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불멸의 제국 (1)
테네브로즈는 강현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놀랍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상식과는 조금 어긋나 있었고 목숨이 달린 결정을 내릴 때마다 심란한 기색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빈 일당을 제물로 바치거나 울쿠스를 능묘로 보내는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테네브로즈는 가만히 있었다.
<그건 잘 한 선택이로구나. 네가 끼어들었다가는 일이 꼬였을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 말씀은 제가 아니라 나으리께 직접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 나으리께서 갑자기 이상한 연민에 사로잡혀서 안 해도 될 이야기를 주절거린 것이지 제 탓은 아니란 말입니다.
<됐으니 당분간은 가만히만 있거라.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어.>
안 그러셔도 가만히 있을 건데요. 저번에 여기 왔을 때는 아주 귀찮았거든요. 저 나팔 머리 때문에 말입니다. 그 짓거리를 또 해야 하나 걱정스러웠는데 따라만 다니면 된다니 다행입니다. 누님들께서는 실컷 바쁘신데 저만 이렇게 풍경 구경을 하고 있자니 미안하지만―
<야스와다에서도 바쁠 건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말이다. 가주든 하인이든 간에 잠들기만 하면 일어나질 않으니 뭘 하겠느냐. 다들 넋을 빼앗기고 있어. 그 별불꽃 하인 녀석만 겨우 깨워 두었다.>
피송곳니 노친네는 어떻게 되었답니까?
<그쪽은 그나마 가망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예전에 걸린 주문이 아직 남아 있더구나. 나트람이 고안한 것 말이다. 그게 도리어, 영혼을 모두 잃지 않도록 쐐깃돌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솔로틀에게 마저 설명을 들으면서 테네브로즈는 고향의 정경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몇몇을 제하면 다들 잠든 채로만 누워 있다고, 나무뿌리만이 조용히 뻗어 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고작 하루만에 그렇게 됐단 말이지. 이시 타브가 깨어나고 단검 조각이 서로 맞붙어서, 그렇게.
그는 몇 해 전의 기억을 곱씹었다. 소생 계획에 쓸 성물을 구한답시고 신관들이 타마기스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 자원자는 테네브로즈 한명뿐이었다. 의회는 3교구 부제사장씩이나 되는 요정이 그런 곳에 가려는 저의를 의심했지만 의심만으로 내칠 일은 아니었다. 행동거지가 어쨌건 간에 그는 마법에 능했고 잘 싸웠으며 교구 업무도 그럭저럭 했던 것이다.
테네브로즈에게도 성물 구하기는 절박한 문제였다. 화신을 부르려면 이시 타브를 깨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솔로틀의 판단이었다. 일드얀이 꿈을 다루는 법을 안다는 사실이 의아하긴 했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일방적이고 전략적인 동맹일지라도, 같은 편에게는 예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예우가 이런 결말로 돌아오다니 어쩐지 우스웠다. 나무뿌리를 걷어내고 이시 타브의 심장을 빼내더라도 야스와다는 이전과 같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타마기스와 함께 먼지로 변해서 그 영혼들만이 저승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건 정원사가 판단할 사안이 아니었다. 테네브로즈는 싸구려 등불과 함께 오는 구원도 밤도둑처럼 오는 파멸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신들의 일이란 사람의 생각 바깥에 있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그걸 딱히 파멸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강현을 힐끔 보았다. 선이 굵은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텅 빈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무 작은 어린아이가 들어가 있는 탓에 흐느적거리는 인형탈처럼. 테네브로즈는 야스와다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하는 게 좋으리라고 결론 내렸다.
* * *
헤이딘은 강현의 돌발행동에 놀랐지만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여겼다. 볼로디아는 제지하지 않았고 다이사트도 몇 문장으로 반론을 일축했으므로 큰 일조차 아닐 것이다. 그렇게 넘어가지 않더라도 용의 등 위는 사정을 따져 묻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고, 상대 역시 동료 학자가 아니었다.
침묵이 내려앉자마자 다이사트는 속도를 높였다. 이제 도시는 빗줄기에 불어난 강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형체가 되어 시야를 휙휙 스쳤다. 그러는 동안 헤이딘의 머릿속에서도 생각들이 하나로 뭉쳐 내달리다가 몇 갈래로 나뉘기를 반복했다.
살아 움직이는 주검과 기계들에게 비감을 느끼진 못할지라도 이 도시 전체가 빛줄기 속에 부서지는 수정 조각만큼이나 허망하게 사라지리란 점에는 그 자체로 서글픈 면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인간들은 물론이고 야스와다의 요정들조차도 타마기스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들이 이곳을 이해하는 방법은 둘뿐이었다. 가장 먼저 자멸한 도시거나, 저주받은 땅이거나.
그건 아마도 어쩔 수 없는 게으름일 것이다. 가 닿을 수 없는 과거를 이해했다고 믿으려면 어떤 것들은 외면해야만 한다. 시간을 거슬러 사람들을 마주볼 여지가 없으므로 그것은 대개 진실이 된다. 헤이딘은 불멸의 제국을, 강물의 흐름에도 따라 내려가지 않는 그림자처럼 늪지대 복판에 버티고 선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줄곧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던 무력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보통 사람으로서의 무력감이었다.
여기에 있는 이들 중 보통 사람, 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헤이딘 자신일 터였다. 그는 저승의 정원사도 아니고, 다른 세계에서 온 것도 아니고, 신 또한 아니며, 하다못해 천 년간 산 적도 없었다. 그런 차이들에 비하면 반지에 넋이 담겨 있다는 것쯤은 사소했다. 헤이딘은 사소한 만큼 초라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했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따져 보았다.
주검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물건은 남을 테니 유실된 각인을 조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모아 정리하면 기억의 궁전에 있던 지식들을 복원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세계를 그대로 두든 새로이 쌓든 간에 한 사람의 몫은 그것뿐이다.
헤이딘은 머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자신이 써낸 것들을 바깥으로 가져가 달라는 부탁을 올렸고, 볼로디아는 선뜻 승낙했다. 그래서 이 작은 기계는 아즈리온의 화신이 인간다운 낙담을 드러내는 순간에조차도 글줄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헤이딘은 머틀이 타마기스 자체보다도 그것을 재료 삼아 만들어낸 문장들을 더욱 아낀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생각이 다시 마타치치와의 대화로 흘렀다. 그녀는 삶이 저마다의 열정으로 타오르는 것은 결과물이 어떤 식으로든 후대에 남으리라는 믿음 때문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믿음만 이루어진다면 역사로 물러나도 괜찮단 말인가.
그는 조건문이 두 개로 나뉘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식으로든, 후대에 남을 수만 있다면. 그는 둘 중 하나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면 전자를 골라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라고도 여겼다. 원하는 것만을 남기더라도 후대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를 일이다. 갓난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날지도 예단하지 못할 판에 먼 미래의 일을 논할 수는 없다. 애당초 대부분은 남지조차 못한다.
따라서 삶의 열망이 흔적을 향한 믿음이라면 그 핵심은 흔적이 아니라 믿음이다. 무책임할 만큼 순진한 믿음을 버리지 않기로 결단하는 태도다. 그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지만, 어쩌면 광기에 가까울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로 살아가는 일을 돕는다… 헤이딘은 나르시소의 중앙 동공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학자들은 여전히 항명하는 중일 테다. 어쩌면 마타치치까지 가세했을지도 모르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낱말들이 재차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더니 타마기스의 공기가 그를 통과해 나아갔다. 헤이딘은 용이 자세를 낮추어 하강하는 것을 느꼈다. 황궁이 저 앞에 있었다.
* * *
용은 궁전 서쪽 내원(內苑)에 착륙했다. 습한 곳에서 자라는 덩굴이 오래도록 방치된 건물들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하나는 예외였다. 강현은 그곳이 황태자의 거처임을 알고 있었다.
다이사트는 호각을 불어 용을 하늘로 돌려보낸 뒤 방문객들을 닫힌 문 너머로 이끌었다. 아직 프로파나티카는 이곳에 없었다. 도시를 순찰하거나 무덤 근처에서 벌어진 소란을 진압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침실 맞은편의 방에서 황태자를 기다리는 동안 강현은 잠깐 밖으로 나와 시가에 불을 붙였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고 티아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게 차라리 편했다.
그는 용의 등 위에서 오간 대화를 곱씹으며 내가 드디어 미쳤나보다 하고 중얼거렸다. 눈앞에 닥쳐오니 실감이 날 뿐이지 기실 예고야 되어 있었다. 강현은 태블릿 속에서 타마기스를 수십 수백 번은 무너뜨렸다. 돈도 필요했다. 그래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사람도 한참이나 죽였고 거짓말은 더 많이 했다. 그러니 낙장불입인가. 투덜거리거나 불평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낙장불입이다 싶다가도 선택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만큼 무책임한 말은 없지 싶었다. 사업이 망해서 빚이 생긴 것은 감내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동차 사고를 당한 것까지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도시 전체의 운명을, 한 세계의 운명을 한국인 하나의 불행과 동치로 놓는다면 그것도 웃기는 소리다. 빚 따위는 내가 죽으면 끝나는 건데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한 강현은 정말로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책임을 져야 하는데. 하지만 이런 책임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사람 한 명이 떠맡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람 각각에 대한 것뿐이었다. 오지 않은 총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두개골 바로 밑에 우퍼 스피커라도 들어앉은 것처럼 머릿속이 쾅쾅 울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게이머 중 하필이면 자신이었던 이유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이런 걸 떠맡긴 이유를 묻고 싶었다. 공략본이야 파울리스에게도 있으니까 공략을 잘 알아서는 아닐 테다. 그렇다면 왜? 빚이 있는 만큼 절박해서? 사업가 기질이 있어서? 이 세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서? 강박 때문에?
왜?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미 늦었다. 그는 줄곧 그랬던 것처럼 우울을 잠시 접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