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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37화 (238/258)

237화 불멸의 제국 (2)

황태자가 오기 전에 확실히 해 둬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저승의 청지기에서부터 늑대의 존재까지. 이야기가 절반쯤 지나갔을 무렵 강현도 침실 맞은편의 방으로 돌아왔다. 연초 냄새가 워낙 짙은 탓에 걸어다니는 연기 덩어리를 사람 모양으로 겨우 뭉쳐 놓은 것 같았다. 그래도 태도는 평소처럼 침착했고 얼굴에도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 다이사트는 솔로틀과의 대면을 마친 상태였다. 저승의 일을 이해시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궁정 마법사였고 제국의 시민들이 모르는 것 또한 많이 알고 있었다. 영혼을 거두어 가는 떠돌이들에 대해서도. 야스와다의 주인이 그들을 처형하는 모습까지도 직접 보았다고 했다. 알려줘야 할 사실은 녹색 별 뒤에 숨은 신이 저승의 청지기라는 것뿐이었다.

다이사트는 테네브로즈와 구면이었고, 따라서 늑대의 이름에 대한 것까지도 그럭저럭 납득했다. 신이라는 것들 근처를 맴돌다 보면 그네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숨겨 왔는지 눈치 채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림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지라도 어둠의 경계면을 세상의 끝이라 믿지 않을 정도로는 똑똑해진다고. 그는 언약궤 아래에 있던 단검 조각이 화두에 오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사실 내 몫이었다고 하면 믿을 텐가?"

"단검 말이야?"

"나우파나 전체라고 해 두지. 타마기스의 주인께서 단검을 건네신 다음에는 직접 언약궤까지 여시더니 심장을 보여 주시지 뭐야. 원하면 둘 다 가지라고 말씀하시더군. 요정 한 사람이 받기에는 과분한 총애인 것 같아서 겸손하게 사양했지. 그분도 아주 기뻐하셨고 말이야. 잠깐, 내가 나팔 연주를 시작한 게 그분의 명령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했던가? 여기에 앉아 있으려니 갑자기 생각이 나는데. 이걸 잊고 있었다니 놀라울 정도야."

강현은 그게 너스레인지 진담인지 분간하려 애쓰는 대신 그냥 듣고만 있었다. 지금으로서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은 미친 나팔 연주자로서의 자아와 궁정 마법사의 자아가 분리하기 어려울 만큼 뒤섞여 있으리라는 것뿐이었다. 다이사트는 혼자서, 조금 더 웃다가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재미있군. 야스와다 놈들이 나우파나 물건을 가지고 사고를 쳤는데, 정작 무너지는 건 타마기스가 되었으니 말이야. 물론 다른 둘도 멀쩡한 꼬락서니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나우파나는 어떻게 됐어? 수정으로 뒤덮였다느니, 들어가면 미치는 마경으로 변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신입들이 하곤 했는데 도통 믿을 수 있어야지. 얼마 전에는 별도 떴으니 뭔가 달라졌을 테고―"

"그것도 무너졌어."

"단검 조각 때문에?"

강현은 그 신입들이 옳다고, 타마기스가 그런 것처럼 나우파나도 지난 천 년간 멈춘 상태였다고 답했다. 수정 심장이 다시 깨지면서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도시를 덮친 건 불사의 축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수정 군락이었다고. 설명은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고 나우파나 영토에 남은 것은 무너진 기둥과 흙먼지뿐이라는 말로 끝났다. 다이사트의 얼굴이 미미한 상실감으로 일그러졌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좋아, 나도 어릴 적에 놀던 곳들이 멀쩡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시간이 그렇게나 지나면 거창한 사건이 터지지 않아도 죄다 먼지가 되기 마련이지. 그게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뭐, 보통은 그렇다는 거야."

그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강현은 여기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았고, 그저 침묵했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볼로디아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바깥 사정은 모두 알려 주었으니 이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황태자가 선뜻 협조할 것이란 계산은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다이사트는 자신에게 조언가 장치를 멈출 권한이 있다고 답했다. 황태자를 만나는 즉시 그럴 것이라고, 자세한 사정은 그 후에야 읊을 수 있으리라는 부언이 따라붙었다.

예전이었더라면 귀담아 들으면서 그 뒤편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아내려 시도했겠지만 지금은 별 의욕이 없었다. 낯선 도시에서, 기차역까지 가는 길을 알아내느라 골머리를 앓다가 가까스로 제 시간 안에 탑승을 마친 승객이 된 기분이었다. 선로는 종착지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강현에게 남은 몫은 차창에 팔을 얹은 채 붙잡거나 만지지 못할 순간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여러 축의 시간이 있었다. 부단히 흘러가는 것과, 멈춘 채 그 자리에서만 흐르는 것과, 다만 멈춰 있기만 한 것이. 혹은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는 나우파나 폐허의, 차갑고 날카로운 보석함 속에도 넋들이 살아 있었다고 가정해 보았다. 투명한 수정 껍데기와 굳은 몸 아래에서 흐르며 이방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나누었다고. 솔로틀이 심장에서 영혼을 빼낼 때 그들도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정말로 그랬는지는 모른다. 확언을 듣기 위해서는 솔로틀에게 물어야 했다. 그는 일단은 그랬을 거라고 믿고서는 의식의 흐름을 계속 뻗어 보았다. 필연에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에는 그런 폭압도 포함된단 말인가. 스스로는 결정하거나 바꾸지 못하고 그저 바깥에서 던져지기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까.

있었다. 있을 뿐만 아니라 선택의 허울을 뒤집어쓴 채로 사람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강현의 세계도 태반이 그렇게 던져진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약서를 쓰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조차도.

강현은 문득 자신이 줄곧 시달리던 것이 죄책감이라기보다는 공포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책감은 결단에서 오지만 공포는 무력감에서 온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는 남은 문장들을 붙잡고는 여기가 열차칸이 아니라 소극장이라고, 상연 시각을 맞추기 위해 내달린 끝에 끔찍한 무대를 앞에 둔 것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관객이 뛰쳐나갈지라도 연극은 계속된다. 아즈리온의 화신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솔로틀은 정원사의 몸을 빌려 황제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검을 회수한 다음 야스와다에 가서 나무를 뜯어낼 것이다. 테네브로즈가 다이사트에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그랬다.

좋아, 그렇다면 난 왜 여기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평론에 속아서 잘못된 연극을 예매했다 쳐도, 속은 이유야 넘어가더라도, 이걸 계속 봐야 할 이유는 뭐란 말이야? 티아? 어떻게 생각해요? 감시카메라가 필요해서 그런 겁니까? 실컷 불평을 던져 넣던 그는 고개를 돌려 볼로디아를, 다음 무대의 제작진 중 한 사람을 눈에 담았다. 관람객 한 명의 후기가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는 몰랐다. 하지만 감상평을 남기려면 일단 끝까지 보아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닿는 동시에 용 날개 특유의 두터운 바람 소리가 열린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황태자였다.

연극의 한 장이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   *   *

프로파나티카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 난동을 진압한 뒤 무덤 인근에 이르렀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독액을 쏟아 부패자들을 진정시켰고, 살육 광란이 벌어진 경위를 듣게 되었다. 용 한 마리가 그 이방인들을 데리고 빠져나갔다는 것까지도.

황태자는 그 용이 누구의 것인지 알았고 그가 어디에 있을지도 짐작했다. 그녀는 서둘러 황궁을 향해 기수를 틀었다. 그렇게 아침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동안 이상한 목소리가, 귀를 거치지 않고서도 불현듯 뇌리에 들어온 목소리가 직감처럼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돌아가라! 너와 더 싸울 시간이 없다!]

그것은 명령이었지만 조언가 장치가 내리는 것과는 달랐다. 애당초 자신에게 한 말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혼란 속에서 서쪽 내원에 착륙했다. 기다렸다는 듯 다이사트가 세 명의 이방인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   *   *

부패자가 거대한 비늘 짐승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수수한 묵색 예복을 걸친 요정이었다. 양옆으로 빗은 암녹색 머리카락은 귀 밑에 겨우 닿을 만큼 짧았고 장신구도 없었지만 여자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에두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 속에서 마공학 의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강현은 맹금의 눈이 공작의 꼬리깃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곱씹으면서, 다이사트가 익숙한 자세로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원한 황태자께 황궁의 일원이 예를 갖춥니다."

프로파나티카는 자세를 바로잡으라는 투로 턱끝을 약간 들었고, 볼로디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무덤 인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들었다. 네 뒤에 있는 것이 그 이방인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무슨 사정인지 당장 설명하거라. 흡족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감히 무례를 저지르려 하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환자를 다루는 데에 이골이 난 간병인처럼 한쪽 팔꿈치를 황태자의 어깨 위에 올린 뒤 머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주문을 읊는 목소리가 미미하게 들려 오더니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이사트는 쓰러지려던 황태자를 부축하고서는 잠시 기다렸다.

그녀는 몸부림치듯 궁정 마법사의 품으로부터 빠져나왔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안의 빛은 여전했지만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거기에 있는 것은 황태자가 아니라 너무 늦게 깨어난 주검에 불과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운을 뗐다.

"이건… 이건 뭐야? 여긴 어디야?"

"황태자 저하의 뜰입니다. 여기엔 연못도 있고 아름다운 덤불도 있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아니스는? 대관식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저번에, 회당에 함께 다녀왔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프로파나티카는 멍하니 다이사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만 하면 시간이 그녀를 휘감아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되돌려 놓으리라는 것처럼. 눈물이 의안의 광채를 가리더니 외마디 절규가 튀어나왔다.

"비겁자!"

마른 손이 다이사트의 뺨을 후려갈겼지만 강현이 선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뒷모습뿐이었다. 그는 발이 붙들린 채, 별 수 없이 남의 불행을 들여다보게 된 사람처럼 둘을 응시했다. 다이사트의 어깨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만 있었다. 프로파나티카도. 그녀는 여세를 몰아 화를 쏟아내는 대신 계속 울기만 했다.

그러더니 불탄 종이가 재로 부서지듯 묵색 예복에 감싸인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다이사트는 황태자를 부축해 안고서는 볼로디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본의 아니게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으니 바단의 새 주인께는 사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들어가서 말씀드리지요." 그러고는 시선이 강현과 테네브로즈에게로 향했다. "자, 다들 따라오라고!"

그 말에 따라붙은 웃음소리는 꾸며낸 것은 아니었지만 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고통에 익숙해진 사람 특유의 긍정이었다.

강현은 기시감을 느끼며 다이사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상이 자신을 탁자 너머에 앉혀 두고서는 이런 속삭임을 불어 넣는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다.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뭐? 처음에는 바락바락 화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엔 입을 다물게 되었다. 기력이 남았더라면 웃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되었으므로.

비극의 순간은 뜨겁거나 차가울 수 있을지라도 비참의 온도는 대개 애매하다. 그것은 눈물도 분노도 모두 소진되고 가망 없는 고통만이 계속될 때 온다. 그는 의식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막 볕이 들기 시작한 공기가 미지근한 느낌을 콧잔등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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