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제국의 기계들 (3)
아니스는 늑대인간들이 그런 것처럼 빠르게 어른이 되었고 프로파나티카도 천천히 삶의 궤적을 따라 나아갔다. 그녀는 매일 삼두정의 곁에 섰고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는 동안 프로파나티카는 황태자 직분이 영광스러울 수는 있을지라도 환한 빛 위에 떠오른 뒷모습만큼 찬란하진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황태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엇비슷하게 키가 크고 목소리가 부드러운 청년이었다. 그는 어린 누이를 사려깊은 태도로 대했지만 프로파나티카는 그것이 시민들을 향한 자애 이상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필요한 것만을 이야기했고 항상 온유했으며 소리높여 말하지 않았다. 황태자에게 있는 것은 오직 관점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와그다스 학자의 관점. 야스와다 명문가의 관점. 농경지 관리인의 관점.
그녀는 황태자와 호위무사를, 둘만이 있는 순간을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호위무사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황태자도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둘은 다만 서로를 떠받치도록 완벽히 조율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게 있는 평온함이란 산 자의 것이 아니라 환영 그림에 아로새겨진 것인 듯했다. 손을 가져다 대더라도 반응하지 않고 각인된 대로만 어른거리는 형상처럼.
프로파나티카는 자신이 매혹이라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
착각이라면 다른 설명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없었다.
* * *
대관식을 치르기 직전의 한 해는 안식년이었고, 그때 황자는 생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싸구려 소설을 읽는 것도, 온종일 별점술사를 붙들고 점괘를 얻어내는 것도, 스승을 만나는 것도 모두 자유였다.
프로파나티카는 침실에 설치된 호출기를 통해 다이사트에게 알림을 보냈다. 황궁 곳곳에 세워진 새 조각상은 윰 시밀의 본상을 본뜬 것으로 삼두정의 방문이 너무 갑작스럽지 않도록 미리 예고하는 역할을 했다. 외곽지에 다다른 프로파나티카는 아니스를 근처의 큰 나무 밑에서 기다리게끔 한 다음 홀로 자그마한 목조 주택을 향해 갔다. 뒷뜰에서, 궁정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은 청년이 빨개진 얼굴로 나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이사트!"
"아―"
어조에 잠시 망연자실한 기색이 묻어 나오더니 금방 사무적인 태도로 변했다.
"궁정 마법사가 황실의 일원께 예를 갖춥니다."
다이사트는 악기를 내려놓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청년을 다시 앉힌 뒤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동자가 기름에라도 담갔다 뺀 것처럼 번들거렸다.
"울고 있었던 거야?"
"아닙니다, 황자님. 나팔을 불면 금세 숨이 막히고 얼굴이 붉어지지요."
"초심자나 그런 게 아니야? 연습을 그렇게나 많이 하고서도 실력이 항상 제자리라니 신기한걸."
"재능이라는 게 공평하진 않으니까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더 묻지 않도록 하지."
협탁 맞은편에 앉은 프로파나티카는 탐탁찮은 투로 턱끝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다이사트가 혼자 있을 때에는 곧잘 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고향이 그리워서, 황궁에서의 삶이 버거워서 그러려니 짐작할 뿐이었다. 하기야 겨우 반 세기를 넘긴 청년이 궁정 마법사 직함을 달고 다녀야 한다면 부담이 클 것이다. 황궁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뒷말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노인들은 프로파나티카가 지금의 황태자와는 어딘가 다르다고, 스승이 너무 젊은 탓이 아니겠느냐고 수군거리곤 했다. 가끔은 그가 나우파나 출신이라는 것마저 문제가 되었다. 제국 시민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 도시는 놀랄 만큼 불경스러운 족속이 모여 사는 곳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마기스의 주인께서 직접 선택한 일에 다이사트가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프로파나티카가 아는 윰 시밀은 냉담하면서도 자애로운 주인이었다. 그는 오로지 제국의 시민에게,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했다. 나우파나 젊은이를 스승 자리에 앉혀놓은 것도 최선의 선택이었을 터였다… 그 자신은 이걸 영예보다는 굴레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다이사트도 대관식이 끝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잘 된 일이지.
순간 얄궂은 부러움이 치밀었다. 가끔은 황궁을 떠나 평범한 요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직분을 멍에처럼 짊어지는 게 아니라. 그녀는 심약한 청년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 아무렇지도 않은 담소를 나누는 것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전자를 골랐다. 당장 몇 달 뒤면 이것마저도 지난 일이 될 터였다.
"소설을 읽었어. 시내에서 팔리는 것 말이야."
"걱정이 되는군요.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것들은 대개 천박하고 저속한 내용뿐이에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흥미를 가질 만한 책을 찾으시려거든 황궁 도서관을 둘러보시길 권합니다. 아니면 와그다스의 주인께 부탁을 드리는 것도 좋겠지요. 그분께서는 글자로 적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까요."
"또 잔소리야. 나는 이제 성년식도 치렀는데. 너랑 같은 어른이라구."
프로파나티카는 투덜거리고서는 소설의 배경을 읊기 시작했다.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의 먼 과거에는 죽은 이의 영혼이 곧바로 갓난아기의 몸에 깃들었다고들 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나는 이들도 수백 수천 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고. 따라서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시는 하나의 가족이었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의 자식이자 어버이였다.
"옛이야기를 고쳐 쓴 소설인가 봅니다. 저도 어릴 적에, 잠자기 전에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기억을 잃은 채로 태어나게 되었다고요. 사람들이 핏줄에, 가문의 이름에 얽매이기 시작한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요."
"나우파나에만 있는 설화라더군.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 도시는 예전부터 조금 달랐으니까. 아주 불경한 농담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고, 이야기꾼들은 이상한 상상을 늘어놓지……."
"황자님, 비록 제가 그곳에서 나고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저는 타마기스의 시종일 뿐입니다. 만약 제 부덕을 의심하시는 것이라면,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네게 뭐라 하려는 건 아니야. 황궁 구석자리에서 나팔 연습만 하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부덕이 있겠어. 물론 네 연주 실력은 신성모독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질문을 하려는 거야.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어떨까? 혈통 같은 자격은 사실 만들어진 거고, 내가 꼭 황태자일 필요가 없다면 어떨 것 같아?"
그녀는 순간적으로, 다이사트의 표정이 난처한 듯 일그러지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얼굴이 잠깐은 위안이 되더니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이게 악취미라는 건 알고 있었다. 도시의 주인은 시민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다이사트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윰 시밀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황자님, 말씀드렸지만 그런 곳에서 팔리는 책들은 보통 읽을 가치가 없는 것뿐이에요. 타마기스의 주인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실 테고요. 그분은 땅의 모든 역사를 알고 계시니 그 소설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도 아실 겁니다."
"나는 그게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가 궁금한 게 아니야. 그냥 상상을 해 보라는 거야."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문제를 결정해야 할 때에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래야 할 테고요. 하지만 허무맹랑한 망상을 두고 이러면 어떨까, 하고 묻는 건 낭비일 뿐이에요."
"지금은 안식년이야. 얼마든지 낭비해도 되는 시간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말해 봐."
다이사트는 프로파나티카를 빤히 바라보았고, 머리 위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듯 눈을 감은 채로 가볍게 묵례했다. 대답은 그러고서도 심장이 너댓 번은 뛸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작되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옛사람들은 우리를 비웃을 거예요. 이상한 구분을 만들어서 필요 없는 예식을 지킨다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그때의 땅과 지금의 땅은 다르며, 그때 옳은 것이 지금도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구분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농장 관리인이 되어야만 하고 누군가는 황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됐어, 재미없어. 여기까지만 들을래."
프로파나티카는 손을 휘적거리며 말허리를 끊었다. 이런 대답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생각이 있다 쳐도 윰 시밀의 시선 아래에서는 내어 놓지 못할 터였다. 하기야 다이사트에게서 정론 이상의 것을 들으리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 단지 심통을 부리면서 푸념을 늘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다이사트의 얼굴에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대관식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나보지. 줄곧 자격이 없다느니 하는 험담에 시달린 판에 황자에게는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프로파나티카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가 나팔을 마저 조율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윽고 삑삑거리는 소리 사이로 침묵이 부풀기 시작했다.
정적 속에서 프로파나티카는 재차 황태자와 호위무사의 모습을 곱씹었다. 그들이 괴로워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그녀는 익숙한 고통의 언어로는 해명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고, 자신은 거기에 어울리는 낱말을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뿐이라고 의심해 보았다. 의심일 뿐이었다. 그녀는 앙상한 의심에 살을 붙이려 애쓰기를 멈추고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묻기로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이 있었다.
* * *
아니스는 나무그늘 아래에 서서 황태자를 기다렸다. 햇살은 다섯 걸음 앞에서, 눈이 시리지도 우울하지도 않을 정도의 세기로 땅을 밝히고 있었다. 때때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쏴아아 하는 소리를 몰고 왔다. 눈을 감고 고요를 즐기던 아니스는 문득 풀잎 냄새 사이에 익숙한 향기가 섞였음을 깨닫고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프로파나티카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벌써 오신 줄 몰랐습니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남아 있는데, 조금 앞당기도록 할까요?"
"무슨 일정?"
"황궁 별점술사에게 점괘를 물을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에 약속을 잡아 두었습니다."
"으응, 그렇지… 그냥 관둘래. 그런 걸로 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면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사각 도기판을 꺼내들었다. 도기판은 손바닥보다 약간 컸고 슈문의 각인을 통해 황궁 곳곳과 이어져 있었다. 별점술사에게 일정 취소를 알린 아니스는 다음 명령을 청하듯 프로파나티카를 바라보았다. 예민해 보이는 이목구비가 살짝 구겨졌다.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저는 오로지 당신께서 먼저 말씀하신 바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면 타마기스의 주인께서 분부하실 것입니다."
"멍청이."
짜증스러운 목소리에도 아니스는 침묵을 지켰다. 프로파나티카는 그녀를 빤히 노려보다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무 생각도 없는 주제에."
순간 양광이 나뭇잎 사이 좁은 틈에 몰려들어 송곳 같은 빛을 발하더니 무거운 고요가 사방을 감쌌다. 그녀는 그게 자신의 갈비뼈 사이 우묵한 곳을 지그시 눌러 들어온다고, 그렇게 몸속으로 들어와서 자신을 모두 채워 버릴 거라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자 좁은 틀에 밀어 넣은 반죽이 구멍으로 빠져 나오듯이 눈물이 흘렀다. 프로파나티카는 한층 짙어진 그림자가 어깨를 감쌀 때까지 조용히 흐느끼고만 있었다. 그림자 너머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이것까지도 그날 밤과 같았다. 프로파나티카는 풀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말이야, 나는, 내가 널 잘못 골랐다고 생각해. 골라야 했다면 다른 늑대인간을 골랐어야 했다고 생각해."
소리가 멀리 나아가지도 못하고 가슴팍에 함께 파묻히듯 했다.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묵색 정복 위에 낱말과 눈물이 함께 뒤섞인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했다.
"못난 하인이 되어 송구합니다."
"아니, 넌 잘 하고 있어. 내가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이 잘 하고 있단 말이야. 그게 문제라는 거야. 알겠어?"
"저는 당신을 위해 있습니다. 당신께서 만족하신다면 그것이 제 기쁨입니다."
프로파나티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굴이 엉망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엉망인 꼴은 이미 많이 보였으므로 괜찮았다. 하지만 아니스의 눈에 묘한 서글픔이 비칠 때면, 그게 무뚝뚝한 태도마저 뚫고 올라올 만큼 거세질 때면 그녀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내가 네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하지? 수신인도 있고 낱말도 있지만 그저 출발하지 못한 소리들이 혀 바로 밑에서 들썩거렸다.
"아니스."
"예, 황자님."
"내가 너를 고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고르지 않았어도 그냥 네가 내 앞에 있게 됐다면 참 좋을 텐데. 대관식이니 뭐니 하지 않아도, 영혼이 하나로 묶이지 않아도 계속 이렇게만 있어도 좋을 텐데. 네가 날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면 더 좋을 거야. 나한테 너는 늑대인간이나 호위병이 아니라 항상 아니스였는데."
프로파나티카는 아니스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온기와 함께 두근거리는 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그녀는 마저, 토해내듯 말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건 알아. 나는 널 마음대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너는 아니니까. 그러니까 사실 이름을 부른다거나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진짜 문제는 내가 널 고르기만 했지 네가 날 고를 수는 없었다는 거야. 내가 준 선물이 사실은 악몽일 수도 있는데, 너는 그걸 거절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울지 마십시오, 나의 프로파나티카. 나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수천 번은 떠올렸지만 귀에는 낯선 목소리가 흐려지는 말끝 위에 몸을 겹쳤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환한 기운이 봄의 햇살처럼 번져 나가며 다른 것들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야, 그거로는 안 돼."
프로파나티카는 검은 눈 위에 어룽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그 대답에 걸맞은 것을 바쳤다.
"내가 널 골랐으니까 나도 나를 줄게. 언제라도, 아주 먼 나중에라도, 내가 네게 끔찍한 사람이 되면 나를 죽여. 이건 명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