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41화 (242/258)

241화 제국의 기계들 (4)

어린아이들은 모든 곳에서 명확한 이유를 발견하려 한다. 포석의 홈을 따라 흐르던 수천 갈래의 물줄기가 하수도에 모이듯 그 부단한 왜, 왜, 왜 하는 물음의 끝에도 하나된 지혜가 있으리라고 믿는 것처럼. 하지만 대부분의 이유는 부조리하고 허망하다. 그걸 설명하려는 노력조차도.

다이사트는 자신이 여기에 와 있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은빛 휘장 너머의 제대(祭臺)를 바라보았다. 수정 심장이 담긴 언약궤는 누구도 열지 못하게끔 다른 네 신의 힘으로 봉해져 있었으며 그 밑의 단검 조각 또한 그랬다. 둘은 한 쌍이었고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부터 그렇게 멈춰 있었다.

나우파나 귀족들은 삶의 질곡을 거칠 때마다 특별히 지성소에 들러 기도를 올렸지만 구원을 바라지는 않았다. 수정 심장은 내뱉는 찰나 쓸모를 다하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이야기들을 위해서만 존재했고, 시민 각각은 그 사실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가졌다.

어린 시절의 다이사트는 내키는 대로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은밀한 자부심을 키웠지만 타마기스의 주인에게 숭배 서약을 올린 후로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윰 시밀의 시종이 다른 도시의 일에 뿌듯함을 느껴서야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관식 보름 전에, 지성소까지 와서 언약궤를 앞에 두는 건 괜찮단 말인가.

황태자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나우파나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러 왔다니 황궁 시종도 코웃음 칠 일이다. 그래도 윤허를 받았으니 별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한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옆을 보았다. 무수한 반짝임이 집요한 벌레 떼처럼 바닥과 벽과 천장을 갉는 가운데 묵색 예복을 걸친 소년이 그 복판에 이물질처럼 서 있었다.

소년은 다이사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왜, 내가 이곳까지 따라와서 언짢은가? 옛 주인과의 독대를 방해해서?"

"아닙니다. 다만……."

"다만?"

윰 시밀의 반문에 다이사트는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피차 알고 있는 걸 묻는군 그래. 혼자 있는 기분이라도 내려 고향에 왔는데 그걸 기어코 따라오다니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지. 애당초 타마기스의 주인이라는 게 한가하게 나들이나 다닐 위치란 말인가. 세카두인지 거지촌인지 하는 곳에 역병을 퍼붓는다면 할 일도 생기고 그 뒤틀린 심성도 만족시킬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는지 모를 노릇이다.

"야스와다의 주인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별이 잇달아 여덟 개나 뜬 게 언제였던가, 바로 다음날 타마기스로 본신을 이끌고 오더니 세카두를 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지 뭔가. 내버려두라고 했어. 우리가 지금 쓰는 주문의 반절은 전쟁 시기에 고안된 것들이야. 시간을 들여서, 상대할 만하지만 버겁지 않을 적수로 길러낸다면 제국에 큰 도움이 되겠지."

"그래도 언젠가는 청소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치워 없애는 건 너무 구식이란 말이야. 나는 조금 다른 걸 계획하고 있어. 생각이야 예전부터 해 두었지만 마땅한 계기가 없었지.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고. 내게 인간과 요정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것 같나?"

"별 차이가 없으시겠지요."

"인간은 빠르게 죽는 대신 빠르게 성숙하지. 그건 엄청난 장점이야. 난폭하고 미움이 많은 걸 덮고 넘어갈 만큼 큰 장점이지. 심지어 탐욕스럽기까지 해. 요정들처럼 사랑하는 사람 하나를 위해 모든 영예를 내던지는 일이 덜하단 말이야. 어차피 노예 신세일 텐데도, 그것들이 작은 인정이라도 얻어내려 얼마나 악착같이 달려들던지 생각해 봐. 거의 굶주린 벌레 떼 같지. 한 번 품은 악의는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고."

"전 그게 역겹습니다. 신의 관점은 모릅니다만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역겹다라―누차 말했지만 나는 그런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 하지만 죽을 이들의 잣대로 보자면 자네도 추잡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나 또한 다를 바가 없고. 참, 자네에게 악감정이 있어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니 겁먹지는 말아."

다이사트는 답하지 않았다. 윰 시밀은 밝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어 말했다. 인간들은 분노와 미움으로 움직이지만 이상한 질서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태어난다고, 화가 많은 성정과 그 질서가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 그들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낸다고 했다. 자신이 보기에 요정들이 서로를 쉽게 망가뜨리고 쉽게 용서하는 것과 인간들이 분노를 참아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그러니 나는 이런 생각을 해. 인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똑같이 시민이 될 권리를 주장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지. 우리네 역할은 인간들의 신과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다가 못내 승복하는 척 물러나는 것뿐이야. 그쪽에게도 손해는 아닐 테고. 찬란함에 한 겹을 덧씌우는 게 흙바닥에 오두막을 짓기보다 쉬운 법이 아니겠나."

다이사트는 나우파나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혼공학 실험을 떠올렸다. 인간의 영혼에서 공격성을 제거하고 마법적 능력만을 대폭 증가시키는 작업이었다. 윰 시밀이 반대파의 염려를 쳐내고서는 허가를 내준 데에는 이런 저의가 숨어 있었을 터였다. 인간마저도 제국의 번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는 명이 짧은 족속들로만 이루어진 도시를 상상하다가 그만두었다. 욕심을 부리느라 예산을 죄다 빼돌리고 책임도 못 질 거짓말을 신나게 해댈 텐데, 그런 와중에도 미움은 실컷 쌓이기만 할 텐데 백 년이라도 버티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습성은 일꾼의 미덕이지. 하지만 그렇게 질주해 나가려는 사람만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냔 말이야.

나우파나 의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노친네 이백오십 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한 마디라도 더 내뱉으려 혈안이 된 걸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만 현기증이 났다. 신이 멈췄으니 의회의 말이 곧 신의 말이 된 것이다.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그걸 두고 꼭 인간 같다며 조롱하곤 했다.

하지만 그 노친네들조차도 단순히 의견이 갈린 것에 미움을 간직하고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인간은 자주 그랬다. 재물이나 직분을 잃은 것도 아닌데 다만 기분이 나빠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니 그들에게 회의를 시켰다가는 이백사십구 명이 다함께 서로에게 칼을 꽂고는 늦잠을 잔 게으름뱅이 하나만 어정어정 걸어와서 의사봉을 두드릴 것이다.

다이사트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반란이 일어나든 인간들이 서로 싸우든 자신의 소관은 아니었다. 그건 신들끼리 알아서 고민할 일인 것이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알겠습니다. 아득한 세월 동안 제국을 거느리신 분께 백 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가 무슨 훈수를 둘 수 있을 리가 없지요. 다만 제게 이러시는 건 어디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프로파나티카를 특별히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오래도록 함께 지내온 사람을 향한 온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감정은 한가롭게 찻주전자를 기울이고 사소한 말다툼을 봉합하는 데에는 도움이 됐지만 이런 문제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방해가 될 지경이었다. 소용없는 고민만 실컷 안겨준다는 점에서 그랬다.

스무 해만 떨어져 지내면 잊을 아이긴 해도 자라나는 걸 줄곧 보았단 말이야. 그런 애를 악몽으로 밀어 넣고서도 편히 잠들 사람은 없지. 하물며 애완 칼린카를 제 손으로 죽여도 밤잠이 편치 못할 텐데. 물론 스승이 누구든 간에 일어났을 일이겠지만, 궁정 마법사 따위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감을 모두 떨쳐내는 게 가능할 리가 있나.

속으로 기나긴 불평을 늘어놓은 다이사트는 고개를 들어 정면의 제대를 바라보았다. 옛 주인 앞에서 이러고 있자니 죄스럽기만 했다. 먼 옛날 아 드지즈는 윰 시밀에게 항거했다가 심장이 뜯겨 나가는 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수정 심장은 산산이 금이 간 채로, 상자 안에만 잠들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윰 시밀은 제국의 주인이자 나우파나의 원수가 되는 셈이었다. 정작 제국은 나우파나를 반역자의 도시로만 여기고 있지만.

언약궤로부터 수정 거수가 자라 나와 건방진 소년을 때려죽이는 심상이 눈앞에 번뜩이는 순간 윰 시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할 만큼 유쾌하게 들렸다.

"자네는 저 깨진 단검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지?"

"나우파나의 주인께서 쓰던 것이라고만 배웠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을 벌한 일은 얼마나 알고 있나?"

"역사서에 남은 정도로만 압니다. 반역한 다섯 아들딸을 죽여 없앴다고요."

"좋아, 내가 자네에게만큼은 특별히 사실대로 말하겠어. 저 단검이 바로 그놈들의 무덤이야. 왕홀을 만들라고 시켰더니 귀한 재료로 헛짓을 하지 뭔가. 단검에 영혼을 여럿 가두면 땅을 마음껏 바꾸고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거야. 그래서 녀석들을 제일 먼저 가둬 주었지."

단검이 속박으로부터 풀려 나와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다이사트의 앞에서 멈췄다. 날 부분의 반절이 깨져 나간 단검은 빛마저 집어삼킬 것처럼 검었고 반사광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먼 세계로부터 떼어져 나온 듯한 파편을 내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년의 목소리는 미소만큼이나 매끄러웠다.

"내 처사에 불만이 많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러니 붙잡아 봐. 이 도시만큼은 자네 소관으로 만들 수 있을 테고, 어쩌면 내게 대적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그래, 언약궤를 열어 줄까? 심장을 가져 보는 건 어때?"

다이사트는 윰 시밀을 잠깐 보았다가 땅에 머리를 박고서는 도망쳤다고 믿는 짐승들처럼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지성소는 아무런 가망 없이 밝았고 빛의 파편은 눈물의 막을 거쳐 들어오듯이 곳곳에 어룽져 있었다. 천천히 입을 벌리는 언약궤… 단검 조각은 소년과 자신 사이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손을 내밀면 곧바로 잡힐 거리에. 손에 담기만 하면 황제만큼은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뒤엉킨 생각 속에서 팔과 다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순간 세상이 빙글 돌더니 차가운 돌바닥 위에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청년만을 남겨 놓았다. 그는 자신이 팔을 뻗은 채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주저앉았음을 깨달았고, 타마기스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가슴팍이 즐겁게 들썩이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밝고 컸다.

"좋아, 바로 그 자세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훌륭해."

다이사트는 텅 빈 공간 속에 그 소리와, 자신과, 늙은 신만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 또 장난에 휘말렸군. 당신한테는 멈춘 신이니 성물이니 하는 것마저도 장난인 거야. 인간의 신은 놀이터에 새로 나타난 놀이 상대일 뿐이고. 그리고 나는…….

윰 시밀은 그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단단히 움켜쥐고는 들어 올려 시선이 자신을 향하게끔 했다. 가느다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하얀 치열을 드러냈다. 송곳니가 수정을 씹어 삼킨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조언가 장치를 정지시키는 법을 알려주지. 대관식을 치른 다음, 황자를 풀어 주고 싶다면 그렇게 해. 원한다면 어느 때라도. 선택은 자네 몫이고 책임도 자네 몫이야."

이제 결정권은 다이사트의 몫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삶과 스스로의 삶 중에서 택하는 것이 정말로 자유인지 묻고 싶었지만, 이런 순간조차도 윰 시밀의 장난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주제넘은 일이었고 타마기스의 주인은 항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