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42화 (243/258)

242화 제국의 기계들 (5)

치밀한 체계에는 그 자체로 신적인 힘이 있다. 윰 시밀은 그것을 감정과 행동 사이의 인과관계를 끊어 놓는 기능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만들어내 주관하는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프로파나티카는 울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걱정했지만 자신이 도망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결국엔 자신의 직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대 황태자가 그랬던 것처럼 온유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다이사트의 역할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윰 시밀은 그를 타마기스에 붙들어 두었고 더한 중책을 맡겼다. 그럴듯한 거처와 용 호각은 덤이었다. 황자의 스승은 완전히 달라진 제자를 마주할 때마다 지식인다운 환멸을 느꼈고 지식인다운 우울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옳음과 좋음의 체계가, 신의와 보신주의가 한껏 충돌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시간은 각자의 감상을 비웃듯 내달렸고 아무렇지도 않은 나날들이 열여섯 번의 가을 연휴를 통과해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열일곱 번째였다.

*   *   *

환각제에 손을 댄 적이 있다. 파이어픽스. 쏨뱅이 독. 핫샷. 영혼을 흔들 뿐만 아니라 몸까지 뒤틀어 놓는 것들. 역병의 주인이자 모든 치유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곧바로 알고 다이사트의 육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늙은 신을 전속 치유사로 쓰는 삶이란 얼마나 은혜로운가. 이제 다이사트에게 허락된 방탕이라고는 잠뿐이었다.

그는 단절감과 함께 깨어났다. 길고 몰입되는 꿈 속을 헤매다가 눈을 뜨자마자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납빛 창틀이 동이 터오는지 땅거미가 내려앉는지 모를 주홍빛을 침실에 퍼붓고 있었다. 수목원을 뒤덮은, 껑충한 나무들이 유리창에 검은 세로줄을 놓은 게 보였다.

다이사트는 가을 연휴마다 수목원 한복판의 오두막에서 휴식을 취했다. 수면약을 들이켜고 내내 누워만 있는 것이다. 그는 조금 뒤척이다가 협탁에 놓인 도기판을 움켜쥐었다. 황궁에서 하인이 찾아오지는 않았으니 연휴 기간이야 남아 있겠지만 일자는 확인해두고 싶었다. 그러나 매끄러운 도기판 위에 떠오른 것은 평소의 화면이 아니라 이상하고 평범한 인삿말이었다. 잘 지내십시오. 잘 지내라니, 와그다스의 주인이 연휴 장난을 칠 만큼 유쾌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변화가 없었다. 단념하고 도기판을 협탁에 올려놓은 다이사트는 문득 자신의 팔이 이상하게 변했음을 깨달았다. 옅은 암록색 피부는 늦은 가을쯤에 객사해서, 벌레에게 뜯어먹히지도 못하고 빠르게 썩지도 못한 채 누워만 있는 주검을 연상시켰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슈문이 고약한 장난을 치는 중인데다가 이름도 모를 병이 수목원까지 기어들었다는 것. 혹은 자신이 아직 꿈에 잠겨 있다는 것.

나이가 들면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도 머릿속에 있는 걸 더 잘 믿게 된다. 다이사트는 삶에 찌든 어른들이 그런 것처럼 여러 가지의 종말을 상상하곤 했지만 이런 경우는 계산에도 넣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꿈일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의식의 지평이 넓어졌으니 잘 된 일이로군. 그는 눈을 감은 채, 통신망도 교류 통로도 사라진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소설로 썼다가는 또 나우파나 놈이 불경한 잡소리를 늘어놓는다며 뒷말을 들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상상이 무슨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똑같은 논리로 따지면 윰 시밀의 존재 자체가 불경이다. 다이사트는 불멸의 소년을 마주할 때마다 그가 제국을 놀랍도록 잘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에 순수한 감탄을 느끼곤 했다. 사람 몇몇을 괴롭히는 것으로 가학적인 욕망을 채우고서는 큰 숫자들을 자애로 대하는 군주란 얼마나 경이로운가. 적어도 그 반대보다는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경이로운 사실은 스스로가 거기에 적응했다는 데에 있었다. 대관식을 기점으로, 다이사트는 마감 기한이 닥치고서야 겨우 작업에 착수하는 예술가처럼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예리한 면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두 해만에 마모되었다. 제자를 저버렸든 어쨌든 간에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완벽히 제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궁정 마법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으니 된 것이다.

애당초 미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기실 윰 시밀의 눈에 들지만 않았더라면 황궁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않은 채로 늙어가다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조언가 장치를 멈추지 않는 데에 무슨 도의가 있단 말인가. 불운하게 선택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모든 책임이 뒤따르는가. 대뜸 계약서를 들이민 다음 여기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당신의 선택이므로 그에 따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말하면 누구라도 코웃음 칠 텐데.

다이사트는 오래도록 되어먹지 못한 장사치의 뺨을 후려갈기고 내쫓는 상상을 되풀이했다. 그런 소심한 복수마저도 지겨워질 무렵 문이 열렸다. 다행히도 타마기스의 주인이 아니라 황궁 사무관이었다. 온몸에 진흙을 엷게 펴 바른 것처럼 살갗이 거무칙칙했다.

"이런 인사를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사오나, 3급 사무관이 궁정 마법사님을 뵙습니다. 각설하고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합니다. 무언가가 잘못됐습니다."

"내가 보기엔 휴가 중에, 이 시간에 당신이 여기에 쳐들어온 게 제일 잘못된 일인 것 같은데요. 저녁이거나 뜬새벽일 것 같은데."

다이사트는 누운 채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무관의 어조에서 금방 격식이 달아났다.

"황궁이 아주 뒤집어졌어요. 황궁뿐만이 아니죠. 통신은 다 끊겼고 교류 통로는 물론 차원문까지도 불통이 됐으니. 넘어오는 것도 안 되고 나갈 수도 없어요. 아니, 이런 걸 논할 계제가 아닌데. 이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이 방에는 거울이 없나? 얼굴은 됐으니 당신 팔이 어떤 꼴인지 좀 봐요. 일단 일어나서 생각을 하란 말입니다. 아니면 마력 흐름이라도 느껴 보라고요. 그건 누운 상태로도 할 수 있을 텐데."

"팔이 어떤지는 나도 봤어요. 아주 시체 색이던걸요. 그나저나 내 아버지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이번 휴일에도 결국 못 뵈었지만, 아무튼, 내가 쉬는 날에 빈둥거리고 있으면 일단 일어나라고 잔소리를 하셨죠. 사무관에게 똑같은 소리를 듣다니 꿈이 이렇게까지 현실적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젠장, 당혹스러운 건 알겠지만 이젠 정신을 차릴 때예요. 꿈이 아니란 거죠. 타마기스의 주인께서는 어쩌다가 이런 놈을 이 자리에 앉혀 놓으셨는지. 그분이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그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신이 이러는 것까지 참아 주셨다니 놀라울 지경인데요."

"너그럽다뇨, 망나니도 그런 개망나니가 없는데. 황제께서 뭘 당하고 계시는지 알려주면 다들 기절할 걸요. 내가 입이 무거우니 망정이지."

"완전히 미친 소리를 하는군. 아무튼 날 똑바로 봐요."

사무관은 진저리를 내듯 고개를 흔들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 움직임이 한 번 뽑았다가 다시 묻은 순무를 흙에서 건져내듯 부드러웠다. 다이사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 이제 알겠어요. 확실히 꿈이군요!"

"완전히 역효과군. 꿈이라고 쳐요. 이 꿈에서 당신 역할은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는 겁니다. 주문이 잘못됐는지 기회다 싶어서 그런지, 인간들이 완전히 미쳐 날뛰고 있어요. 심지어 죽여도 죽질 않는단 말입니다. 사태가 심각해요. 당신도 도시의 반절이 인간이라는 걸 알 겁니다. 짐승으로 변하는 종류와 아닌 종류를 다 합치면 그쯤 되죠. 기껏해야 백 살도 못 사는 것들이 자식은 언제 그렇게 많이 만들었는지―"

"잠깐, 안 죽는다뇨. 그러면 우리도 안 죽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안 죽을 텐데 심각할 필요 있어요?"

"굉장히 긍정적이군요. 회당 문은 열리지도 않고, 황태자님만 혼자 애쓰시는 중이고, 황제 폐하는 물론 타마기스의 주인께서도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한데."

"긍정의 힘은 좋은 거예요. 늙은 신께서 길러 주신 미덕이죠."

사무관은 머리를 옆구리에 낀 채로,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돌아갔다. 궁정 마법사와 결투를 벌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터였다. 그제야 다이사트는 이불을 떨치고 일어났다. 몸이 뻣뻣한 게 마치 모래를 담은 가죽 부대를 이끌고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는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았다. 손가락은 살갗이 벗겨져 하얀 관절을 드러냈고 콧등에는 붉은 곰팡이가 홍조처럼 돋아 있었다. 목에 마력 칼날을 날리자 뼈가 잘려 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시야에 두 다리가 들어왔다. 다행히도 통증은 없었다. 다이사트는 허리를 수그려 머리통을 주워 들었고, 잘 붙인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대로 향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바깥은 햇살로 가득했지만 수목원에는 맥없도록 하얀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잎사귀병이었다. 사람이 썩었으니 이제는 나무까지 병드는 모양이었다. 다이사트는 침대에 앉은 채로 창밖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환한 하늘에서는 아무런 일정 없는 휴일 특유의 한갓짐이 느껴졌다.

침묵을 침묵으로만 즐길 수 있었던 나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고향에서는 그런 일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의회에 들어찬 귀족들은 서로에게 고함을 쏟아내다가도 바깥으로 나오기만 하면 금방 조용해졌다. 타마기스는 반대였다. 아주 크고 강렬한 울림이,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그 지긋지긋한 소리들은 이제 사라졌다.

다이사트는 싱그러운 풀밭에 혀를 쭉 빼물고 앉은 개처럼 웃었고,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함부로 꿈에게 덤볐다가 평안을 깨트릴 마음은 없었다. 무의식은 대개 의식보다 교묘하고 사악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굴곡도 야망도 없는 몽상 속에서 며칠이 훌쩍 지나가더니 연휴가 끝났다. 여전히 수목원은 희게 물들어 있었고 윰 시밀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제야 다이사트는 자신이 불가능한 황홀감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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