레스는 심드렁한 어조로 일축했다. 쉭겐은 두 잔을 내리 부어넣고서는 대뜸 늑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까는 꿈을 다시 만든다느니 했던 것 같은데."
"바단의 새 주인께서 그걸 원하시더군. 우리 아우님도 세상 따위야 무너져도 된다는 쪽이었고 말이야. 나야 입맛이 쓰긴 하지만, 뭐, 요정 한 명 주제에 어쩌겠나. 땅이 계속되면 계속되는 대로 사는 거고 아니면 아닌 대로 받아들여야지. 물론 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제대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네 노예근성이야 그렇다 치고, 꿈을 다시 만든다 해 보자고. 그게 대모님과 내가 한 일과 뭐가 얼마나 다르단 거야? 저 높으신 분들이 우리를 짚으로 만든 개처럼 본다면 우리가 그래선 안 될 이유는 또 뭐지?"
"아이가 부모의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칼린카가 의회에 드나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 이유뿐인가?"
"충분하지 않아?"
벤트레스는 능청스레 반문하고서는 긴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내가 세상을 휘두를 수는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대신, 세상을 돕는다고 믿기로 한 거야. 환각 중에는 먼 미래도 있었거든. 아주 좋은 곳이었지. 인간도 요정도 아닌 사람들이 다함께 어울려 지내고, 그리고… 결국 믿음이지. 드문드문 보이는 환각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다 보면 그 미래로 향하는 길까지도 보일 거라는 믿음. 내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믿음. 그런 거."
"믿음이야 자유라지만 너무 순진한 거 아닌가? 보라고, 꿈이 당장 무너지면 그 미래도 없어. 최소한 이 세계에서는 없지. 널 장기말로 쓰기 위해 그런 걸 보여줬을 뿐이라는 데에 걸고 싶은데."
"그래서?"
"자기위안이 아니냐는 거야."
"아니,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생각해 보라고. 난 아주 오래전부터 이걸 봤단 말이야. 너와 대모님이 잠든 분을 깨우고 단검을 하나로 붙인 것까지도 결국엔 세상의 뜻을 충실히 따른 결과라는 거지. 내가 세상을 돕는다고 믿었던 것처럼, 넌 네가 반역하고 있다고 믿은 거야. 그게 다야. 그래서 난 성공했고 넌 실패자가 된 거야."
쉭겐은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영혼이 담긴 유리병을 가볍게 쥐어 들었다. 질문이 이어졌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지? 그것도 보았나?"
"같이 일어나서 회당 쪽으로 걸어갈 거야. 마법은 쓰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하는 거지. 지금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면 보라색 하늘이 사라질 때쯤에 회당에 도착할 수 있어. 저승의 청지기에게 인사를 올리고, 그리고―"
"좋아, 그러면 나는 버릇없는 칼린카나 되어 보지!"
말릴 틈도 없이 쉭겐은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젖혔다. 벤트레스는 놀라움과 감탄과 묘한 수긍이 뒤섞인 표정으로 친우의 몸이 흐려지며 마력 안개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깨져 나가더니 요정의 형체는 허공에 스며들어 보랏빛 하늘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팔을 뻗어 쉭겐이 있던 곳의 공기를 움켜쥐었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 그래. 내가 본 건 이게 아니었는데……."
벤트레스는 홀로 테라스에 앉아, 남은 술을 홀짝거리며 직전의 상황을 여러 방면으로 곱씹어 보았다. 그러고 보면 다른 환영에도 긴가민가한 부분이 있었다. 그가 보았던 바로는 네르갈과 딤 나겔과 엘드리그는 별불꽃 장원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수레를 타고 회당으로 가야만 했다. 벤트레스는 쉭겐이 죽음을 택하고 그들이 응접실에 머무르는 순간들이 세계의 흐름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질문은 남았다. 어떤 선견들이 거짓이었다면 아주 먼 미래에 대한 것도 그럴까? 유순한 노예를 마련하기 위해 세상이 거짓말을 속삭였다고?
그럼에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벤트레스는 의지와 결단으로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지금도 다를 바는 없었다. 그는 이조차도 큰 뜻의 일부일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간에 쉭겐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잔을 비웠다.
이상한 색채가 걷혀 가면서 발밑에도 그림자가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