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꿈과 희망 (1)
전리품 더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휴식을 방해하러 온 것들과는 다른 냄새가 났다. 코를 도려낼 듯이 선명한 피 냄새였다. 늑대는 잠시 식었던 전투의 열기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상대 또한 형상을 바꾸어 괴수의 모습을 취했다. 털은 어둠과 같은 색이었고 낯선 기운이 발톱을 따라 흘렀다.
잠시 탐색전을 벌이던 늑대는 먼저 이빨을 드러내고는 덤벼들었다. 현기증을 닮은 격노가 혈류를 따라 흐르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 그녀에게 세계는 흐르듯 움직이는 덩어리에 불과했다. 오래전에 뜻을 잃은 목소리들이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내가 널 골랐으니까 나도 나를 줄게. 언제라도, 아주 먼 나중에라도, 내가 네게 끔찍한 사람이 되면 나를 죽여… 가슴팍에 무언가 매달린 듯 묵직한 느낌이 들더니 심장이 더욱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일그러지는 정신 속에서 피 냄새만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그것이 침입자의 부상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놈은 지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녹색 기운 역시 여전했다. 늑대는 뒤로 물러나 상대를 마주보았다. 침입자 역시 먼저 치고 들어올 마음이 없는 듯 두 앞발을 넓게 벌리고 서 있었다.
[돌아가라! 너와 더 싸울 시간이 없다!]
순간 일갈이 귓전을 때렸다. 들려오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듯한 소리였다.
* * *
그들은 반지를 건네 받고서는 중앙 공동으로 나왔다. 요정 유령과 늑대인간 왕 사이에 접점이 얼마나 있나 생각하던 란드와르는 뒤늦게 헤이딘이 말루카 한림원의 총장직을 약속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정확히는 헤이딘과 마타치치가.
"…물론 내게도 발언권이 있소만, 확언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소. 지고하신 분께서 이 일을 어떻게 여길지는 누구도 모르니 말이오. 일단은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좋을 거요."
그래서인지 볼로디아도 헤이딘을 연장자보다는 신하로 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한국인의 자아를 이끌어낸 다음 백 살이 훌쩍 넘은 노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작 볼로디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는데도. 이게 바로 전제군주정의 왕과 대한민국 시민의 차이인가.
란드와르는 볼로디아가 헤이딘을 안심시키는 동안 벽에 기댄 채 그런 차이들을 곱씹어 보았다. 의식적으로 피하려 애썼는데도 생각이 계속 났다. 지구에는 초월적인 독재자도 영혼도 별들이 이끄는 운명도 없다는 것. 최소한 사람들이 관측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하지만 이스트리아에서는 그 모두가 실존한다는 것.
판타지 세계는 이래서 안 된다, 식으로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째야 한단 말인가. 삶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거나 규명하려 애쓰는 대신 그냥 흘려 보내는 것처럼, 이것도 그러려니 하면 되는 일인 걸까. 그는 근처에 듣는 귀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는 저승의 정원사를 힐끔 보았다.
"너는 어쩔 거냐."
"뭘 어쩐단 말씀입니까."
"지금 다들 하는 이야기 있잖아."
"그런 판단은 청지기님이 하시는 거지 제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닌데요."
"그래도 고민해 봐. 하면 좋잖아."
"전 안 좋습니다. 그 생각만 하려 치면 저승에 있는 녀석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인데 나으리까지 그러시깁니까. 벤트레스랑 이야기를 하고 나서부터 더 심해졌단 말입니다."
안색을 보아하니 진담인 것 같았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의 편리한 마음을, 그리고 저승에 있는 반절을 머릿속에서 대조해 보았다. 그 나머지가 지금 사태를 탐탁찮아 하리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는 세상을 엎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오가는데다가 고향은 나무뿌리로 뒤덮이는 중이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란드와르는 단념하고 테네브로즈를 지혜의 고리로 만들어 주머니에 넣은 뒤 볼로디아와 헤이딘이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고 슈문도 학자들에게서 잠시나마 해방된 상태였다. 잠시나마.
끼리끼리 모여서 발제를 강화해야 한다느니,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느니 떠들어대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니 지혜의 신은 앞으로도 골머리를 꽤나 앓을 모양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자신이 계약직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막상 타마기스에 가면 다시 고민이 시작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업무 목록 속으로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슈문에게 다가가 교류 통로로 보내줄 것을 부탁하자마자 예상했던 경고가 돌아왔다. 네 통로 중 어느 곳에 떨어질지는 확실치 않다고, 일행이 뿔뿔이 흩어질 수 있다고 했다. 란드와르는 괜찮다고 대답했고…….
세상이 그를 먼 곳으로 밀어 보냈다.
통로의 아치가 보이는 듯싶더니 격통이 몰려왔다. 지하 투기장에서, 볼로디아에게 배가 쑤셔졌을 때만큼 아팠다. 몸이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는 걸 보면 무언가 아주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그는 이지러지는 정신을 다잡고는 공격자를 분간하려 애썼다. 나팔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목이 구부러지고 입이 둥근 금관악기가 눈앞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나팔? 꿈인가?
그 질문을 끝으로 의식이 툭 끊겼다.
* * *
볼로디아는 역병 늑대를 쫓아 보낸 뒤 인간 형상을 되찾았다. 진흙 덮인 석재를 밟는 느낌이 새삼스럽게도 낯설었다. 거의 동시에 청람색 머리카락의 요정 청년이 땅으로 내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그자가 도망친 것은… 전하께서 그리 명하신 것인지요?>
"그럴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했을 뿐이오. 말루카에 있을 때부터도 늑대인간들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으니. 이번에는 속내를 읽기에는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말끝을 흐린 볼로디아는 헤이딘을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몸은 더러운 채광창처럼 뒤편의 광경을 그대로 투과시키고 있었다. 온갖 기계 장치와 살점이 뒤엉킨 덩어리가 벽면을 가릴 만큼 높이 솟은 게 보였다. 그러나 역겨운 광경에 얼굴을 찌푸릴 여유는 없었다.
"괴한에게 습격당했다고 했지.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소?"
<깨어나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적대적인 태도는 아니고, 황태자와 접선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상대지만, 일단은 서둘러 합류하는 게 좋으리라는군요. 바단 통로 인근입니다.>
"겉모습이야 환술로 위장할 수 있겠지만 목적지가 꽤나 멀군… 잠깐 생각을 해 보지."
란드와르의 설명에 따르면, 도시의 교통을 책임지는 것은 도로가 아니라 소규모 차원문이었다. 모두에게 알려진 차원문은 열 개 남짓이었고 덜 유명한 것들, 드러나지 않은 것들, 새로 세워지면서 목적지가 변한 것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그것들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점 이어 그리기 그림의 일부로 기능했지만 완성된 그림이 어떤 형태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물망을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녀는 통로 한구석에 쌓인 살점 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대부분의 영혼은 달아나 새로운 몸을 구했지만 몇몇은 아직 남은 상태였다. 어떤 이유로든지 당시의 몸을 포기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볼로디아는 그들 중에 늑대인간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까지도.
[원한다면 그곳에서 꺼내 주겠네. 대신 바단 통로까지 안내를 해 주었으면 해.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면 내가 들을 수 있으니 그렇게 대답하게나.]
동요하는 기운이 느껴지더니 답이 돌아왔다. 늑대인간은 자신의 형태와 파묻힌 위치를 알려 주고서는 볼로디아의 정체를 물었다.
[제국 사람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대답하자면, 얼마 전에 바단의 주인이 된 사람일세. 보았으니 알겠지만 자네와는 동족이지.]
늑대인간의 영혼이 반가움을 담아 흔들렸다. 통로에 갇힌 지 네댓 해밖에는 되지 않았으니 차원문 경로에는 크게 바뀐 점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보금자리에 들르고 싶다고 했다. 먼 거리는 아니니 크게 지체될 일은 없으리라고도.
볼로디아는 그 부탁을 선뜻 받아들였고, 헤이딘을 시켜 살점 더미를 걷어내게끔 했다. 무색 마력이 보이지 않는 팔처럼 뻗어 나가며 덩어리의 윗부분을 쳐냈다. 거기에 호응하듯 기계 부품과 찢겨 나간 팔다리의 산 아래에서 무언가가 호각 소리를 냈다.
<이 물건이군요.>
이윽고 그녀는 늑대인간의 넋이 담긴 기계 장치를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세로로 긴 금속제 원통 양옆에 바퀴와 기계 팔이 붙은 구조였고 한쪽 팔에 안아들 수 있을 만큼 작았다. 기둥의 절반 높이까지 올라오는 두 바퀴는 한쪽이 완전히 파손되어 있었다. 기계는 바퀴가 망가진 쪽의 팔로 땅을 짚고는 다른 바퀴로 앞뒤를 구르며 인사했다. 생각만으로 답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싶다는 부언이 이어졌다.
볼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동식 수납함은 뚜껑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공책이었다. 그는 익숙한 태도로 첫째 장을 펼치고서는 볼로디아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기계가 원래는 머틀이라는 이름의 늑대인간 소년이었다는 것, 몸을 잃고 수납함에 담긴 후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양해해 달라는 것, 부디 이 공책만은 빼앗지 말아 달라는 것 등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문장에 이른 볼로디아는 바퀴 하나와 두 팔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 있는 기계 장치를 내려다보았다. 원통 앞에 새겨진 각인 불빛이 점 두 개와 선 하나로 웃음을 나타냈다. 그 표정은 영혼이 보이는 감정과 일치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