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Delenda est (4)
파울리스의 설명은 간략했고 잠도 그만큼 짧았다. 깨어난 강현은 해가 아직 높이 떠오른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볼로디아는 여전히 머틀의 기록물을 읽는 중이었다. 그는 매번 세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인 일이라는 말로 운을 뗐다. 생쥐들의 기술력이, 그러니까 시뮬레이터를 만든 방법이 도움이 될 거라고도.
"꿈 조각이 하나 있다면 작은 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생쥐들이 이스트리아를 놀이판으로 만들어 다른 세계에 퍼뜨린 것처럼요. 거기에서, 여러 조건을 넣고 빼 가면서 연습을 하는 겁니다. 세계를 다시 쌓는 건 결론이 난 뒤의 일로 미루고요. 파울리스도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전적으로 협조할 거라더군요……."
"이건 꽤 그럴듯한 제안이군. 헌데 그 경우에는 이 땅의 시간을 멈춰 두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지고하신 분께서 깨어 있는 동안, 그 앞에서 모의실험을 하는 거요. 훨씬 공정한 데다가 고통의 총량까지 줄일 수 있지."
태연한 반론에 강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볼로디아가 어떻게 반응하건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고 수십 번을 속으로 중얼거렸는데도 그랬다. 늑대 신은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야 시간을 멈추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당신네가 그걸 절실히 원한다면 양보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최소한 천 년쯤은. 다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오."
"제 반응을 보고 싶으셨던 겁니까?"
"그렇지. 속내를 떠본 점은 미안하오. 헌데 줄곧 의아했던 점이 있어서, 그 부분을 확실히 하고 싶었소."
"말씀해 보시죠."
"당신의 관심은 좋음이나 옳음보다는 그저 이 세계를 지켜내는 것 자체에 있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소?"
"아마 그렇겠지요."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소?"
강현은 잠시 망설였다. 대답을 준비하지 않은 까닭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그는 막연한 거부감을 걷어낸 다음엔 연민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저는 그냥… 제가 아는 사람들이 실망하는 순간을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벨레다가 로야페타에 지을 5층짜리 건물이나, 유령 노인의 학장 자리나, 학자들의 논문이 흔적도 없이 잊힐 거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꿈을 다시 만들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수명을 잃기 마련이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조차도 언젠가는 소재를 찾아 헤매는 소설가나 겨우 관심을 가질 물건으로 전락하겠지."
강현은 머틀의 기록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게 여러모로 가치 있는 글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영원히, 중요하게 기억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세계가 지금 상태를 유지할지라도 그랬다. 강현은 21세기의 사람들이 폼페이 시민을 엎드린 화산재 덩어리로만 기억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폼페이는 한때 문명의 중심지였는데도 그랬다.
봉쇄 이후의 타마기스는 이스트리아의 역사에서는 부록 같은 곳인데다가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니 머틀의 기록물도 서가 한 구석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건 죽은 이들에게는 비극이겠지만 나머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과거를 공평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역할은 도서관에 맡겨 두고, 쌓인 시간 위에 다시 무언가를 덧대는 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니까.
물론 그는 역사의 곁가지에만 머무르다가 시간에 휩쓸린 도시들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알고 있었다. 머틀은 그런 부류에게는 신만큼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들의 헌신은 어떤 의미인 걸까. 모든 분야에는 각각의 이유가 있겠지만 전기전자공학부를 졸업한 공학도로서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세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앎의 지평을 넓힌다는, 식상한 정론뿐이었다.
그는 정론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압니다. 저도 알고 그 사람들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덧없는 것들이 세상 안에서만큼은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서, 우리의 현재가 미래의 기틀이 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건 어쩌면 광기일지도 모릅니다. 광기여도 좋습니다. 삶을 몸바쳐 사랑하기 위해서는, 소소한 만족감 이상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분명히 몽혼약에 찌든 세계는 긍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장난기 어린 문장일지라도 그 말을 농담으로 넘기기는 어려웠다. 시험 점수를 위해,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ADHD약을 오용하는 강남의 고등학생들. 누운 채 몽상만을 더듬어가는 시체들. 열망을 추진력으로 삼아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로 도약하는 야심가들. 강현은 그게 얼마나 다르고 왜 다른지 정론을 읊을 수 있었지만 결국엔 익숙한 가치체계 아래 쌓인 논리에 불과했다. 또다시 벽이었다. 상상하지 못하는 것들의 벽. 다행히도 볼로디아는 그 주제에만 머무르지는 않았다.
"물론 당신이 말한 종류의 열망과 몽혼약이 주는 쾌락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싶진 않소. 어쨌건 나도 이 땅에서 평생을 보냈으니 말이오. 하지만 거기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낭만주의에 불과할 거요. 당신이 말한 대로 광기를 과대평가하는 일이거나."
"과대평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정말로 그런 것 때문에 살고 죽으니까요. 그리고 가끔, 그건 스스로를 연마하는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은 달리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입니다. 이 순간과는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몇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 자신을 이뤄 온 것들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잡한 가능성들을 열어젖힙니다… 이건 분명히 더욱 정교한 종류의 쾌락일 겁니다."
"가능성이라―어떤 사람은 그런 걸 추구하면서 땅의 일각을 바꾸기도 하오. 지난 천 년간의 역사에도 그런 면모가 있었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세계 자체를 뜯어고칠 힘이 있소.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수레를 내버려두고 맨발로 걷는 것은 미련일 뿐이오."
"한 명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부정할 마음은 없소. 하지만 큰 수를 다룰수록 우리는 실용주의자가 되오. 현실정치라고 해도 좋을 거요. 나는 역작을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남은 사상가보다는 제때 치유사를 찾지 못해 죽은 흰둥이를 더 많이 보았소. 전자의 도야를 위해서 후자를 내버려두고 싶진 않소."
어원과 용법은 조금 다르겠지만 볼로디아에게서 현실정치라는 단어를 듣자니 놀라웠다. 놀라웠지만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서 철저한 환상은 철저한 현실이었다. 강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사람들, 벨레다나 헤이딘이나 요정 학자들은 사실 아주 특별한 이들이오. 로야페타의 상업 가문 또한 그렇지. 펠로시를 떠올려 보시오. 평범한 시민들은 소소한 만족감으로만 살아가고 자신의 흔적이 세상에 남으리라는 믿음은 떠올리지조차 않소. 그냥 자식을 낳고 손자를 보다가 죽는 거요. 가끔 맛있는 것을 먹고 악사의 연주를 들으면서. 좋은 연극에 감동도 받으면서. 그게 다요. 그 자기수양이나 열망의 논리는 다분히 계급적인 것이란 말이오. 물론 예외는 있지만, 그 경우를 일반으로 확장하는 건 기만에 불과할 거요."
"압니다. 그냥… 세상이 당장 무너지는 상황을 꺼리는 이유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아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요. 이게 충분한 반론이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
강현은 묻고 싶었다. 이 세계에서 좋음과 선함이라는 체계는 어떤 식으로 구분되지? 볼로디아는 무슨 의도로 좋은 사람, 이라는 어구를 골랐지? 거기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려는 행동은 과민반응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생각이 멈추지 않고 뻗어나갔다.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착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아낀다.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해를 끼치거나 기꺼이 타인을 죽이기도 한다. 우리가 아닌 것으로 합의된 이방인을. 야만족들을 수없이 도살한 로마 장군은 고향에서만큼은 좋은 배우자거나 아버지일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 보통 그런 것이다.
그는 좋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리고 철저히 선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불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런 엄격한 구분법 속에서 자신은 좋은 사람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다. 좋은 사람이지. 가까이 알고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노예 기술자였던 꼬마의 열정을 연민하는 게 도덕군자가 할 짓인가.
희생양으로 삼은 것들이 죄다 카스바 범죄자긴 했지만 벨레다는 어쨌거나 노예 기술자였고 사람도 많이 죽였다. 그리고 이제는 로야페타에 5층짜리 건물을 올릴 꿈이나 꾸고 있었다. 주차장은 최고급 수레로 채우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상업 가문의 반요정들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는 속물이었다. 그 세속적인 욕망을 자기수양의 논리로 변호하는 건 궤변에 가까운 농담일 것이다.
그래도 하고 싶었다. 벨레다는 불행한 삶을 겪다가 미친 꼬마였고 자신은 그런 꼬마를 보면 괜히 신경이 쓰이는 병이 있기 때문에 그랬다. 도덕이고 윤리고 간에 내가 그렇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강현은 기말고사 전날 밤새 술을 퍼먹고 시험지에 아무 말이나 적는 대학생의 심정으로 실실 웃었다. 이게 정말 웃을 일이 아닌데. 이제는 볼로디아의 목소리까지도 그냥 웃기게 들렸다.
"헌데 궁금한 게 하나 있소. 당신이 바라는 건 뭐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당신이 원하는 것 말이오. 돈을 벌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건 알고 있소. 그 다음의 계획을 말해 보라는 거요. 나는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거든. 주위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작별하기 전에,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소."
"빚을 갚아야 합니다. 친구들이 있어요."
"당신은?"
웃음이 뚝 멎었다. 자신의 문제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굳이 떠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수십억대의 돈이 걸려 있을지라도, 의무감이나 책임으로만 움직이는 건 보통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소소한 만족감과 위안을 나열해 보았다. 푹신한 침대와 목욕물. 술과 담배. 시간을 때울 만한 소설. 그럴듯한 마공학 무드등. 욕구는 될 수 있겠지만 욕망까지는 아닌 것들. 그리고 시가를 잎으로 잘게 나누어 천천히 씹는 일. 암흑.
암흑이 있었다. 강현은 그 암흑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