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제국의 기계들 (6)
윰 시밀의 심장으로부터 뻗어 나온 저주가 타마기스를 휩쓸었을 때, 호위무사가 황태자의 목을 치고 도심으로 달려 나갔을 때 조언가 장치도 이변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은 긴 논의와 철저한 계산 끝에 최선의 결론을 내렸고, 그에 따라 황태자를 작동시켰다. 프로파나티카는 목을 붙인 뒤 용을 이끌고 나가 도시의 소란을 진압했다.
인간들과 함께 날뛰는 부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요정은 프로파나티카를 도왔다. 이제 그녀는 잠잠해진 난동꾼들을 관중 삼아 마지막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끝끝내 전의를 꺾지 않은 반란자는 하나뿐이었다. 프로파나티카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늑대가 누구인지는 일절 생각하지 않은 채, 장치의 지시만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사안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교류 통로는 슈문의 가호를 잃고 막힌 벽으로 변했다. 걸어도 일대의 땅을 벗어나지 못했고 차원문도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이시 타브의 땅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택했다. 반란자들을 격리할 방법도 그것뿐이었다.
사절들의 도움을 받아, 프로파나티카는 벌써 수천에 이르는 불순분자를 처형했다. 그들은 타마기스로부터 추방되는 동시에 야스와다의 주인에게 도시의 사정을 전하게 될 것이었다. 이 늑대까지도. 거대한 짐승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간신히 서 있는 것이 한계인 듯 헐떡이고만 있었다. 최후의 일격을 꽂아넣기 위해 마력 갈래를 조율하려던 찰나 용이 급강하해 그들 사이에 착륙했다.
프로파나티카는 짐승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다이사트."
"황태자께 황궁의 일원이 예를 갖춥니다."
"사무관이 너를 부르러 갔었지. 소환에 불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변명할 말이 없으나, 호위무사의 처분에 대해서는 감히 여쭈고자 합니다. 다른 반란자들처럼 처형하실 생각이신지요?"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이곳에 남겨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가 아니더냐?"
"판단을 거두셔야 합니다. 그자는 당신과 영혼이 묶인 존재로서 이시 타브께 바쳤다가는 당신께도 영향이 가고 맙니다. 지금은 따로 억류해 두고, 난동이 진압되었으니 회당을 살피는 것이 어떤가 합니다."
* * *
황제와 윰 시밀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고, 황태자는 정확한 사정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 장면을 시민들에게 보이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황태자와 동행하게 된 이는 다이사트가 유일했다. 즉 그는 비밀을 넘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회당에 온 것이었다.
다이사트는 상황이 꽤 공교롭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수목원의 오두막에서는 해방감에 전율하고만 있었는데 반나절만에 다시 궁정 마법사가 된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대관식 직전에, 나우파나 지성소에 들렀을 때에는 삶이 아주 지긋지긋했는데 지금은 다락을 헤집고 노는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는 대원을 넘어 단상으로 다가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걸음이 점차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권좌에 앉은 청년이 거대한 맹금의 가슴팍에 장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황제와 윰 시밀의 본상이었다. 칼이 박힌 곳에서부터 강렬한 힘이 이글거리듯 번져 나오고 있었다. 다이사트는 검신에 손을 얹고 각각의 작용을 파악했다. 역병을 퍼뜨리고 살점을 썩게 하는 것. 몸을 아물게 하고 그릇을 수선하는 것. 그리고 더 많은 원리들…….
그는 마력 갈래가 자신에게로 역류해 들어오기 직전에 멈췄다. 몇 차례 숨을 몰아쉬고서야 검의 재질이 똑바로 눈에 들어왔다. 장검은 검신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조립한 것이 아니라 기묘한 물질을 통으로 깎아 만든 것이었다. 완전히 검었고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다이사트는 비슷한 물건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음을 상기했다. 황궁의 금고에서. 나우파나의 언약궤 아래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그는 너무 솔직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프로파나티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금 멀리 떨어진 채, 무감각하고 온화한 태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사트는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 검은… 성물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이지만 아주 강력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도시의 사람들이 일시에 죽지 않는 시체로 변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물이 쓰러져 누운 신과 조응하며 타마기스 전체에 역병을 퍼뜨리는 동시에 그릇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저희의 능력으로 빼낼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거니와, 만약 그랬다가는 모두가 죽고 말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마."
황태자의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빠르게 결론이 날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다이사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격식을 갖추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자세를 편하게 고치자 발끝에 매의 몸이 느껴졌다. 명확한 형체가 있는 것처럼 단단하다가도 너울거리며 안개로 변하는 듯 이상한 감촉이었다.
다이사트는 한동안 깃털 사이로 손을 밀어넣어 낯선 느낌을 즐기다가 그만 멈추고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수천 해를 살아온 반신은 놀랍도록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성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회당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지만 늙은 신이 그 아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았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은 실로 마음 편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 또한.
복수는 이루어졌다. 황제의 삶도 여기에서 끝일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남은대로 살아가겠지만.
황태자를 찾으러 가는 동안 들은 바가 있었다. 야스와다와 바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다른 도시의 신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다만 와그다스 학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리고 통신망에 교류 통로까지 먹통이 된 걸 보면 슈문이 여기에 얽힌 게 분명하다고.
그밖에도 상상력을 발휘할 요소는 많았다. 서른 해 전에, 잇달아 떠오른 여덟 개의 별들. 산맥 인근의 인간 도피처. 죽여도 죽지 않는 이상한 나그네들에 대한 이야기. 슈문이 숨긴 지혜들. 윰 시밀은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향해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들의 정신을 잘근잘근 짓밟아 놓고 인간들의 도시를 소탕하지 않으면서. 예상한 사람은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이사트는 사연이건 속내건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사실 그는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단죄가 자신의 몫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묘한 기쁨을 느낄 뿐이었다. 황제시여, 극적인 결말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런 게 피곤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이제부터는 긴 휴가를 즐겨 보고자 합니다…….
그는 야스와다와 바단의 주인이 너무 일찍 들이닥치지 않기만을 빌었다. 신들이라면 윰 시밀을 되살리고 타마기스를 돌려놓을 방법까지도 알고 있을 테니까. 다행히도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도시가 이 꼴이 되면서 차원문 좌표가 구성되는 방식까지도 변한 것이다. 기존의 좌표는 모두 망가졌고 새로운 체계를 해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다른 도시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끊겼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타마기스 둘레에는 마법 장벽까지 나타나 입장을 막고 있었다. 이런 이상 현상은 아마도 부작용에 가까울 터였다. 신의 권능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효과마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마치 격리가 목적인 것 같군. 거기에서부터 몽상을 펼쳐 가던 다이사트는 자신이 홀린 듯 웃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고, 멈췄다. 다행히도 황태자는 생각을 해 보겠다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황태자시여, 불손한 태도에 사죄드립니다. 혹여 뜻을 정하셨는지요?"
"생각을 하고 있다."
단조로운 대답을 듣는 순간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올라왔다. 이건 도시의 명운과는 다른 궤에서 작동하는 감각이었다. 그는 비슷하거나 전혀 관련이 없는 질문을 몇 차례 더 던져 보았고, 그럴 때마다 똑같은 답변을 마주했다. 조언가 장치마저도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다이사트는 장치를 정지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단상으로부터 내려와 황태자의 앞에 섰다. 막연한 침묵 속에서 프로파나티카의 의안이 낯선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대관식이 끝나고 황태자의 달라진 눈동자를 맞닥뜨린 날 울지도 못하고 그저 뒤뜰에 앉아만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건 다이사트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추모였다. 울음은 자기연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죽은 제자를 향한 비감과는 별개로, 궁정 마법사에게는 조언가 장치를 멈출 용기가 없었다… 지금은? 지금은 어떻지?
다이사트는 눈을 질끈 감았고, 자신이 발휘해야 할 용기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보았다. 그것은 요정 소녀의 비애를 받아내고 달랠 용기였다. 프로파나티카는 자신이 아니었던 열일곱 해를 어떻게 느끼고 기억할까?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어쩌면 황태자는 스승을 비겁자로 느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해야 했다…….
그는 마음먹은 대로 했다.
프로파나티카의 눈이 초점을 갖췄다. 이제 여기에 있는 것은 황태자가 아니라 다이사트가 아는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붙든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회당을 훑어 보았고, 권좌에 앉은 남자와 죽은 맹금까지 눈에 담았다. 그러고서도 한참이 흐른 뒤에야 입술이 달싹였다.
"이게 뭐야? 대관식은… 장치는… 네가 멈춘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 얼굴은… 그리고 아니스는……."
"예, 작동을 중단시켰어요. 어디까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말씀드리자면, 대관식은 열일곱 해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이사트는 일부러 입가에 미소를 띄워 올렸고, 스승이었을 때처럼 말했다. 프로파나티카가 질색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설명할 필요 없어. 기억이 나.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아. 다시는 장치를 쓰고 싶지 않아. 끔찍해. 끔찍했어. 아버지 생각도 하기 싫어. 그냥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구를 향해, 휘청이며 걸음을 옮겼다. 다이사트도 따라 걸었다. 회당 바로 앞에 한 무리의 요정이 모여들어 있었다.
새로운 소식들은 대체로 달갑지 못했다. 요정들은 황제가 윰 시밀을 죽였다는 말에 경악을 표했고 다이사트는 도심의 소란에 새삼스러운 피로를 느꼈다. 황태자가 떠나자마자 다시 난장판이 되었다고 했다. 육신을 잃은 영혼들이 물건에 깃들어 날뛰는 중이고, 이번에는 불순분자를 처형하려다가 도시 전체를 제물로 바치게 될 판이라고.
다이사트는 성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추측할 수 있는 맥락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궁정 마법사의 권한으로 요정들을 멀리 물렸고, 흐느끼는 황태자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일단은 도심으로 돌아갑시다. 저도 곁에서 돕겠습니다."
"나는… 싫어. 아니스와 다시 만나는 것도, 또 싸우는 것도 싫어. 그냥 죽고 싶어. 나를 야스와다 사람들에게로 데려다 줘. 내가 죽으면 아니스도 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황태자님, 우리는 당분간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심지어 몸을 잃을지라도 넋은 살아남게 되죠. 그러니 보금자리를 잘 돌보는 것은 통치자의 의무이자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일 거예요."
프로파나티카는 말없이, 오래도록 다이사트를 바라보았다. 풍요로운 가을 햇살이 매끄러운 의안과 암록색 머리카락 위에 넘쳐흘렀다. 웃음을 참기 위해서는 노력해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다니 나도 참 제정신은 아니군. 미쳤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물론 우스운 일인 건 사실이지. 황자를 깨워서 처음으로, 제대로 한다는 말이 이딴 거라니. 하지만 감상주의에 사로잡혀서 비극을 한 편 써내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윰 시밀을 상대하는 동안 얼굴을 굳히는 일에 익숙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프로파나티카가 절규할 때까지도 다이사트는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고만 있었다.
"네가 해! 너한테는 용도 있잖아! 통치자 같은 건 너나 해!"
"그럴 수는 없어요. 전 그런 건 못 해요. 저는 마법에 조금 소질이 있을 뿐이지 평범한 요정입니다. 반신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모든 용을 거느리지도 못해요. 게다가 나우파나 사람이 감히 왕권을 주장했다가는 반기를 들 사람이 수없이 많죠. 하지만 황태자님께서 도시를 다스리기로 한다면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냥 요정이야! 머리에 이상한 걸 꽂고 있을 뿐이지 그냥 요정이라고! 난 너희보다 더 일찍 죽는데다가 제대로 생각도 못 해! 아니스도 저렇게 됐고!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무것도 된 게 없는데 도시를 다스려서 뭘 어쩌자는 거야? 내가 왜 그래야 해?"
프로파나티카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다이사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어린 아이를 달래듯 손으로 토닥였다. 심장의 고동에 맞추어 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윽고 낱말이 눈물을 밟고 올라섰다.
"다이사트."
"예."
"대관식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었지?"
"몰랐습니다."
"아니야, 넌 알았어. 알았을 거야. 이제야 장치를 멈추다니. 이제 와서. 넌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됐어. 제발 날 야스와다 사람들한테로 데려가 줘. 도시야 어떻게 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프로파나티카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깨만이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다이사트는 옷 너머로 움직임을 느끼며 비탄에도 박동이 있다면 그런 박자일 거라고 상상했다. 이건 확실히 낭만주의로군. 하지만 아무리 낭만에 취해 보아도 자신의 기분만큼은 분간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윰 시밀의 악취미에 시달릴 때부터 그랬다. 머리가 으깨지는 듯한 기분이 환희인지 참담함인지 구분하려 애쓰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빈정거리는 목소리뿐이었다. 됐어, 다이사트, 비련의 주인공인 척은 하지 마. 너는 처음부터 비겁자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또다시 거짓말을 했잖아…….
이것이 그 알량한 용기의 한계였다.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책임을 짊어지기에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도시가 훌륭한 곳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거대한 투기장이 아니라 한가롭게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오후였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장치가 복잡한 계산을 마치고 제 기능을 다하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황태자를 올바로 작동시키도록.
다이사트는 고개를 수그려 프로파나티카의 귀에 주문을 불어 넣었다. 조언가 장치를 일깨우는 주문이었다. 마지막 어절을 발음하면서, 그는 스스로가 끔찍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하지만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은 후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