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꿈과 희망 (2)
볼로디아는 머틀과 함께 통로 바깥으로 나섰다. 형형색색으로 더께 쌓인 곰팡이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 또한 그랬다. 건물을 따라 늘어진 마력 갈래들은 우중충한 수채화 위에 채도 높은 색연필로 윤곽을 덧그린 듯 이질적이었다. 쩡할 만큼 선명한 색을 발하는 간판들, 깨진 창문 속에서 스멀거리는 조명등, 주택가의 어두운 윤곽 너머로 거대한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여가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후각으로만 방향을 분간해 보았다. 썩어가는 물 냄새와 잘 숙성된 위스키의 달콤한 향이 하나인 듯 뒤섞이더니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것들은 땅 밑에서, 옆에서, 머리 위의 지붕에서 왔다. 술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멋진 건반 연주에 감탄하고, 3족 보행 장치의 설계를 논하는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훌륭하군요.>
헤이딘은 이것만은 말해야겠다는 듯 촌평했고 볼로디아도 일단은 동의했다. 훌륭하다는 것이 완벽한 표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그들은 대로변을 따라 걷다가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비슷비슷한 양식의 벽돌건물들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는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머틀의 거처는 주택가 초입에 있었다. 자리를 오래 비우긴 했지만 별 볼일 없는 곳이니만큼 약탈당하진 않았으리라고 했다. 현관에 발을 들이려는 순간 조금 먼 곳에서 가벼운 깡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볼로디아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았다. 부패자 요정이 금속제 통 하나를 걷어차다가 마법으로 허공에 띄워 올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볼로디아는 크게 상관하지 않고 마저 걸음을 옮겼지만 그 장면만큼은 뇌리에 남았다.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물건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 * *
머틀은 시내의 가정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흰둥이 소년이었다. 주인마님은 그를 아꼈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타마기스가 봉쇄되고 소년이 몸 절반을 잃은 후에도 호의는 계속되었다. 머틀은 이동식 수납함에 영혼을 실은 채 서재를 돌아다녔고 자신이 겪고 본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주인의 배려를 대언하듯 서가 전면에는 대각선 형태의 경사로가 이어져 있었다. 바퀴로 타고 오르면서 상단의 책들을 꺼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머틀을 탁자에 내려놓은 볼로디아는 그가 오래된 축음기에 자신을 연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책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헤이딘은 벌써 염동술로 책 하나를 꺼내어 읽고 있었다. 보존 각인이 새겨진 듯 책등에 미미한 불빛이 흘렀다.
"보존 각인을 유지하는 이도 자네 주인인가?"
연결 작업을 마친 머틀은 두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돌렸다. 곧이어 표정 기호에서 눈만이 위로 올라가며 올려다보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아뇨, 이상한 기운이 마력을 불어넣는 거예요. 우리를 죽지 못하게 하는 그 힘 말예요. 그분들은 모두 쉬러 가셨어요. 커다란 덩어리들 있잖아요, 영혼이랑 건물 조각이랑 기계들이 엉킨 거요, 그 일부가 되는 거예요. 아니면 야스와다 사람들에게 제물로 바쳐질 수도 있죠. 주인마님도 계단을 만들어 주고는 그렇게 되셨고요. 그 후로는 계속 혼자였어요."
신경써 듣지 않는다면 뜻 없는 잡음으로 착각할 만큼 조악한 음질이었지만 소통이 어려울 수준은 아니었다. 그녀는 넋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알았고 그 일에 능숙했다. 도리어 볼로디아의 주의를 끈 것은 복도에서부터 시작해 서재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더미였다.
"종이는 어떻게 구했나? 이런 곳에서라면 물건을 새로 만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뭐든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다들 적응했으니까요. 바닥에 있는 종이들은 모두 돌로 만든 거예요. 돌을 곱게 부순 다음 연금술 용액을 첨가해서 얇게 펴 발랐죠.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지금까지 써온 걸 보여주기만 하면 종이를 새로 줘요. 여기에서 글을 쓴다고 하면 다들 그 사람이랑 알고 지내요. 제가 시체 더미 아래 짓눌려 있던 것도 그거 때문이고요. 새 글을 보여주러 가다가 심심한 사람들한테 붙잡혔어요. 실컷 가지고 놀다가 통로에 던지더라구요. 다른 몸을 구해 보려니 원고가 마음에 걸렸죠. 그건 정말 잘 쓴 거였거든요."
머틀의 한쪽 팔이 원기둥 위로 올라가더니 고리를 붙잡고 들어올렸다. 안에는 고리로 대강 묶인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는 원고를 탁자에 올려놓고는 볼로디아를 바라보았다.
"전 이걸 여기에 두려고 왔어요. 이제 차원문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참, 그 전에……."
볼로디아는 머틀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오신 이유를 물어 볼까? 잠깐만, 이 생각도 듣고 계실 거야… 그녀는 답하는 대신 종이 묶음을 집어 들었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어떤 부패자의 삶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전기였다. 진실과 편집된 허구의 경계면을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매끄럽게 읽힌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지금까지 쓴 글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나?"
"감히 모두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해요. 순서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글들의 순서죠. 그걸 어디에 뒀는지만 기억하면 내용은 잊어도 돼요."
"그렇다면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글의 위치를 말해 보게나."
머틀의 몸이 잠시 정지하더니 표정마저 달아났다. 감격과 불안이 동시에 느껴졌다. 영혼의 떨림을 확인한 볼로디아는 슬쩍 웃고는 몸을 수그려 탁자에 딸린 서랍을 열었고, 마지막 장이 펼쳐진 종이 묶음을 집어 들었다.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듯 문단이 중간쯤에서 끊겨 있었다. 그녀는 가장 앞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늑대인간 소년이 아닌 이동식 수납함의 평생이 적혀 있었다. 타마기스 밑바닥을 굴러다니고, 발에 걷어차이거나 염동술에 시달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귀여움을 받으면서 갖가지 이야기를 긁어모으는 평생. 볼로디아는 서류의 격자를 벗어난 문장들과는 친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담긴 아름다움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뒤틀렸고 기괴할지라도, 그리고 비참으로 가득할지라도 어쨌거나 그것은 아름다움이었다.
"자네는 이곳에서의 삶이 즐거운가?"
수납함의 표면에 표정이 돌아온 것은 질문이 던져지고서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머틀은 겁먹은 듯 운을 뗐지만 말이 쌓일수록 어조는 열성적으로 변했다.
"즐거울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어요. 글을 쓸 때는 기분이 좋지요. 그건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즐겁다거나―참, 전 음식을 못 먹은 지 정말 오래됐어요. 그러니까 제 예시가 이상하다면 미리 사과드릴게요. 아무튼 그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푹 자서 즐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에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나는 느낌이 드는데도 넋이 몸에서 달아날 것만 같이 홀가분해요. 그래서 가끔은 낱말들이 절 붙잡고 흔드는 것만 같아요. 지금까지 써온 것들과 앞으로 써야 할 것들이요. 마치 야스와다의 마법에 사로잡힌 것처럼요. 하지만 저는 써요. 그러지 않으면 잊을 수 없으니까요. 종이에 겪은 일들을 써낸 다음 철사에 묶어서 서랍에 넣으면 그게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볼로디아는 갑작스레 흐려지는 말끝과 뒤이은 침묵 사이에서 수많은 시간을 들었다. 마법에 소질이 없는 흰둥이 소년에게 살육 광란은 고약한 축제가 아니라 재난이었을 것이다. 부패자들은 움직이는 수납함을 떠돌이 칼린카처럼 귀여워했겠지만 같은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머틀은 아직까지도 변변한 몸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매일같이, 군체의 일부가 되거나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을 천칭에 올렸을 것이다… 천칭의 반대편에는 문장들이, 만질 수는 없을지라도 가끔은 강철 기둥보다도 한 사람을 더욱 잘 지탱하는 것들이 있을 터였다.
"자네는 옛 기억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군. 이곳에서의 삶이 썩 즐겁지도 않을 테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그래요. 이런 몸으로 사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적어낸 글은 아주 아끼는 모양이야."
"네, 정말… 열심히 썼어요. 다른 것도요. 수납함에 들어 있던 글만 아니었으면 전 바로 시체 더미에서 나갔을 거예요. 문장들은 제 몸에서 빠져나간 다음부터는 종이 위에만 있죠. 그걸 잃어버리면 결코 되찾을 수 없어요. 같은 내용을 다시 쓰더라도 원래 것과는 같지 않으니까요."
볼로디아는 한동안 머틀을 내려다보았고,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간의 기억을 내버리고 늑대인간의 땅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상상해 보게. 부탁만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자네 몫은 하나뿐이야. 예,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이지. 만약 원한다면 거기에서 자네는 책을 좋아하는 소년이 될 테고, 썩어가는 도시와 죽지 못하는 요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괴한 공포담으로만 듣게 될 거야."
머틀의 표정 기호가 순간적으로 점멸했다.
"오래전에는 항상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어딘가 좋은 곳으로 도망치는 생각요. 이게 그냥 악몽일 뿐이라는 생각요. 포기한 다음부터는 글을 썼지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조금 미쳐 있었던 것 같아요. 온종일 쓰고 지우기만 반복했으니까요. 이제는 그것들이 절 죽지 못하게 만들어요. 여기 있는 건 모두 저예요. 제 생각이에요. 고통스럽고 끔찍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만, 예전의 도시에서는 결코 떠올리지 못할 것들이기도 해요. 이걸 버릴 수는 없어요. 전 부탁하지 않을 거예요."
"기록물이 남더라도?"
"그래도요. 전 계속 저로 있고 싶어요."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해 보지. 시간 자체가 돌아간다면 어떻겠나? 이 모든 게 애당초 일어나지 않은 일로 변하고, 기억 역시 사라지고, 거기에 대한 결정권은 지금의 자네에게만 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난 천 년을 되풀이할 텐가?"
사나운 침묵이 머틀을 움켜쥐었다… 볼로디아는 그의 영혼이 바람을 맞은 불길처럼 거세게 부풀었다가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고 낱말 없는 절규를 들었다. 그녀는 한때 비참이었다가 정련되어 고결해진 것들을, 체념과 절망을 깎아 만든 공예품들을, 그럼에도 여전히 비참인 것들을 생각했다.
"자네는 이곳을 사랑하지?"
"네."
머틀은 망설이지 않았다. 볼로디아는 다시 물었다.
"자네는 이곳을 증오하지?"
"네."
머틀의 대답은 이번에도 단호했고, 거기에는 앞선 것과 똑같은 확신이 어려 있었다.
둘의 견고함을 비교하기는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