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제국의 기계들 (1)
제국의 황태자들은 마흔 살에 그 직분을 받들었고 백스무 살에 죽음을 맞았다. 그것은 신의 뜻이었으므로 황태자는 감히 반역하지 않았으며 더한 삶을 바라지 않았다.
열 살이 될 적에, 아직은 평범한 요정일 수 있었던 시절에 프로파나티카는 황태자와 그 뒤를 따르는 호위무사를 처음 보았다. 묵색 옷을 걸친 둘은 타오르는 양광 속에서도 스스로의 색채로 빛났다. 그들은 사위어가는 빛의 길을 지나 회당으로 사라졌지만 그 후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걷는 요정과 늑대인간의 모습은 강렬한 섬광을 보았을 때 남는 잔상처럼 눈꺼풀에 어른거렸다.
별채로 돌아온 프로파나티카는 황태자와 그 호위무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녀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대관식 날 둘의 영혼이 주문으로 단단히 얽매인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보다도 존귀한 요정 하나와 투기장의 늑대인간 노예 하나. 그 아득한 거리가 한 점으로 좁혀지는 관계는 부조리한 만큼 강력한 운명 같았다. 그 운명의 결말이 언제나 죽음일지라도.
프로파나티카는 책의 결말을 안다고 해서 금방 흥미가 식어 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의 여백을, 아직은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황태자로서의 삶을 다양한 몽상으로 채워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호위무사의 모습은 미결로 남았지만 프로파나티카는 여든 해를 함께할 늑대인간이 자신에게만은 아주 특별한 존재일 거라고, 처음 본 순간 곧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 * *
다이사트는 뒤로 쓸어 넘긴, 연한 모래 빛깔 머리카락이 친근한 인상을 주는 젊은이였다. 그는 나우파나의 귀족이자 궁정 마법사로서 차기 황태자의 교육을 도맡았다.
사람들은 아직 반세기도 살지 못한 청년에게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맡긴 데에 우려를 표하곤 했다. 다이사트 스스로도 비슷한 궤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궁전 회당에 발을 내디딘 것은 열 해 전의 일이었다. 그때 다이사트는 연휴 주간의 사절로서 일행의 말을 경청하기로만 되어 있었다. 회당에서 발언하는 대신 그저 참관하기로. 성년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였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엄청난 영예였다.
타마기스의 주인은 그에게 더한 영예를 안겼다. 윰 시밀은 모두의 뒤편에서 공손히 고개를 숙인 청년을 발견했고, 그를 대원 한가운데로 불러와 몇 가지를 물었다. 양옆에는 바단과 야스와다의 주인이, 각자의 도시에서부터 출발한 환영이 있었다. 대화를 끝내며 윰 시밀은 그에게 궁정 마법사의 직분을 내렸고 아직 열두 살이었던 황태자의 교육을 맡겼다.
그날은 다이사트에게 조금은 불쾌하고 조금은 환상적인 마법 같았다. 먼 옛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서는 무아지경 속에서 수천을 도륙했다는 야스와다의 마법사처럼. 그는 이시 타브의 환영이 얼마나 투명했는지, 그녀의 몸을 통해 본 우상단의 기둥이 어떤 색이었는지, 자신의 귀가 얼마나 뜨거워졌는지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무슨 말이 오갔는지만큼은 영영 기억하지 못했다.
참관객들에게 물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질문의 첫 어절을 발음하기도 전에 번번이 좌초되었다. 모든 예상은 각자의 불안을 껴안고 있었다. 끔찍한 대답을 했는데도 간택받은 것이라면 윰 시밀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긴장 속에서 낸 대답이 평소보다 훌륭했더라면 과분한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다이사트는 둘 중에서 무엇이 더 나쁠지 상상할 수 없었고, 그래서 침묵을 지켰다.
그 수줍음이 바로 다이사트의 행운이었다고 진단한 사람도 있었다.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무언가를 말했기 때문에 윰 시밀이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 대답 자체나 주문에 대한 재능은 부차적이었으리라고. 다이사트는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무렴 상관없다고 너스레를 떤 다음 이마저도 그런 주장에 보탬이 되고 있음을 깨닫고는 조금 웃었다.
정답을 알게 된 것은 직분을 받고서는 몇 해가 지난 뒤였다. 추측과 거의 비슷했다. 이번에도 다이사트는 조금 웃었지만 일전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 * *
프로파나티카는 난간에 몸을 바짝 붙인 채 2층 테라스에서 바단 중앙 투기장의 훈련장을 내려다보았다. 바단의 귀족들과 타마기스에서부터 따라온 수행원 몇이 근처에 모여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늑대인간들에게만 쏠려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바로 옆에 선 남자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다이사트! 다이사트!"
"황자님, 다른 이들 앞에서는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궁정 마법사를 불러서는 안 돼요. 장차 이 제국을 이끄실 텐데 지금부터 익숙해지셔야지요."
"그런 거로 잔소리를 하고 싶으면 대관식을 치른 뒤에 하라구. 난 아직 성년식도 안 치렀어. 아무튼 저거 봐! 저거!"
다이사트는 황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두 늑대인간이 인간 형상으로 대련을 벌이고 있었다. 설명은 없었지만 다이사트는 프로파나티카가 말한 것이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땀에 젖은 채, 목덜미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머리카락은 무용수의 옷자락만큼이나 역동적이고 우아해 보였다.
"저 아이로 하시겠습니까?"
"꼭 저 애여야 돼. 안 그러면 황태자 같은 건 안 할 거야."
황자는 대관식을 치르고 황태자 직분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호위무사를 직접 고르는 것만이 프로파나티카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권리였다. 선택된 늑대인간은 궁전에서 함께 교육 받으며 주인을 향한 충성심과 존경을 기르게 될 것이었다. 그 이상의 우애까지도. 다이사트는 슬쩍 웃고는 답했다.
"빼앗을 사람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바단의 주인께서 직접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어쨌거나…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긴 쪽 말씀이시지요?"
"아니, 짧은 쪽. 짧은 쪽이어야 해."
단호한 대답에 다이사트는 재차 훈련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자가 지목한 늑대인간은 체구가 약간 더 큰 것을 제외하면 유별난 점이 없었고, 절제 없이 찡그린 얼굴은 불경하게까지 느껴졌다. 저런 것을 제국 황궁에 들이느니 잘 조련된 괴수 하나를 부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수행원이 아니라 스승으로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프로파나티카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투기장의 총책임자도 바로 옆에 있었다. 그가 내려가 훈련생을 준비시키는 동안 다이사트는 황자에게 무엇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골랐는지 질문을 건넸다. 프로파나티카는 그냥, 이라고만 답했고 다이사트는 그 낱말에 담긴 순진무구한 오만을 생각했다.
가장 순수한 종류의 욕망들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선택만으로 완결된다. 하지만 언젠가는 설명 없이 남은 것에 때늦은 분류표를 구구절절 달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강렬함이 그 자체로 이름이었던 날들을 추억하면서.
다이사트는 그때 황태자가 자신을 무엇으로 기억할지 가늠해 보았다. 추측이 멀리 뻗어가기도 전에 구역질이 훅 올라왔다.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는 것은 그가 윰 시밀에게 숭배 서약을 올리고서는 배운 재주 중 하나였다.
* * *
심장까지도 단어로 바꿀 수 있을 것처럼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부류가 있다. 아니스는 그 반대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텅 비우고 거기에 주인의 목소리를 채워 넣는 데에 익숙했다. 자신을 발굴하는 일에 너무 많은 힘을 쓰는 아이들은 투기장까지 오지 못했다.
아니스는 투기장의 유망주 중 하나였지만 썩 유망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요정 백 명이건 늑대인간 백 명이건 일단 줄을 세워 놓으면 가장 큰 사람과 가장 작은 사람이 나뉘듯 그녀의 순위도 그랬다. 투기장을 관리하는 요정들은 무슨 마라도 끼었는지 요새는 쓸 만한 경기견이 나질 않는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스무 해쯤 전에는 훈련소에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들에게도 우수 훈련생 명패를 달아 줘야 한다고.
이백 명 남짓한 수련생 사이에서 아니스는 십 등 내외였고, 평가는 훈련소에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과 그나마 봐줄 만한 녀석 사이를 오갔다. 황자가 아니스를 호위무사로 점찍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투기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훈련사들은 황궁의 선택이란 산더미 같은 행운과 같은 것이라서 어지간한 사람은 거기에 깔려 죽고 말 것이라며 주절거렸다.
그러나 아니스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런 것처럼 사건에서도 의미를 찾지 않았고, 다만 받아들였다. 결정된 바에 마음으로도 부언하지 않는 태도는 그녀의 한계이자 가장 큰 능력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나아가게끔 하진 못했지만 그 자리에 발을 붙이도록 돕는 힘이 있었다. 어떤 자리건 간에. 아니스는 요정들의 의심과는 달리 황궁에서의 삶에 빠르게 적응했고 새로운 주인을 충성으로 모셨다.
그러나 가끔은 해명을 덧붙여야만 그대로 남는 일도 있다. 황궁의 일원이 되고서는 두 해가 지날 무렵, 한밤중에 프로파나티카가 몰래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니스를 깨워 서쪽 내원으로 향했다. 연못 한가운데에 설치된 장치가 분수를 만들고 있었다. 땅에 스몄던 달빛이 고개를 들고 나와 자신이 온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프로파나티카는 그것이 어둠을 뚫고 치솟으려는 것인지 혹은 어둠에 짓눌리기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황자가 호위무사의 뜻을 물었기 때문에 호위무사는 답했다. 저하께서 보시기에 높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하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황자는 깡마른 팔꿈치로 아니스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갑자기 그녀가 얼간이라고, 아는 것도 없고 깊은 생각은 할 줄도 모른다고, 투기장에서 다른 아이를 골라 왔어야 했다고 짜증을 쏟아냈다.
그녀는 호위무사를 무릎 꿇리지도 않고, 오히려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열다섯 살이 된 늑대인간은 이제 요정 소녀보다 한참이나 컸다. 아니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자신의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색이 연한 회색 눈동자가 달보다도 더 달 같았다. 그렇게 밤의 희박한 빛이 한 점에 모여들고 다른 모든 것은 암흑으로 변했을 때에야 비로소 낱말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저하를 보면 하늘이 가까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무슨 소리야?
저하의 얼굴에 달이 두 개나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니스는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야 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잠시 굳어 있던 프로파나티카는 호위무사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밀고는 무언가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끝은 시작만큼이나 느닷없었고 둘은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멈춰 있기만 했는데도 아니스에게는 그 움직임이 문을 쿵쿵쿵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고집스럽게, 그저 밀고 들어가도 될 문을 누군가가 열어 주기를 기다리는 듯이.
완전한 순응은, 허락된 것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태도는 때때로 적극적인 착각을 동반했다. 아니스에게는 단어가 많지 않았지만 그런 착각의 재료만큼은 항상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겸허할 이유 하나를 실어 보냈고, 그렇게 텅 빈 순간의 적요가 다가왔을 때, 품에는 여전히 프로파나티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