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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45화 (246/258)

245화 Delenda est (1)

다이사트가 말한 만큼 프로파나티카도 말했고, 그렇게 두 목소리는 형틀에서 막 떨어져 나온 덩어리의 양면이 맞붙듯 서로 엉겨붙었다. 아교는 원망과 놀람과 연민이었다. 강현은 윰 시밀의 흔적들이 그 흔적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선택과 책임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불행을 곱씹었다.

그리고 선택하는 대신 선택받을 수밖에 없었던 늑대인간도 있었다. 강현은 아니스가 여기에 있어야만 한다고, 하지만 없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은 곳곳에서 말없이 일하고 말없이 죽어가는 사람들만큼이나 당연한 비극 같았다. 그녀의 끝이 결국엔 프로파나티카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까지도.

그렇게 이야기 속의 시간이 가까이 밀려와 몇 해 전의 만남에 가 닿자 강현에게도 아주 당연한 깨달음이 다가왔다. 프로파나티카는 처음부터 죽기를 원했으며 다이사트는 청지기가 하려는 일을 알았다. 그러니 타마기스의 결말은 이미 나 있었던 셈이다. 짧게는 테네브로즈와 나팔 머리가 서로 마주쳤을 때. 길게는 다이사트가 조언가 장치를 잠깐 멈췄다가 재가동시켰을 때.

강현은 새삼스레 관객석에 앉은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 어떻게 이 자리로 밀려났을까? 그는 계약서를 쓴 날부터 지금까지의 나날들을 되짚어 보았다. 변경에서 참주와 별점술사를 만났고, 세카두에서 수액 괴물에 잠식된 용병을 죽였고, 카스바에서는 벨레다와 헤이딘을 죽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말루카에서는 울쿠스를 달래 능묘로 보냈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자신의 역할이 있었다.

그는 나우파나에서의 만남이 계기일 것이라 믿기로 했다. 처음부터, 아무 선택권도 없이 정해진 길을 따라가고 있었을 가능성을 깊이 고민했다가는 정말로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제정신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웃음이 고함처럼 갈비뼈를 두드렸다.

강현은 애써 표정을 굳힌 채로, 머릿속으로만 웃었다. 티아, 시뮬레이트 결과를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게 이것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랬다가는 내가 미쳐 버렸을 테니까요. 그 전에 이미 정신이 나간 점은 미안하다고 말씀드리죠. 아무튼 난 상관없어요. 돈만 받으면 돼요…….

논의는 빠르게 결착을 맺었다. 프로파나티카는 아니스에게 가기로 했다. 도시가 먼지가 되어 내려앉을 때 자신의 반절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강현과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를 예정이었다. 회당으로 나아가 황제를 만나는 것은 테네브로즈뿐이었다.

솔로틀은 천 년만의 재회가 독대이기를 원했다.

*   *   *

역병 늑대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명령을 따라 내달렸다. 한 걸음을 박차고 나아갈 때마다 길이 뒤틀렸고 건물들은 형체를 잃고 뭉그러졌다. 분명한 것은 강렬한 피 냄새뿐이었다.

똑같은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아주 먼 옛날, 굳은 표정 아래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추고 회당에 발을 들였을 때. 대원으로 나아가 바단의 주인과 야스와다의 주인께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렸을 때. 그때 자신의 곁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예민하고 짜증이 많고 자주 울었지만 황궁의 어느 누구보다도 솔직할 수 있었던 사람이.

그것이 글줄이 말하는 것만큼이나 숭고한 미덕인지, 아니면 세상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람만이 간직할 수 있는 치기인지는 몰랐다. 다만 그 정직이 자신을 선택했으므로 따를 뿐이었다. 아무리 진실한 사람일지라도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원칙 하나만을 외면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품을 적시는 눈물으로부터 연약한 낭만을 읽어냈고 그것을 변명으로 삼았다.

― 내가 널 골랐으니까 나도 나를 줄게. 언제라도, 아주 먼 나중에라도, 내가 네게 끔찍한 사람이 되면 나를 죽여. 이건 명령이야.

목소리와 함께 얼굴이 되살아나더니 몸의 떨림이 혈류를 타고 흘렀다. 눈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햇살이 밝던 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두려움과 일말의 고독을 담아. 그것은 걱정을 동력으로 삼아 상상력을 뻗어가는 이들 특유의 고독이었다. 그들은 상대를 너무 깊이 염려하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면은 말하지 않는다. 혹은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감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자신이 정말로 죽여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알았더라면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을까. 맹렬하게 내리막을 따라 질주하던 바퀴가 급히 제동이 걸리듯이 세상이 잠깐 멎었다. 그러고는 시간이 반대편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대관식 직전의 한 해. 대관식. 열일곱 차례의 연휴 기간. 그리고…….

아니스는 자리에 멈춰 섰다. 썩어가는, 선명한 색채를 발하는 건물들이 거대한 짐승의 척추처럼 이어지며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환영과 칙칙한 담쟁이덩굴이 뒤엉켰고 다리 달린 책장 하나가 골목 사이로 휙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는 생경한 기분 속에서 자신의 손을 살폈다. 묵색 예복의 소매가 창백하고 흐늘흐늘한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순간 도시 특유의 매캐한 악취가 지각되더니 기억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아직 정오에 닿지 못한 햇살로부터 마지막 가을 연휴를 연상했다. 그 시기의 태양은 아무리 맑고 밝을지라도 색깔을 씻어내지는 못한다. 모든 것을 표백시키는 빛은 여름만의 특권이므로.

그래서 지금이 언제지?

그 시체들이 떠들던 이야기로 추측컨대 열월(熱月) 아니면 과월(果月)이었다. 시간이 이를 뿐이지 아직은 가을이 아니다. 따라서 태양은 더 높게 떠오를 것이며 도시도 후끈한 열기로 가득찰 것이다. 프로파나티카는 더운 공기가 가슴팍을 채울 무렵마다 황태자와 호위무사의 뒷모습을 입에 담곤 했다. 세상이 투명한 빛 속에 사라지더라도 영원히 남을 것만 같은 둘.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은 무슨 마음으로 그 검은 형상을 쫓고 또 쫓았던가.

아니스는 빼앗긴 물건을 돌려받고는 해진 구석부터 찾는 사람처럼 과거를 되짚어갔다. 하지만 얼룩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고 결국 남은 것은 타인의 설명을 기다리는 시간뿐이었다. 프로파나티카, 당신은 무슨 마음으로. 거기까지만 물은 아니스는 수천 겹의 목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기계 장치와 인간과 그 무엇도 아닌 것들이 한데 모인 채 가장 앞에서부터 시작된 목소리를 뒤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소란스럽지도 빠르지도 않은 박자로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울림은 그 자체로 일종의 성가 같았다. 아니스는 군중의 한가운데가 원을 그리듯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중심부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황궁에서 일하는 요정 몇몇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비가 오는 날 수면의 동심원이 서로 맞닿듯 또 다른 목소리들이 번져 나갔다.

"역병 늑대야. 늑대가 왔어."

"야스와다… 바단… 나우파나… 와그다스… 타마기스."

"이번에는 점괘가 옳았군. 천 년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역병에 휩쓸린 주제에. 이 다음엔 어떻게 되지?"

"기다려. 아직 계산중이야."

아니스는 인파의 마지막 겹마저 비집고 나와 공터에 발을 내디뎠다. 별점술사 몇몇이 명반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은 오랜만이구나, 아니스. 마력 갈래들이 네가 올 거라고 말했다."

"황자의 호위무사가 황궁의 수석 별점술사를 뵙습니다."

아니스는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마주 묵례한 여자의 시선이 그녀의 허리께로 향했다.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구나. 이방인을 베었느냐?"

아니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오른손이 무언가를 단단히 붙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프로파나티카의 목을 친 예장용 장검이었다. 왜 그랬지? 왜? 거기에는 마땅한 답이 없었지만 이제는 묻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는 황홀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팔을 곧게 뻗어 올렸다. 검신이 제례에 쓰이는 촛불처럼 지평선과 수직으로 직교했다. 해가 칼날에 찬란한 테두리를 더하더니 아직 마르지 않은 선혈까지도 눈부시게 빛났다.

"저는 지난 천 년간 인간 형상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제 주인 되시는 분의 일부일 것입니다."

"이리 와서 칼끝을 명반에 붙이거라. 그 피로 우리의 앞날을 점치려 한다."

아니스는 여자가 시킨 대로 했고,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점괘를 기다렸다. 별들의 진형이 계산점에 맞추어 바뀌어 가다가 안정을 찾는 가운데 별점술사들의 목소리도 하나로 모여들었다.

"거화양격에 형노와 재복이 움직이니 출로가 되는구나. 스스로 끝을 향해 가는 사람의 형상이 여기에 있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아니스에게로 물음이 향했다.

"너는 어찌 하겠느냐?"

검을 돌려받은 아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부패자들은 종교적인 찰나라도 되는 것처럼, 경건한 침묵 속에서 강철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도 소리가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늑대가 황궁으로부터 달려 나온 날을 앞다투어 이야기했다. 언젠가부터 아무도 입에 담지 않게 된 주제였다. 잘 가꾼 정원이 피로 물들고 평생을 바쳐 모은 장서가 불타는 모습을 무슨 심정으로 지켜보았는지. 찢어져 나간 몸을 처음 쥐어들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죽음을 바란 친지들을 제물로 바쳐 보낼 때에는 또 어땠는지.

모두의 기억이 한데 모인 곳에 두런거리는 혼잣말들이 쌓였다. 그래, 처음엔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는데. 이걸 죄다 잊고 있었다니 놀라울 정도야. 죽음이 언제 찾아오건 간에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만큼은 영원히 머릿속에 남을 거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싸울 때도 즐겁기만 했고. 차라리 백 년 전이 더 힘들었지.

백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기억 못 해? 자네가 장난 삼아 내 팔을 뜯어가서 어디에 감추고서는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았잖아… 다른 걸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 팔이 정말 좋았는데… 그래서 홧김에 무덤으로 갔다고… 그랬나? 그랬다면 미안해. 자네가 화내는 게 재미있어서… 이제 와서야 사과는 무슨, 그냥 넣어 둬… 어쨌거나 정말로 끝인 모양이야. 더 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고도 생각했어. 그 언젠가가 온 거야…….

부패자들의 시선이 계시를 기다리는 숭배자들처럼 아니스에게로 모였다. 그녀는 프로파티카와 함께 있는 한 무리의 이방인들을, 그리고 다이사트를 볼 수 있었다. 눈앞에는 없을지라도 그게 느껴졌다. 프로파나티카 역시 이곳의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기다릴 생각입니다. 제 주인께서 여기로 오고 계십니다."

아니스는 부패자들에게, 그리고 프로파나티카에게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여름 특유의 해가 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그것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닿고는 이만 기울어지려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날아들어 열기를 가렸다. 부패자들은 일제히 공중을 올려다보았다. 두 마리의 용이 있었다. 카랑카랑하지만 앳되게만 들리는 외침도 있었다.

"아니스, 내가 왔어! 널 만나기 위해 온 거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별점술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인파 사이로 섞여들었다. 이제 공터에 선 사람은 아니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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