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Delenda est (3)
축제의 끝은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살점은 빠르게 말라붙어 먼지로 변했고, 이내 공중으로 스며들었다. 기계들도 동력을 잃고 분해되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귀를 쨍하게 울리던 소리는 물론이고 용의 그림자마저 사라졌다.
강현은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역효과뿐이었다. 새하얀 하늘은 시시하기만 했고 공기는 불쾌할 만큼 달아올라 있었다. 헤어짐의 여운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날씨였다. 눈이라도 쉬일 요량으로 눈꺼풀을 내리자마자 생각이 파리떼처럼 몰려왔다. 이 지긋지긋한 것들. 떨쳐낼 방법도 없이 주위를 맴도는 것들. 그는 별 수 없이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때 머틀이었던 원통은 표정을 잃고 낡아빠진 수납함으로 변해 있었다. 볼로디아는 근처의 기계 장치에 걸터앉은 채, 그가 수납함에 담아 두었던 글들을 읽는 중이었다. 그녀는 눈길을 알아채고서는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헤이딘을 반지 안으로 돌려 보내려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자가 훅 가까워지더니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꿈 하나를 무너뜨렸군. 충분한 연습이었소?"
빛을 등진 탓에 볼로디아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강현은 완고한 석상 같은 형체를 올려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또 다른 종이 묶음을 주워 들었다. 마지막 쪽의 묘사는 다이사트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끊겨 있었다. 그는 수십 장을 거슬러 올라 거기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교류 통로에 버려져 있을 때의 기억. 무덤 앞에서의 소란. 용을 타고 황궁으로 간 일. 황태자와의 만남. 대부분은 함께 겪었던 일이었지만 글줄로 다시 마주하자니 낯설었다.
"훌륭한 작품들이지."
짧은 독서를 마치자 볼로디아의 말이 미주처럼 이어졌다. 이번에는 바로 곁에 앉아 있었다.
"잘 썼더군요. 하지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말해 보자면… 이 글과 타마기스,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 남길 수 있다면 후자를 택하고 싶습니다. 황태자나 역병 늑대나 나팔 머리는 안타깝지만, 그리고 제가 모르는 일들도 더 많았겠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무너져야만 할 만큼 나쁜 곳이었던 것 같진 않습니다."
강현은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볼로디아의 표정을 살폈다. 흉터에 살짝 걸친 미소는 인자해 보이기도 했고 잔인해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문제에 한해서라면 두 감각은 서로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숨을 짧게 몰아쉬고서는 마저 말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금의 세계는, 그러니까 이스트리아 전체는 대장군님의 말씀대로 썩 좋은 곳은 아닙니다. 인간과 요정 사이의 미움을 봉합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테고, 노화와 질병의 고통이 있고, 굶주리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새로 만드는 건 좋은 해결책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두 번째 시도에도 실패한다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마찬가지로 다시 만들어야겠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소."
그 대답은 강현도 이미 아는 사실과 준칙들을 담고 있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넋은 소멸하는 대신 기억만이 씻긴 채 되돌아온다는 것. 이스트리아는 거대한 놀이터일 뿐이고 사람들의 소명은 행복과 즐거움이라는 것. 고통은 이따금 복잡하고 다양한 즐거움을 낳지만, 그렇다고 해서 겪지 않아도 되었을 고통을 일방적으로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만약 그게 정당화될 수 있다면 예술가와 철학자들을 납치해 고문실에 던져 넣어야 할 것이므로.
따라서 세계를 다시, 더 좋은 형태로 만들지 않을 이유는 마땅치 않았다. 새로운 놀이터를 세우느라 낡은 것이 철거되더라도 아이들은 여전히 살아가리라는 점에서 그랬다. 게다가 그들을 일부러 쫓아낼 필요조차 없었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리고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끔 한다면, 청지기가 일을 잠깐만 멈춘다면 인류는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경건한 환희와 비탄 속에서.
재생산권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강현은 금방 잊어버렸다. 지구에서나 들어먹힐 논의가 도대체 무슨 쓸모란 말인가. 탄생이 염색체의 결합인 세계와 신의 일인 세계는 같을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강현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따져볼 부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저는 대장군님께서 그 기준선을 어디에 두고 계시는지가 궁금합니다. 세계를 다시 쌓아야 할 만큼 나쁘다, 혹은 다시 쌓지 않아도 될 만큼 훌륭하다 하는 기준 말입니다. 행복의 방향도 고민해 보아야 할 테고요. 총량이 아니라 종류와 방향 말입니다. 전 모두가 몽혼약에 절어 사는 세계를 긍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일단, 내 주장의 핵심은 지금의 세계가 명백한 수준에서 개선될 수 있으리라는 거요. 노화나 굶주림, 질병처럼 일차적이고 직관적인 고통을 없애는 방식으로 말이지. 타마기스를 예로 들 수 있겠군. 당신도 보았으니 알겠지만 이곳은 바깥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땅은 아니었소. 제국의 역사만 아니었더라면 오히려 낙원이 되었겠지."
강현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육 광란을 끔찍한 순간으로 완성시킨 것은, 정원을 짓밟고 서가에 불을 지른 것은 부패의 저주가 아니라 원망과 원한이었다. 만약 황제가 윰 시밀을 찌르지 않았더라도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결국엔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는 반대로도 생각해 보았다. 이 땅이 처음부터 타마기스 같은 곳이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내키는 대로 몸을 갈아끼울 수 있고, 먹거나 잘 필요도 없고, 마음이 맞는 것들끼리 한 몸이 되어 돌아다닐 수 있는 곳에서는. 열망 어린 믿음과 광기의 구분이 희박한 곳에서는.
열망과 광기의 경계에는, 치료가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의 경계에는 여러 결이 있었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경제적인 결이. 그럼에도 그것들이 대개는 사람의 물성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놀라운 느낌마저 들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먹을거리를 구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실은 생물의 가장 원천적인 조건일 것이다. 지금조차도.
폐쇄병동에 감금되는 대신 길거리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는 돈을 벌 수 있는 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망상장애와 의부증. 긴장증과 강박증. 어떤 병은 사람에게서 일자리를 앗아가지만 어떤 병은 그런 경향이 덜하다. 그래서인지 정신병에서의 경중이란 개인의 고통보다도 생산성의 유무에, 그리고 공동체의 존속에 방점을 두고 평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점부터가 그럴 것이다. 인간의 도덕이 요정에게는 광중에 불과했던 것처럼.
타마기스는 그런 논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새로 생길 이스트리아도 그럴 것이다. 강현은 나트람이 그곳의 주민으로 태어난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혹은 나트람이 타마기스에 떨어지는 상황을. 야스와다에서의 삶보다는 분명 나을 테다. 그렇다면 나트람 같은 부류로만 이루어진 타마기스는 어떨까. 그것까지도 긍정할 수 있을까.
몰랐다.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는 판단할 자격조차 없었다. 서른다섯 살의 이강현은 물성의 세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고 이스트리아의 환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입을 다물고 늑대의 딸이 안배하시는 바를 따라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당신이 제시한 논점을 존중하지만, 거기에 대한 해답을 지금의 땅에서 찾지는 못하리라 믿소. 칼린카가 스스로, 더 잘 날아다니는 방법을 상상할 수는 없으니 말이오. 충분한 좋음과 충분한 나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좋음의 성상에 대해 고민하려면 먼저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오."
그리고 볼로디아의 목소리가 고민에 출로를 놓았다. 강현은 거기에서 얄궂게도 사업계획서와 제안서의 문장들을 연상했다. 판타지 세계에서, 신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머리가 드디어 완전히 맛이 간 것인가. 아니면 이게 본질적으로 그런 일이기 때문인가. 강현은 강단 있는 연극 기획자를 마주보다가 실실 웃었다. 즐겁거나 흥미로워서 흘리는 웃음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할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볼로디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종이 묶음으로 주의를 되돌렸다. 강현은 잠시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굳어 있었다. 이윽고 둔중한 졸음이 그를 암흑으로 이끌었다. 파울리스의 부름이었다.
* * *
강현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분명히 파울리스를 다시 만나면 얼굴을 한 대 갈겨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럴 기력도 없었다.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입에 머금었던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술을 따르던 소년을 멈춰 세웠다.
"술은 됐어요. 기분 나쁠 때에는 안 마십니다. 그것도 다 습관이라서."
"습관이라."
"저번에 말했지 않습니까. 정말로 중독자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파울리스는 곧바로 엄지와 검지를 튕겨 술병을 어딘가로 돌려보냈다. 곧이어 홍차를 우려낸 콜라 한 잔이 강현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혀 밑에 남은 연기와 함께 탄산을 목 너머로 흘려보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은 들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만신전 쪽에서도 다급한 모양이지.
"보수는 준비해 뒀어요?"
"돈은 충분해.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운명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이런 결말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든 간에 계약직이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사실 웃긴 일이지. 지구인이 이스트리아랑은 무슨 상관이라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담. 아는 거라고는 시뮬레이터에 담긴 내용뿐이었는데. 이방인으로서 해낼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 강현은 그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쏟아내듯 말했다.
"돈이야 어쨌든 간에 난 이제 모릅니다. 완전히 지친데다가 할 말도 바닥났어요. 사실 내가 뭔 말을 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긴 한데, 아무튼. 늑대가 깨어났을 때 합의를 잘 보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요. 댁들이 제대로 해낼 거라는 기대는 없지만."
"따로 준비해 둔 게 있어. 최근에 티아가 바빴던 것도 그것 때문이고."
"어찌 됐건 난 정말 몰라요. 계약서를 고쳐 쓴다, 이딴 이야기나 할 거면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너한테 부담이 될 일은 아니야. 볼로디아에게 제안 하나만 전달해 주면 돼. 그러면 적어도 천 년… 천 년쯤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생쥐들이 떠올린 대안이 마냥 떳떳할 거라고 믿긴 어려웠지만 이 상황에서 또 개짓거리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으로 볼로디아를 설득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강현은 오래도록 담배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고민은 없었고 불꽃이 중지와 검지 사이를 뜨겁게 달굴 무렵에야 겨우 정신이 되돌아왔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입을 열었다.
"들어나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