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제국의 기계들 (2)
윰 시밀에게 간택 받은 후로 다이사트는 나우파나를 떠나 황궁에 머물렀다. 외곽지의 작은 목조 건물이 그의 거처였다. 관목림을 등진 뒤뜰은 원탁과 새 모양의 조각상을 제외하면 볼 게 없었다. 하지만 본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장소일지라도 다이사트는 이곳이 좋았다. 여기에 혼자 있을 때에는 제국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프로파나티카의 스승이 되고서 긴 시간이 흘렀지만 다이사트는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잠시 끼워진 책갈피 같은 존재라서 종잇장 바깥의 존재가 원하는 대로 자리가 바뀐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 일시적이고 변덕스러운 개입을 삶의 자연스러운 질곡인 것처럼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려 보아도 자신이 가리키는 문장이 책의 초입인지 말미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기나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다이사트는 줄곧 우울에 시달렸다.
다이사트의 불행은 그의 우수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타마기스의 주인은 나우파나 젊은이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회동에 동행시키거나 직접 그의 거처로 가 독대하기도 했다. 흥미의 영역은 황자의 교육에 대한 것 이상이었다. 윰 시밀은 프로파나티카가 황태자 직분을 물려받은 뒤에도 그가 타마기스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맑은 정신으로. 독안개 속에서 마음껏 숨을 쉬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불충한 속마음을 모두 듣고서도 윰 시밀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사트는 타마기스의 주인만큼 너그러운 이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너그러운 존재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너그러움이란 그 명세를 고민하지 않고 베풀 수 있는 이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밑도 끝도 없는 여유를 조금 덜어 나누기만 하면 그걸 받은 사람이 곧바로 홀가분해질 것이라 믿는 습관이 있다. 자재와 인부와 설계도면을 땅에 놓는 즉시 건물이 솟는 줄 아는 사고방식으로 제국을 이끌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하기야 신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맡은 일을 하면 그만이다.
그의 정신은 맡은 일을 그럭저럭 해내는 정도와 침대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도를 오갔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윰 시밀이 권유하기를 취미를 가져 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다이사트는 그걸 명령으로 알아듣고는 악기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재능이란 불공평하면서도 공평한 면이 있기 마련이라서 그는 음률이나 박자에 대해서는 마법만큼의 소질을 보이지 못했고, 급기야 윰 시밀마저 다른 분야를 찾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이사트는 더 큰 소리로 나팔을 불어 댔다. 타마기스의 주인은 소극적인 항명까지도 너그럽게 눈감아 주었고 평소와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 * *
"낭만은 일종의 광기야. 통제되지 않는 열망이지. 이기심이나 냉혹성과는 다르게 그 자체로 모든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이야. 거기에 비하면 반항심은 문제조차 아니야."
연죽(煙竹)을 한손에 쥔 요정 소년이 말했다. 한쪽 옆머리만을 땋은 소년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것처럼 몸집이 아담했다. 목덜미까지 닿는 암녹색 머리카락은 목소리만큼이나 매끄러웠고 속눈썹은 솜털 같았다. 다이사트는 소년의 맞은편에 앉은 채, 마른 입술을 잘근거리며 생각했다. 이 늙은이도 참 취향이 고약하지. 이 궁전보다도 오래 살아놓고 꼴이 그게 뭐야. 물론 해골 모양으로 돌아다니라는 뜻은 아니지만 회춘에도 정도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이런 마음조차 읽힐 게 분명했지만 다이사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는 나우파나 출신이었고, 그곳의 주민들은 대개 이런 종류의 신성모독에 익숙했다. 속내를 들여다볼 주인이 멈춰 있는 까닭이었다. 깨진 심장은 언약궤에만 모셔져 있었고 귀족 가문 총회가 도시의 대소사를 결정했다. 만약 모든 도시의 신들이 그랬더라면 세상은 조금 더 나쁜 곳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잠자리는 편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이건 들키는 삶은 사람이 살 만한 것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이 거기에 가 닿는 순간 윰 시밀이 연죽의 물부리를 가볍게 깨물었다. 눈앞이 잠시 매캐한 기운으로 흐려지더니 소리가 연기를 뚫고 다가왔다.
"그러니까 이런 반항심 말이지."
"송구합니다."
다이사트는 고개를 수그리지도 않고 건성으로만 답했다. 이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는 윰 시밀이 자신의 불충한 태도를 눈감아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즐긴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세계를 완벽하게 조율한 나머지 더 이상 참견할 게 없어진 통제광이 도착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항할 힘도 없는 나우파나 젊은이가 실컷 투덜거리는 걸 들으면서. 노망도 이런 노망이 없지.
하지만 그 노망이 제국을 지탱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별의 흐름이 뒤틀렸고 산맥 근처에서는 도망친 노예들이 작당을 벌인다지만 어쨌거나 제국은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인구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범죄율은 일반적인 수준 내에서 꾸준히 감소했다. 불행에게 선택당한 몇이 미쳐 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땅의 모든 곳은 완벽히 평화로웠다. 다이사트는 자신이 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한동안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신경쇠약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아무리 충성스러울지라도 능력이 부족하다면 의미가 없어. 반대로 무엇이든 해낸다면 속내 따위야 별로 중요하지도 않지. 마음으로 수천 번은 반역을 저지르더라도 내 뜻을 따르면 그 사람은 충신이야."
"그렇군요."
"자네는 수줍고 겁이 많은데다가 현실적인 성격이지. 도망칠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가 확실하다면 곧바로 붙잡겠지만 그런 행운은 결코 없으리라는 걸 알아. 그렇다고 해서 내 얼굴에 찻잔을 내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다는 식으로 출로를 찾을 용기도 없어."
"칭찬으로 여기고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래, 칭찬이지. 훌륭한 미덕이야. 반면 프로파나티카는―"
황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익숙한 구역질이 턱밑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프로파나티카는 조만간 대관식을 거쳐 황태자로 완성될 터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공평히 헤아리면서도 사감이나 충동에는 일절 휘말리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일이지. 그만큼 끔찍한 일이고. 나는 당신이 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알아. 그러니 손자나 손녀 따위는… 다이사트는 대관식이, 문서화된 절차도 참관객도 없이 네 도시의 주인만이 모이는 그 의식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 애는 너무 낭만적이야. 몽상가 기질이 있지. 꿈을 너무 단단히 믿는 탓에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은 기꺼이 의심한단 말이야. 마흔 해 뒤가 아니라 당장 다음날에 주문이 풀린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군."
궁정 마법사를 열 명쯤 끌고 다닐 수 있는 존재가 늑대인간에게만 호위를 받아야 한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건 다만 겉치레일 뿐이다. 조언가 장치는 한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장악하는 만큼 몇 가지 제약이 따라붙었다. 그 영향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한 명 이상의 영혼이 필요하다는 것. 만약 평범한 요정에게 장치가 삽입될 경우 마흔 해 이내에 완전히 미쳐 버리고, 장치까지 오염될 우려가 있다는 것.
늑대인간과 황태자의 영혼을 하나로 묶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었다. 세 종류의 영혼은, 즉 인간과 괴수와 요정의 넋은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황태자의 의식이 붕괴되지 않도록 도왔다. 강화된 뼈는 전투 능력을 증강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차적으로는 이 마법을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고작해야 두 세기를 살다 가는 요정들이 맡을 시술은 아니었다. 슈문이 장치와 각인을 설계했고 이시 타브와 이시 첼이 그 작업을 주관했지만 그러고서도 문제는 남았다. 호위무사와 황태자의 유대가 충분히 견고하지 못할 경우에는, 둘 중 하나라도 절차에 강한 의문을 품을 경우에는 주문이 힘을 잃을 수 있었다. 제국의 긴 역사에 비해서는 찰나라고 해도 좋을 순간일지라도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났다.
메슥거리는 느낌이 현기증으로 변해 다이사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는 가까스로, 가슴팍에 남은 공기를 끌어 모아 답했다.
"잘 될 겁니다."
"잘 되어야지."
그러고는 긴 침묵이 있었다. 윰 시밀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본 채 생각에 잠긴 태도로 연죽을 입에 머금었다. 기다란 설대를 빠져나온 연기가 그들을 감싼 공기에 매운 느낌을 더했다. 다이사트는 이 빙퉁그러진 소년에게 달려들어 연죽을 반으로 쪼개 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비참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신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자네도 황태자로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지?"
넌지시 묻는 목소리에는 통보와도 같은 냉랭함이 깃들어 있었다. 다이사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윰 시밀을 마주보다가 그만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바로 타마기스의 주인이 그의 불충을 관용하는 세 번째 이유였고 황자의 스승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들은 황자를 교육시켰고 수행원으로서 함께 다니며 황궁의 일을 배웠다. 그리고 황태자가 예정보다 일찍 쓸모를 다할 경우에는 임시로나마 조언가 장치를 삽입한 채 그 역할을 대신해야만 했다.
도피에는 담대함이 필요했지만 다이사트는 소심한 이들만의 방식으로 탐욕스러웠다. 그는 호수에 머리끝까지 잠겨 있더라도 기적적인 행운만 내려온다면 옷이 마를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처럼 삶에 매달렸다. 윰 시밀은 그 면모를 특히 아꼈다. 지극히 사람답거니와 가망 없이 비겁하다는 점에서 그랬다. 진정한 충성이란 명분이나 정의나 신념 따위가 아니라 추잡함에서 온다는 것이 늙은 신의 지론이었다.
"그렇… 습니다."
이윽고 다이사트는 고통스럽게 인정했다. 윰 시밀의 입가에 냉담하면서도 가학적인 미소가 일었다.
"방법이야 상관없으니 프로파나티카가 다른 꿈을 꾸게 만들어. 직분을 겸허히 받아들이게끔 하란 말이야. 마흔 해는 짧은 시간이고 후계를 하나 더 만드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자네에게는 평생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다이사트는 내면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언가 말했고 대답을 들었지만 정작 내용은 떠올리지 못했다. 이마가 뜨거웠는지 차가웠는지, 머릿속이 윙윙거렸는지 텅 비었는지 하는 것조차도. 그렇게 윰 시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뒤뜰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에야 유예된 감각이 되돌아왔다.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연신 헛구역질을 토해냈다. 게워져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내장이라도 쏟아내고 싶었다. 오래도록 현기증에 지축이 울리더니 어느 순간 새 소리가 귀를 찔렀다. 다이사트는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새 조각상에 박힌 보석 눈이 빛나고 있었다.
황자의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