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꿈과 희망 (4)
타마기스에는 강철 군체라 불리는 덩어리들이 있다. 그들은 기계 부품과 살덩어리와 영혼의 융합체로서 생각을 공유하며 함께 뭉쳐 돌아다닌다.
개중에서 가장 유명한 군체는 무덤이라 불리는 것이다. 무덤은 살육 광란이 일어날 때마다 지친 사람들을 받아들였으며 지금은 타마기스에서 가장 큰 군체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영혼이나 부품을 집어삼킬 때를 제외하면 잠든 상태를 유지한다.
부패자들은 무덤을 거대한 조형물처럼 감상하곤 하지만 물건을 떼어낼 시도는 일절 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한순간에 잡아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 *
"어이, 거기까지 올라가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옆에 그건 누구야?"
부패자 둘이 무덤을 향해 외쳤다. 말을 붙이지 않고 가만히 기웃거리는 사람은 더 많았다. 나팔 머리가 상체를 기울여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내 평생의 은인이지. 나팔을 떼어내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지 뭐야."
"헛, 누군진 몰라도 엄청난 능력자로구만. 그거 끝나면 나도 좀 부탁해야겠는데. 아니, 잠깐만. 나팔을 떼어낸다고―나팔을? 떼어내서 뭘 하려고 그래?"
"당연히 연주회를 해야지! 알잖아! 개시도 못 하고 빼앗겼다고!"
나팔 머리는 웃음을 터뜨렸고 구경꾼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들은 눈치를 보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보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말들이 귓전을 쳤다. 젠장, 나팔 머리가 연주를 시작한다! 도망쳐! 다들 나오지 말라고 전해!
순식간에 거리가 텅 비었다. 나팔 머리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자신 곁에서, 단검을 쥔 채 끙끙거리는 인간 부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기운이 흐르는 단검은 쇳덩이가 아니라 마력 갈래 그 자체를 끊으며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팔이 만족스러운 울림을 발했다.
"하여간 저놈들은 예술을 모른다니까. 별 수 없이 연주회는 우리 둘끼리만 해야겠어. 그렇지?"
"나도 몰라."
"예술을 모르다니 아쉽군 그래. 이제부터 내가 알려주지."
"안 알려줘도 돼."
인간 부패자는, 란드와르는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내뱉었다. 환술로 겉모습을 바꾸고서는 무덤 꼭대기에 올라와 나팔을 뜯어내는 중이었다. 아즈리온의 권능으로 영혼과 기계 장치 사이의 융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도 결국에는 마력 갈래의 작용이니까. 귀찮기만 하고 어려울 건 딱히 없는 일이었지만 심란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권능으로 기껏 하는 짓이 이딴 거란 말이지.
게다가 돌아가는 꼴로 보아서는 연주까지 한 번 더 들어야 할 모양이었다. 부패자들도 치를 떨면서 도망가는 연주를. 란드와르는 나팔 머리가 전직 궁정 마법사이자 황태자와도 막역한 사이라는 점을 되새기며 화를 억눌렀다. 접선을 위해서라면 청각쯤은 잠시 포기할 수 있었다. 포기해야 했다…….
"괜찮소?"
분리 작업에 전념하던 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손을 멈추고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볼로디아가 한쪽 팔에 이상한 기계를 안아든 채로 서 있었다. 그 늑대인간인 모양이었다. 헤이딘까지 합하면 나팔 머리에게 시달릴 동료가 셋이나 늘어난 셈이었다.
* * *
일을 끝마쳤을 때에는 어느덧 새벽도 다 지나 동이 터오기 직전이었다.
새 나팔을 건네주자마자 놈은 원래 있던 머리를 잡아 뽑은 다음 그 자리에 새 물건을 가져다 꽂았다. 그러고는 각도를 맞추려는 듯 양손으로 깔때기를 쥐고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물을 묻히지 않은 스펀지로 그릇을 닦는 듯한 뽀드득 소리가 났다. 여러모로 끔찍했다. 앞으로는 눈은 물론이고 귀까지 끔찍해질 예정이었다. 란드와르는 볼로디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기껏해야 나팔 연주인데 문제 있겠소?"
볼로디아의 오른팔에 안긴 양철통이 항의하듯이 호각 소리를 냈다. 전면부에는 찡그린 얼굴 기호가 떠오른 상태였다. 바퀴만 멀쩡했더라면 다른 부패자들처럼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기껏 길안내도 해주고 차원문까지 열어준 은인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들다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참, 그러고 보면 잊고 있었던 게 하나 있었다. 미안할 것도 없고 존경스러울 것도 없는 놈 말이다. 마침 각도 조정도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란드와르는 나팔 머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요정 내놔."
"요정?"
"아까 죽은 놈."
나팔 머리는 삑 소리를 내고는 품에서 지혜의 고리를 꺼냈다. 손수건이라도 집어 건네는 것처럼 태연한 손짓이었다. 반가움보다는 당혹이 더 컸다. 티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놈한테 있었는데요?
"왜, 뜻밖에도 가까이 있어서 당혹스러운가? 집에 가져다 두려 했는데 다녀오는 도중에 네가 깨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뭐야. 그래서 그냥 내가 가지고 있었어."
생각이라도 읽은 듯 나팔 머리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란드와르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르렁 소리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어쨌거나 일은 잘 풀렸다. 나팔도 무사히 떼어냈고, 볼로디아와도 합류했고, 황태자와 만날 방편도 생겼다. 화낼 이유는 없다…….
아니다. 참을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나와라."
란드와르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지혜의 고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윽고 자그마한 석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개의 형상으로, 그리고 요정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는 익숙한 얼굴이 형체를 갖추자마자 쏘아 붙였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너 지금까지 저승에서 놀고 있었지."
"나으리는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기껏 하는 말이 그겁니까?"
"아니, 새끼야. 바로 옆에 있었으면 튀어나오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그랬으면 내가 저놈 말 들어줄 필요가 없었잖아."
"대화로 해결이 되는 거 같아서 가만히 있었던 건데요. 해결이 됐잖습니까."
어떻게 된 게 죽다가 살아나서 한다는 짓이 말대꾸였다. 란드와르는 앓는 소리를 삼키고서는 검지로 바닥을 가리켰다.
"아무튼 앉아. 이제부터 음악감상 해야 돼."
그렇게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저번보다는 듣기 좋았다. 생각은 머리에 담겨 있으므로 새 머리를 장만하면 연주 실력 역시 나아질 것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게 정말인지, 아니면 나팔 머리가 그렇게 믿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따져볼 여지가 있었다. 후자라면 그것도 참 엄청난 일이구나 싶었다.
아무튼 나팔 머리도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놈은 세 곡을 잇달아 불고서는 란드와르를 보았다.
"들었지? 내 인생 최고의 연주였어. 이 정도면 다른 놈들이 도망갈 일은 없겠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언젠가는 타마기스 전체가 내 연주에 귀 기울이는 날이 올 거라고."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희망에 부푼 모습을 보자니 입맛이 썼다. 란드와르는 대화가 감상적으로 흐르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느꼈다.
"알았으니까 약속이나 지켜."
"이렇게나 낭만이 없어서야. 그런데 만나려는 용건이 뭐야?"
"그냥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 모르는 놈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야."
"모르는 놈이라니, 우리 사이에 섭섭한데.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도시의 주인께 그냥이라는 말이 통할 리가 있나. 사실대로 이야기해 봐."
그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 간에 이건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설상가상으로 볼로디아에게도 설명을 제대로 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이시 타브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검이, 꿈 조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티아?
<솔직히 말씀하셔도 무방합니다. 신이라는 것까지 밝히셔도 되고요.>
예? 정말로요? 그게 먹힌단 겁니까?
<최근 업무량이 과중한 관계로 세부적인 대사를 준비하지 못한 점은 죄송합니다만, 이 방향이 옳습니다. 그대로 하세요.>
조금 더 따지려던 찰나 나팔 머리가 재촉하듯 삑 소리를 냈다.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나우파나의 별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서 말하는 게 좋겠는데."
"떳떳하면 여기서 해. 남들 앞에서 못 할 말은 황태자님 앞에서도 못 하는 거야."
"약속을 했잖아.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갑자기라니, 당연한 절차 아닌가? 설마 궁정 마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악기 하나 구해 줬다고 뭘 하려는지도 모르는 신원불명자를 황태자님께 소개시켜 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팔 머리가 즐겁다는 투로 외쳤다. 면상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욕구가 뱃속에서 끓어올랐지만 말은 옳았다. 란드와르는 긴 망설임 끝에 운을 뗐다. 부패자들이 모두 도망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단… 나는 신이야."
"잠깐, 그건 좀 이상한데. 나는 타마기스의 주인과도 겸상하던 사이였어. 신들이 어떤 족속인지는 잘 알고 있지. 넌 신은 아니야."
나팔 머리가 의아한 듯 내뱉었다. 성흔을 보여줄까 싶었지만 별 소용이 없을 듯했다. 이 부패자들에게 인간들의 신은 가 닿지 못할 세상의 이야기에 불과했고, 아즈리온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라고 치자. 아무튼, 내가 뭐든 간에, 황제를 만나야 해. 황태자는 그냥 회당 문만 열어주면 된다는 거야."
"야스와다에서 일이 터졌다고 했지. 회당에 갇힌 분께서 그 먼 곳을 굽어 살필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나저나 사절이랍시고 보낸 게 인간 하나에 늑대인간 하나, 그리고 이상한 물건 하나라니 그 녀석들도 세가 많이 기울었나보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됐기에 그래? 밤하늘은 꽤 괜찮은 모습인데 말이야."
"성물 하나만 빌려 갈 거야. 자세히 설명하려면 복잡해."
"성물? 황궁 금고를 열고 싶으면 네 옆에 있는 놈한테 시키면 될 것 같은데. 저번에, 도둑이 들었을 때 봤어. 그때도 반으로 갈라 죽였는데 갑자기 개로 변해서 내빼지 뭐야. 참, 이거 좀 늦은 질문이지만 우리 구면 맞지?"
구면이라고? 나팔 머리의 말을 해석하려 애쓰던 란드와르는 문득 요정 놈이 타마기스에 왔던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2교구 신관들과 함께, 소생 계획에 쓸 성물을 빼내 왔다고 했다. 그때 만났던 모양이지.
"그런데요."
"네 부하들이 입만 열면 네 욕인데 말이야."
"그런데요?"
"혹시 다른 대답을 하는 법을 모르나?"
나팔 머리는 그렇게 묻더니 웃음을 터뜨렸고 테네브로즈는 말없이 란드와르를 올려다보았다. 벤트레스를 죽여 달라고 부탁할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이건 또 이것대로 머리가 아팠다. 그는 앓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금고 말고 회당에 있는 게 따로 있어."
"아하, 그거 말이지. 여기에서도 그걸 아는 사람은 둘밖에 없는데 외부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니 신기하군 그래. 하긴 요즘 분위기가 심상찮아. 별점술사들끼리 모여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온종일 떠들지. 하늘만 봐도 말이야. 보자, 천 년 전에 검이 꽂혔으니까 이제는 빼낼 때인가?"
"그런 셈이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는 알아?"
나팔의 검은 구멍이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머리에 힘을 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자문했다. 내가 거짓말을 잘 하는 편이었던가? 사업이 망하기 전이었더라면, 이런 곳에만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선뜻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은데, 하다못해 나우파나 폐허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능력이 남아 있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일은 칼을 가져가는 게 다야. 다른 건 몰라."
"알고 있으면서 발뺌을 하는군. 물론 정말로 모를 가능성도 있으니까 내가 대신 이야기해 주지. 그 검이 바로 타마기스야. 심장에 단단히 달라붙어서 도시 전체에 불사의 축복을 내려 주고 있단 말이야. 저주라고 부르는 놈들도 있지만, 아무튼. 뽑았다가는 모두 죽는 거야. 내 말이 맞지?"
란드와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팔의 텅 빈 구멍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뜨거워진 이마 뒤편에서 어울리지 않게도 냉철한 문장들이 형체를 갖췄다. 그래,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었군. 뭘 하려는지 알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라고 했던 거야. 미끼에 걸린 거지.
개 같은 새끼였다. 하지만 당장 망치를 빼들어야 하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쉬운 상대도 아니거니와 이런 곳에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이쪽이 불리했다. 그는 머릿속의 고객센터에 클레임을 넣기 시작했다. 티아? 시뮬레이션이 맞긴 맞았던 겁니까? 아무래도 틀린 것 같은데요…….
순간 기묘한 진동이 발을 통해 전해져 오더니 불길한 직감이 란드와르를 사로잡았다. 그는 나팔 머리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잠자코 죽어만 있던 무덤이, 거대한 영혼 덩어리가 당장에라도 터져 나갈 듯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곳저곳에서 고함이 튀어나왔다.
"모두 죽는다고? 왜?"
"이제 끝이야? 이제 땅에 묻힐 수 있는 거야?"
"싫어! 싫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수천수만 명의 목소리 앞에서, 란드와르는 정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