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보라색 밤 (1)
이곳은 별불꽃 장원의 본가. 아버지는 황무지에서 죽었고 형과 누나도 죽었다. 남은 것은 엄마뿐이다. 친척들은 싫다. 방계 사람들은 마력 지맥과 땅에만 관심이 많고 하인들 걱정은 하지 않는다. 피송곳니 사람들도. 침대에 눕기 전에 딤 나겔을 보았는데.
생각이 미지근하게 섞였다. 소년은 그 생각들이 서로 뭉치고 나뉘며 어슴푸레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대오를 이루어 어디론가 갔다. 슬프게 울고 외치는 소리가 났다. 어디 가는 거야? 따라가려 했지만 밧줄 같은 게 발을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멈추어서 괜찮으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괜찮다. 이런 것으로 엉엉 울 나이는 아니니까.
소년은 가만히 서서 인파가 향하는 곳을 보았다. 저 멀리에서 보랏빛 아지랑이가 일어 오며 암흑을 덮치고 있었다. 사람은 거기에 닿는 순간 몸을 잃고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되었다. 혼령들. 아지랑이는 혼령과 함께 부풀어 간다. 그러면서 비탄의 외침은 환희가 되었다가 침묵으로 변한다. 소년은 보라색의 서늘한 맛을 느끼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긴 시간이 흘러 아지랑이가 발끝까지 다가와 스멀거린다…….
바로 다음 순간 발목을 붙들고 있던 밧줄이 소년을 휙 끌어당겼다. 소년은 무너지는 암흑 속에서 검은 칼린카의 눈을 보았다. 울먹이는 듯 축축한 눈동자. 달고 뜨거운 공기. 붉은 꽃이 우거지는 들판. 감각이 분리되었고 그는 익숙한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이불 속은 아늑한 온기로 데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상쾌한 공기가 와 닿았다. 너무 메마르지도 습하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네르갈은 훌륭한 하루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다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서른 해가 약간 넘는 삶을 살았고 그러는 동안 훌륭한 날이라는 것은 한 번도 겪지 못했다. 다른 게 완벽하면 어디에선가는 끔찍한 문제가 생겼다. 오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창문에 색유리를 덧댄 것처럼 창밖도 방도 온통 보라색이었다. 깊은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의 시야는 이런 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직도 꿈인 걸까.
소년은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겨우 인기척을 깨달았다. 기다란 은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묶은 여자가 침대 바로 곁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충분히 큰데도 드리우는 그림자가 없었다. 침대 위에도. 혹은 몸의 뒤편에도. 네르갈은 자신의 팔 또한 아무런 그늘을 만들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혀가 중얼거리는 말을 뱉었다. 꿈이겠구나. 하지만 꿈에 잠겨 있을 때는 자각조차 없기 마련인데 이상하기만 했다. 그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동안 여자는 밖으로 나가 노인들과 함께 되돌아왔다. 둘 다 아는 얼굴이었다.
"러스터."
네르갈이 부르자 오른편에 선 노인의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림자가 들지 않는 탓에 그런 표정마저도 낯설었다. 완성된 그림 위에 따로 놓인 종이인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일어나시지요.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 어디로 간다는 거야?"
"인간들의 도시로요. 야스와다는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이곳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복잡하니 자리를 옮겨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러스터의 말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해한 다음에도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몰랐다. 네르갈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망설이면서, 두려움과 의구심을 담아 물었다.
"왜?"
러스터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은발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다시 보자 이목구비가 어딘가 익숙했다. 어둠달 배신자 놈도 머리카락이 저런 색이었던가. 생각은 마른 손가락에 가로막혔고 네르갈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동자 너머의 암흑에서 녹색 불길이 이글거렸다.
불꽃이 크기를 키울 때마다 알아야 하는 것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승의 청지기와 그 정원사들. 은빛매의 주인. 나우파나의 단검 조각. 영혼을 거두는 나무. 늑대의 이름. 그리고… 네르갈은 갑작스럽게도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냉기는 끓어오르는 물에 손을 담갔을 때 느끼는 서늘함과 동일했다.
소년은 일어났고, 자신을 붙드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확인할 게 있었다. 그는 본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풀이했다. 해가 뜬 다음을 위해 정돈된 부엌. 평소에는 하인 네댓이 여기에서 잡일을 보고 식사를 준비한다. 곡식 푸대는 충분히 채워져 있고 채소도 갓 수확한 듯 싱싱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휴게실로 쓰이는, 중간 크기의 방. 시간이 빌 때 하인들은 이곳에 모여 별 놀이를 하거나 단 음료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곤 한다. 놀이패들은 잘 정리되어 있고 주전자도 제 자리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다.
그는 본관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렀다. 새파란 잎사귀들이 보라색 하늘 아래에서 생경한 빛을 띠고 있었다. 새벽 호수 위의 물안개처럼 스멀거리는 아지랑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허공은 소리로 포화 상태를 이룬 듯했다. 네르갈은 더 많은 곳을 살펴보았고 하인 숙소도 보았다. 잠금쇠들은 무색 마력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부서졌다. 사람만이 증발해 사라진 듯한 잠의 흔적들.
네 번째 문을 부쉈을 때에야 무언가가 보였다. 젊은 하인이 옅은 안개에 감싸인 채 누워 있었다. 네르갈은 그녀를 깨우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손가락은 살을 통과해 나아갔다. 그 지점에서부터 하인의 몸이 출렁거리듯 흔들리더니 빠르게 공중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네르갈은 급히 등을 돌려 달아났다.
바깥으로 나온 소년은 재차 자신의 발치를 보았다. 그림자는 어느 방향에도 없었다. 없다. 그 지긋지긋한 칼린카들도. 짜증스럽게 우는 새들도. 더위도. 온도는 세심한 정원사가 관리하는 실내 정원처럼 완벽히 조율되어 있었고 잎사귀만이 한여름 특유의 싱그러움을 발했다. 낯선 감각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마치 서로 다른 그림에서 고요하고 빛나는 부분만을 잘라내 짜맞춘 순간 같다. 그러면 나는 어느 그림에서 왔지? 여긴 어디지?
네르갈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결국 자신에게 남은 곳은 하나뿐이었다. 가야 했다. 그는 시끄러운 정적 속에서 본관으로 내달렸다. 가는 길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모서리를 돌아 계단을 올라간 다음 문 두 개를 지나면 안식처가 있다. 가주의 반려가 쉬기에는 너무 초라하지만 별불꽃 장원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안온한 곳이. 하지만 문을 열어 젖힐 엄두는 나지 않았고 소년은 굳은 듯 서 있기만 했다. 어느 순간 주름진 손이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피송곳니의 노인이었다.
"들어가 보거라."
네르갈은 벌써부터 자신이 울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가야 했다. 그는 하인 숙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없는 방을 마주했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노인들은 문간에 서서 소년이 눈물을 모두 쏟아내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네르갈은 소매로 눈가를 쓱 닦고는 돌아섰다.
"왜 울지 않아? 다들 그렇게 가만히 있는 이유가 뭐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러스터는 침묵을 지켰다. 딤 나겔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어. 모두 사라졌어. 상황이 아무리 나쁘게 돌아가도 인간들이랑 싸우는 게 고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상상한 적도 없어. 그 며칠만에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이 다음엔 도시가 모두 저승으로 사라질 거라고.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이렇게 갑자기."
"우리는 늙었다. 삶이라는 게 얼마나 갑작스럽고 끔찍한 것인지 어렴풋이 깨달을 나이지. 기대한 바가 적으니 놀라고 슬퍼할 이유도 적을 뿐이야."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네르갈은 멍하니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굳은 얼굴에 잠깐 무망한 기색이 어렸다.
"얘야, 나는 지쳤어.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쳐 있었지. 그래서 괴로움이나 미움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야. 그 대신 해야 하는 일만을, 할 수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살아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이제 피송곳니 장원의 사람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하지만 너만큼은 살릴 수 있어……."
소년은 딤 나겔이 도시의 중재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노인은 사나운 아이들과 마음 여린 청년들을 한참은 더 많이 보았을 것이고 가끔은 더 나이든 사람들끼리의 문제도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 덕분에 야스와다는 조금이나마 더 좋은 곳이 되었을 테고, 그리고, 이제는 그가 이뤄온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라니. 성격 나쁜 요정 꼬마 하나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기에. 바로 며칠 전에는 단검을 던지기까지 했는데. 네르갈은 뒤엉킨 생각을 그대로 쏟아냈다.
"모르겠어. 나는 아직 성인식도 안 치렀어. 신이란 게 어떤 것들인지도, 성물이 뭔지도,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안 궁금해. 인간들이랑 싸운다 치면 그놈들을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하는 게 다란 말이야. 그거 말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이 도시가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싫어. 난 그냥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엄마랑 이야기하고 마법 연습도 하다가 자고 싶어. 가끔은 시내에 나가서 다른 요정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작은 기념품이라도 사 오면 엄마가 아주 좋아했는데. 사실은 집안에 돌아다니는 칼린카들도 쓰다듬어 보고 싶었어. 그리고 신관이 되면 다른 가문의 요정들이랑도 친해지고 싶었어. 하인들한테도 잘 해 주고. 그러려고 했어. 그러려고 했는데. 그래서 눈물이 난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은."
그리고 입속이 텅 비었다. 네르갈은 아, 아 하는 소리를 내뱉다가 몇 걸음을 그대로 걸어 러스터의 품에 쓰러지듯이 기댔다. 늙은 하인의 팔이 그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도착하기까지 얼마가 남았느니, 어디로 가야 한다느니 하는 사무적인 목소리들이 귀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윙윙 울렸다. 느낄 수 있는 것은 주름진 손의 온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