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Delenda est (2)
남자는 오가는 사람이 없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제국의 역사이자 역사에 적히지 않은 모든 것이었지만 자신이 원래 누구였는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더욱 많았다. 변명하는 방법은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에 잊어버렸고 수치와 두려움은 타마기스의 성터 아래 파묻었다. 남자는 다만 질타가 있으면 질타를 들었으며 칭찬이 내려올 때에는 겸허한 마음으로 변덕을 예비했다. 그것은 그가 삶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제 남자는 무엇도 견딜 필요가 없게 되었고, 따라서 평생마저도 망각 속에 가라앉혔다. 그럼에도 언뜻언뜻 뇌리를 스치는 순간들이 있었다… 동생과 친우가 있었다. 그들은 이제 아득히 먼 곳에 있다. 살아 있지만 땅에는 영영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땅에는 반려일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고 그를 진실로 염려하던 하인과 사무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래전에 죽었다. 모든 치유사의 아버지조차 고치지 못한 병으로… 아니다. 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하지 않은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섯 도시가 손을 잡은 후로도 질병은 사람을 은밀히 다스리는 도구가 되어 제국 전체를 맴돌았다. 성실한 시민은 치유사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되찾았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은 오직 잊히거나 불운으로만 기억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불행은 요정만을 괴롭히게끔 설계된 것이었다. 그들의 피에 흐르는 마력과 조응하며 혈맥을 망쳐 놓도록. 그 질병에는 치유식이 없었고 겨우 억제제만을 쓸 수 있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간주된 요정들은 대개 그런 방식으로 죽었다.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았던 이도 있었다. 남자는 불멸의 소년이 그들의 병상을 찾아 소소한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병자들은 모두 신의 은혜에 감사와 부끄러움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다. 바로 그 신이 그들을 죽이고 있는데도.
늙은 신. 모든 치유사의 아버지. 타마기스의 주인. 호리호리한 체구의 소년. 땋아 묶은 옆머리는 새의 깃털이 겹친 모습 같고 묵색 예복은 상공으로부터 날아드는 맹금의 그림자를 연상시킨다. 날렵한 이목구비 속에서 빛나는 암녹색 눈… 그 눈이 남자를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절박한 비명을 내질렀다. 텅 빈 암흑이 소리를 집어삼켰고 그는 회당에 홀로 남았다.
다시 처음부터. 사람들의 얼굴. 사무관과 하인과 노예와 황태자들의 얼굴… 친우들의 얼굴… 나나우아친의… 솔로틀의 얼굴. 그리고 이글거리는 녹색 불꽃. 남자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기억의 파편은 한순간에 가라앉았지만 불꽃 한 쌍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긴 침묵이 지났다. 남자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에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아버님께서 내게 돌아오라 하셨어. 나는… 나는……."
"형님, 용서를 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잘잘못을 가리고 책임을 따지기에는 너무 먼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저는 다만 당신께 평안을 안겨드리고자 온 것입니다."
불길이 남자를 감싸 안았다. 그는 낯선 평온이 자신을 집어삼키고 아버지의 주검마저 불사를 때까지 그대로 멈춰 있었다.
* * *
첫 번째 용에서 내린 것은 작고 마른 요정이었다. 부패자들은 그녀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했고,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 소식이 더 멀리 퍼진 탓에 인파는 무덤 일대를 넘어 골목 곳곳으로까지 뻗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군중이 일제히 물러나는 장면은 도시 자체가 깨지기 직전의 알로 변해 꿈틀거리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아니스와 프로파나티카가 서로를 말없이 마주보는 동안 두 번째 용이 착륙했다. 다이사트는 이방인들을 적당한 위치로 이끈 뒤 다시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듯 그림자가 머리 위에 정체해 있었다. 강현은 비늘 짐승의 썩어가는 배를 올려다보다가 주위를 훑었다. 격정이라기에는 차분하고 체념이라기에는 열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새벽을 절반쯤 지날 때 살육 광란이 터졌으므로 그때로부터 고작해야 반나절이 겨우 지난 셈이었다. 갑작스레 잦아든 분위기가 낯설기만 했다. 대수롭지 않게 서로를 도륙하고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세계의 균형이란 그런 것일까. 그 대수롭지 않음에는 완전한 죽음조차 포함된단 말인가. 바깥의 좋음과 이곳의 좋음을 저울에 재어 비교하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부패자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타마기스 곳곳에 명확한 숫자를 매기려면 여기에 더 오랜 시간을 머물러야만 했다. 기회가 없었다. 강현은 축제의 마지막 날에, 마지막 행사를 기웃거리는 관람객의 심정으로 혀끝을 잘근거렸다. 프로파나티카가 막 입을 열고 있었다.
"그렇게나 덤벼든 이유가 알고 싶어. 명령 때문에 그랬어? 아니면 내가 미워서?"
"모릅니다. 저는 그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자면, 당신께서 원하신 바가 아니었는지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도, 지금도, 저를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마음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몰라. 나도 아무것도 몰랐어. 나를 움직인 건 내 생각이 아니라 장치였어. 머릿속에 있는 거 말이야. 그게 온종일 도시를 지키라고 속삭이는 거야. 싸움을 멈추고 사람들을 다스리라고. 끔찍했어.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잠깐이나마 서로가 풀려났으니 어떤 명령이라도 내려 주십시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니스는 두 팔을 넓게 펼쳐 예장용 검을 받쳐 들었고, 공물을 바치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 동작에는 엄숙함을 넘어선 경건마저 깃들어 있었다. 프로파나티카는 서글픈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이 아니야. 저승의 청지기께서 황제 폐하를 만나뵐 수 있도록 회당 문을 열어 드렸어. 이야기가 끝나면 우리 모두가 저승으로 가게 될 거야. 나도 쉴 수 있을 테고. 이제 지겨워. 내가 멈추면, 그래서 싸움을 말릴 사람이 없으면 다들 미쳐 버릴 거라니 그게 도대체 뭐야. 나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황궁에서 태어나고 싶었던 적도 없었고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정말로 원했던 건 너뿐이었어. 너밖에 없었어. 그래서 나는 널 위해 도시 전체를 바쳐서 여기에 왔어. 너와 이렇게 마주보려면, 네 목소리를 들으려면, 네 생각을 똑바로 알려면 조언가 장치를 꺼야 했으니까. 그러면 이곳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프로파나티카의 시선이 아니스의 발치로, 장검으로 향했다. 피 얼룩이 칼의 빗면에서 그림자 자국처럼 흔들거렸다. 심장이 수백 번은 더 뛸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목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넌 호위무사가 아니고 난 황태자가 아니야. 그러니까 너한테 명령은 하지 않을래. 이번엔 네 차례야. 일어나서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도 좋고, 나한테 화를 내도 좋아. 무엇이든 해도 괜찮아. 나는 죽음이 올 때까지 여기에만 있을 거야."
아니스는 망설임 없이 일어났고, 프로파나티카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끝이 칼날을 딛고 올라서면서 그림자가 장검과 겹쳐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프로파나티카, 여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작게 속삭인 늑대인간은 한쪽 팔로는 등을 받치고 다른 팔은 무릎 오금에 걸어 요정을 품에 안아 들었다.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된 묵색 제복은 장검만을 뒤에 남기고서는 빼곡한 인파 너머로, 어디든 상관 없는 곳으로 걸어 나갔다. 높은 음이 울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강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의 형체 너머로 튀어나온 나팔의 테두리가 태양 아래 부서지듯 빛나며 색색의 마력 갈래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름답군. 우리끼리만 이걸 보게 되다니 아쉬울 정도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다홍. 별을 닮은 파랑과 이글거리는 초록. 이 세상에는 없을 듯 눈부신 보라. 솜씨 좋은 화가는 쉽게 건드리지 않지만 어린아이의 공책에 모여들기만 하면 빛을 발하는 색채들. 마력 갈래는 끝을 모르게 긴 리본처럼, 선율에 맞추어 너울너울 퍼져 나갔다. 강현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잊은 채로 하늘이 빛깔과 소리로 물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갈채를 보내기에 충분한 연주였다.
그리고 부패자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안―녕! 안―녕! 안―녕! 머틀까지도 글을 적던 손을 멈추고 크게 호각을 불어 댔다. 볼로디아는 어린아이에게 먼 곳을 구경시키듯 수납함을 들어올려 그가 다른 이들과 눈높이를 맞댈 수 있도록 했다. 안―녕! 안―녕! 안―녕! 강현은 그 외침의 각 음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 가면서 자신을 채우고 또 비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래도록 텅 비고 충만한 감각 속에 멈춰 있었다.
강현은 그러는 동안 다이사트의 마지막 연주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고민해 보았다. 축가일 수도 있고 장송곡일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도 완벽히 들어맞는 것 같진 않았다. 설명은 더욱 어려웠다. 탄생이 있으면 최후도 있기 마련이라는 구태의연한 발상보다는 다른 인용문을 끌어 오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모호한 상상에 불과하지만 타마기스의 사람들에게는 지당할 무엇을.
하지만 강현에게는 문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