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보라색 밤 (4)
회당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레를 타야만 했다. 별불꽃 장원을 나와 근처의 평민 거주구를 지날 무렵부터 나뭇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가지들은 점차 빼곡해졌지만 세상은 여전히 화창한 보라색이기만 했다. 그림자도 어둠도 없이.
강현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터에 묘사된 나무의 모습과 이곳의 풍경을 대조해 보았다. 비명이 들리지 않는 건 단검이 맞붙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살아 있는 사람들과 영혼이 되어 스며든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 것뿐일까. 회당에 도착할 때까지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육각형의 건물은 이제 거대한 나무의 밑동으로 변해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뿌리 사이로 별실의 입구가 언뜻 드러났다. 솔로틀이 먼저 별실에 들어섰고, 딤 나겔과 네르갈이 그 뒤를 따랐고, 강현이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실에는 거대한 표범이 눈을 감고는 웅크려 있었다. 저승의 청지기는 딤 나겔이 도시의 주인에게, 혹은 자신의 사촌형제에게 인사를 남길 시간을 남겨 주었다.
노인이 조용한 기도를 올리는 동안 네르갈은 멀찍이 물러나 침묵을 지켰다. 솔로틀이 표범을 살피고는 심장에 빈 곳이 있다고 말할 때에도, 딤 나겔과 검은 머리를 한 인간이 상의를 마치고는 다시 수레에 올라탈 때에도, 거기에 동석해서 피송곳니 장원으로 향할 때까지도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고만 있었다.
* * *
소년은 꽃밭 한가운데에 누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 하나만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것은 지난 생의 일이었던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노인이 꽃무리를 헤치고 다가와 소년의 곁에 앉았다. 소년은 고개를 살짝 틀어, 반쯤 뜬 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왔구나."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어. 널 데려가기 위해 온 것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노인은 저승과 늑대에 대해, 단검에 대해, 이시 타브의 심장에 대해 말했다. 유령 심장을 무사히 떼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심장을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이 꿈이 계속될지 오늘을 끝으로 막을 내릴지는 모르겠으니 자신은 능력이 닿는 일을 할 뿐이라고도. 소년은 실망한 듯 입을 열었다.
"거창한 문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한 번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사소한 것들도 마찬가지야. 그냥 나랑 잠깐만 이야기해 줘. 예전에는 자주 그랬잖아. 예전에는."
자그마한 손이 노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때는 네가 딸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가능했다고, 그러니 그건 예전 일일 뿐이라고 답할 수 있었던 시간조차 예전이 되었고 노인은 다시 원점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 무엇도 실패거나 성공이 아니었던 시절을.
"나는 좋은 형제도 아니었고, 좋은 반려도 아니었고,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어. 끔찍하기만 했지. 내가 말한 대로야. 나는 실패했어… 너는 여기에서 날 죽여야 했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래, 하지만 난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똑같이 할 거야. 그리고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네게는 이렇게 되지 않을 기회가 그 후에도 더 있었어. 그건 네 고통이기만 했던 게 아니라 내 기회였고 도시 전체의 책임이었지. 그리고 우리는 실패했어."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물론 그 모든 죄는 네 몫이겠지. 하지만 죄인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그만 잊어버리는 건 편리한 만큼 비겁한 선택일 거야."
"비겁하다니. 나는 네 칼린카를 죽였는데. 딸도."
"이건 네게 변명을 안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네 친족이 아니라 도시의 일원으로서 하는 말이야. 누군가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하니까. 사사로운 용서나 친절이나 의회의 단죄만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다룰 수 없으니까."
소년은 몸을 일으켜 앉았고, 노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니야. 이젠 됐어. 제발 내가 태어날 가치가 없었다고 말해."
"그런 태도는 널 태풍과 같은 사건으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막아내야만 하는 재해로 만들 뿐이야. 그건 네 죄를 없애는 일이자 사람의 역할을 내버리는 일이기도 해.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네 삶은 끝났지만 너와 같은 아이들은 이 꿈이 이어지는 한 계속 태어나겠지. 인간들 사이에서조차도.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한 도움을 받는 아이가 있으면 고통 속에서만 자라는 아이가 있을 테고."
문장이 더해질수록 소년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을 감싸 안거나 용서하거나 정죄하거나 처벌하는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다만 소년이 대화를 원했으므로 한때의 실패와 그 후에도 남은 최선을, 세상의 주인이 아닐지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차례대로 읊을 뿐이었다.
"나는 가능성을, 가능성들을 믿어. 무모한 선의에 기대지 않을 방법이 있을 거야. 도시 전체가 자연스럽게 그 아이들을 감싸 안을 방법이. 그 아이들을 행복하고 좋은 사람으로 길러낼 방법이……."
"그만 해! 듣고 싶지 않아! 차라리 화를 내!"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어."
노인은 충분히 부드러운 어조로, 하지만 뜻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 단호하게 답했다. 그 문장은 진심 어린 연민이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철저한 의지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윽고 소년은 풀죽은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제사장 직분을 받들고 의회에 들어간 건 내가 아니었어. 무언가 다른 거였어. 나는 그날 이후로 반쯤은 죽어 있었어. 내가 원래는 뭐였는지 잊어버린 채 남들을 따라 살았지. 그 아이들도 그렇게 될 거야. 행복해지는 만큼 죽는 거야. 만약 행복을 배우지 못해도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런지도 모르지."
"너희는 결국 우리를 죽일 거야."
"그래."
"불공평해."
딤 나겔은 입을 다물고는 나트람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는 그런 식으로밖에는 넘기지 못할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비록 그것이 상대에게는 어떤 해결책조차 되지 못할지라도. 침묵 속에 체념이 부풀었고 소년의 목소리가 노인의 품 속에서 웅얼거렸다.
"이젠 됐어. 날 죽여줘."
* * *
네르갈은 꽃밭으로부터 쉰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강현도 그 근처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각각의 위치를 점으로 삼아 삼각형을 작도했다. 딤 나겔과 나트람, 네르갈,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이방인. 삐뚤어진 예각삼각형이 나오더니 삼각형에서 한 꼭지점만을 빼면 곧은 직선으로 변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우스워졌다.
강현은 한동안 머릿속의 도화지에 여러 점을 놓아 보았다. 그 각각은 러스터나, 메기도나, 사이라크나, 나트람의 반려나, 그가 모르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붙인 채 여러 모양을 그렸고 거기에는 당연하게도 강현의 자리가 없었다. 프로파나티카와 아니스의 일이 자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일어났던 것처럼 이것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찾는 대신 다른 궤에서 맴도는 의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프로파나티카와 나트람의 삶은 얼마나 다른 걸까. 둘 다 평생토록 자신이 아닌 것에 갇혀 고통받은 건 마찬가지인데.
프로파나티카의 황자 직분이 선택이 아니었던 것처럼 나트람도 자신의 본성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둘은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나서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들에 매달렸다. 나트람은 동생을 끔찍하게 괴롭히고는 신관들까지 미궁에 내버렸다지만 프로파나티카도 도시 전체를 내던졌으니 엇비슷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국 자신을 되찾으려면, 안식을 얻으려면 주어진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있었다. 프로파나티카가 억울함을 토로하면 연민을 얻겠지만 나트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 비웃음만이 돌아오리라는 차이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런 상황은 우습고 같잖았다. 볼로디아가 새로 만들 세계라면 몰라도 지금의 땅에는 나트람의 자리가 없었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에조차도.
그를 태어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했고 마음껏 동정을 베풀 수도 없었다. 강현도 알았다. 그렇다면 프로파나티카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나트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사람의 판단을 가르게 되는 걸까.
강현은 거기까지 생각했지만 결론은 보류했다. 일상에서 벗어난 순간을, 특히 파국을 마주하면 갑자기 무대 밖의 평론가가 되어서 점수를 매기거나 얼개를 지적하려 드는 것은 인간의 나쁜 습관 중 하나일 것이다. 대사와 지문만으로는 결코 알지 못할 것들이 있는데도. 물론 누군가는 정말로 평론가 명함을 달고 다니며 그 일을 업으로 삼는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필요하다. 하지만 강현은 자신이 그 누군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저 노친네도 어지간히 미쳤군. 나였더라면 뺨부터 후려갈겼을 거야. 아니지, 처음 칼린카를 죽였을 때 그래 줬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형처럼 울기만 하는 사람으로 자랐을지도 모르지."
"친척 어른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남의 집안일에 상관하지 마. 오늘 처음 본 주제에."
강현은 대꾸하는 대신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궐련의 쓴맛이 딱 알맞았다. 너무 늦게 도착한 과거 한 조각이 두터운 연기 너머로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네르갈이 입을 열었다. 열망도 슬픔도 사라진 목소리는 어느 시간도 설명하지 못할 것처럼 낯설었으며 그래서인지 거슬리는 데가 없었다.
"나는 내가 당연히 신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여기에서 태어난 것처럼 여기에서 죽을 거라고 믿었지. 그 후에도 도시는 여전할 거라고. 아니었어. 화병에 꽂힌 잎사귀가 된 기분이야. 창가에 놓인 채 내가 자라난 나무가 베어져 넘어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거지. 같은 가지에서 자랐던 잎사귀들은 떨어져서 짓밟히는 중이고."
"그래."
"늙은이들은 서른 해쯤 뒤에는 죽을 거야. 그러면 나는 정말로 혼자가 되겠지. 여기에서 홀로 살아남는 거야. 벌써부터 유령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엄마가 내 머릿속에서 울어. 형이랑 누나도. 하인들도. 장원 사람들도. 그 지긋지긋한 검정색 칼린카들도. 그래서 영영 이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나는 결국 여기에서 죽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십 년이 흐르고 백 년이 흐른 뒤에라도. 여기가 완전히 황무지로 변해 버린 뒤에라도."
네르갈은 거기까지 말한 다음 강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대답을 바라는 투였다. 그는 소년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면서 질문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몰라.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니까."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누워서 잠만 자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 거야. 깨어난 것도 내 뜻은 아니었어. 그런데 도대체 뭘 결정할 수 있다는 거야?"
"네 마음을."
"그것뿐이야?"
"사실은 그것조차 아니겠지."
마음에도 정답이 있다. 땅의 형상이, 그리고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정답을 빚는다. 정답에서 벗어나면 병자가 된다. 사람은 병자를 고친다. 그들 자신을 위해, 병든 이를 위해, 모두의 좋음을 위해. 치유되지 못한 이들은 격리되어 잊히고 치유된 사람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비웃거나 부끄러워한다. 그렇게 병든 이 자체는 동떨어진 채로만 남는다.
강현은 그런 일들이 꿈이 다시 시작되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공포일 거라고 느꼈다. 그에 비하면 정답으로 태어나 정답으로 죽는 삶은 실로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대로만 계속될 수 있는 세계는. 그러나 어쩌면,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마저도 은혜인지 모른다. 그는 오답으로만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이 서른네 해를 보낸 땅을 생각했다…….
강현은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개의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언제나 관대하며 온유했던 쪽과 사납고 끔찍한 채로 끝난 쪽이었다. 그는 앞선 쪽이 후자를 너그러움으로 죽이는 것을 보았다. 딤 나겔의 주름진 손이 나트람의 목을 움켜쥐더니 망설임 없이 비틀었다. 이제 노인의 품에 안긴 것은 소년이 아니라 축 늘어진 검은 칼린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