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영원한 황태자 (2)
"바로 출발합시다. 이 셋이면 됩니다. 헤이딘의 반지까지 하면 넷이겠군요."
티아는 황태자를 만나서 설득하는 길을 모두 읊어 주지는 않았다. 일일이 알려주기에는 가능성의 세계가 너무 다양했고 변수도 많았다. 말해 보았자 외우기는 불가능하고, 그런 일에 심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으니 그때그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겠다고만 했다.
이 시점에서 조율할 수 있는 요소는 인원 구성이 유일했다.
"넷으로 충분하겠소?"
"충분합니다."
저주는 서부 늪지대 전체에 영향을 끼쳤지다. 그러나 마력 흐름의 왜곡은 타마기스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났고, 도시의 경계면에 세워진 마법 방벽 역시 그러한 뒤틀림의 소산이었다. 궁전 회당에서부터 뻗어 나가던 힘이 급격히 사그라지는 지점에서 강력한 반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부패자들은 도시 내외를 마음껏 오갈 수 있었지만 영혼이 저주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은 방벽을 넘어가지 못했다. 진입할 방법은 세 가지였다. 용기수를 생포해 함께 도시로 들어가는 것. 아즈리온의 권능을 이용해 방벽 한구석에 구멍을 내는 것. 교류 통로를 이용하는 것.
정석 공략은 세 번째였다. 제국의 도시들은 각 방위마다 다른 도시와 이어지는 네 개의 통로를 두었고, 이러한 통로는 슈문의 권능 아래 유지되었다. 타마기스가 저주에 의해 봉쇄된 지금조차도 그 토대만큼은 남은 상태였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황무지의 학자들> 시나리오를 마친 뒤부터는 슈문에게 부탁해 타마기스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약도 있었다. 오염 지대에서 수리를 마치긴 했지만 슈문의 상태는 아직 온전하지 않았고, 완전히 복구를 마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최소한 보름 정도가. 그 전에 교류 통로를 이용했다가는 잘못된 곳에 떨어질 우려가 있었다.
"지금 상태라면 일행이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바단 통로에 도착하고 누군가는 야스와다 통로에 도착하는 식으로 일행이 나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장군님이야 혼자서라도 무사하겠지만 마타치치나 벤트레스 같은 경우는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황제와 다툴 일은 없을 테니 검증된 소수 인원으로만 움직이자는 말이군."
"예, 맞습니다. 헤이딘은 반지에 담겨 있으니 문제가 없고, 요정 녀석은 지혜의 고리로 바꾸어 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전송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도 위험 부담이 적을 겁니다."
볼로디아는 선뜻 수긍했다. 란드와르는 다음 안건으로 주제를 옮겼다. 언어였다. 부패자들은 고대 요정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타마기스로 떠나기 전에 슈문에게 언어의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헤이딘은 제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둘은.
그러나 설명을 끝마치자마자 뜻밖의 반론이 돌아왔다. 요정 놈이었다.
"전 필요 없는데요."
"가서 말 안 하고 다닐 거야? 주머니 안에만 박혀 있을래?"
"제가 명색이 신관에 정원사인데 고대 요정어를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저번에, 늪지대를 지나갈 때 용 기수랑도 이야기를 나눴고요. 나으리께서도 그때 옆에 계셨으면서 괜히 짜증을 내시다니요."
그게 대체 언제 일이야? 작년 여름이었으니까 거의 한 해 전이었다. 그간 별별 사건을 겪은 탓에 테빈 일당을 제물로 바쳤던 것쯤은 자다가 모기에 물린 것보다도 사소한 일이 되고 말았다. 란드와르는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은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볼로디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는 티아가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볼로디아의 경우에도 큰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왜요? 늑대인간들도 고대 요정어가 필수 교양인가?
<이 땅이 늑대의 꿈이라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예, 알죠.
<지구와는 달리, 늑대의 가장 큰 이름 아래에서는 본질이란 것이 명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처음부터 이름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무언가를 사과라고 부르는 일이 사회적 합의나 관습이 아니라 자연적인 법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늑대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는 의미와 기호 사이의 관계에 필연성이 있―>
티아가 갑자기 헤이딘처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웠다. 란드와르는 깊이 고민하는 대신 즉각적인 해결 방식을 적용했다.
죄송한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아요, 요점만 말씀드리죠. 각각의 별은, 그러니까 신의 심장은 늑대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세계 그 자체인 존재가 언어에 구애받는다면 이상한 일이겠죠. 볼로디아의 경우에는 피투성이 심장과의 동화율이 높아져서 의미로 소통할 수 있게 됐단 소립니다. 강현씨가 그런 것처럼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이런 식으로 뜻을 전하는 것도 비슷한 원리고요.>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야죠. 그나저나 동화율이 얼마길래 그게 가능한 겁니까?
<일전의 대화를 마친 직후… 유의미한 상승을 보였습니다. 문제는 동화율이 소통이 불가능할 만큼 높아졌다는 데에 있겠군요. 신이 다른 신의 신탁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헤이딘의 반지는 볼로디아에게 맡기는 편을 권합니다. 만약 서로 엇갈렸을 때에는, 슈문을 경유해 헤이딘에게 지령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
란드와르는 잠시 신이 되는 일을 곱씹었다. 심장의 소유권을 얻어내는 데에 정신력이 중요한 만큼 동화에도 마음가짐이 크게 작용하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볼로디아의 태도는 한 도시의 통치자보다는 세계의 관리자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재차 깨달았고, 생각을 멈췄다.
그는 테네브로즈를 지혜의 고리로 만든 후 볼로디아에게 동화율 문제를 설명했고, 함께 중앙 동공으로 나섰다. 마타치치에게서 헤이딘의 반지를 빌려야 했다.
* * *
그때 중앙 공동에서는 란드와르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르시소 사람들은 늑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헤이딘이 마타치치와 접선하면서 그 사실을 밝혔고, 마타치치는 중앙 동공의 학자들에게 그대로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다. 만약 헤이딘이 다른 방법을 택했을지라도 결말은 같았을 터였다. 만신전과 우호 관계긴 했지만 슈문도 요정 신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나르시소 학자들의 상상력이 필요 이상으로 활발했다는 데에서 왔다. 미궁이 가동되는 동안에는 사명감과 불안 덕분에 억눌려 있던 미덕이었다. 어쩌면 악덕일 수도 있고.
말루카 한림원과 거주지 이전 문제를 협의하자마자 그들은 지혜의 신에게 늑대에 대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계시는지, 이 땅이 그분의 꿈이라는 것이 사실인지, 기타 등등.
슈문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더 많은 질문이 생겨났다. 그분이 이름을 되찾았을 때 깨어나신다면, 즉 꿈이 멈춘다면 다시 시작되리라는 보장은 있는지요? 그리고 꿈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세계의 법칙이나 우리의 지식 체계가 일거에 바뀔 가능성이 있는지요? 예컨대 제가 지금 연구하는 분야는 모든 실수 범위에서 특정 가능한 미분동형사상의 특이칙성인데…….
학자들은 평생을 바친 연구 주제가 한순간에 무로 돌아가는 사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고통을 느꼈고, 자신의 논문이 앞으로도 의미 있기를 원했다. 슈문은 그런 것은 장담할 수 없다고, 그분이 깨어나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답했지만 항명 사태는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끔찍하군요."
내장이 입으로 역류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볼로디아가 던진 논제로부터 겨우 도망쳤는데 반나절도 안 되어서 똑같은 질문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하긴 놀랄 상황은 아니었다. 늑대가 이름을 되찾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의문을 품는 건 지당한 반응이었고, 그리고… 갑자기 로안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기본적으로 로안도 늑대 문제를 알고 있었다. 수정 심장을 회수한 뒤, 로안이 세카두에서 막 깨어났을 때 말해 주었다. 이 땅은 물론이고 신들의 심장이나 화신의 몸도 결국엔 늑대의 일부라고. 인간들의 신이 여러 우주를 뛰어넘어 이스트리아에 도착한 것도 늑대의 부름 때문이라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늑대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학자들과 비슷한 사고과정을 거쳤을 게 분명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로안이 낸 답을 알아야 했다. 그는 수정 심장의 책임자로서 늑대가 깨어났을 때 다른 신들과 함께 의논할 자격이 있었다. 그때 대전쟁의 영웅은 누구의 편에 설까?
란드와르는 그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 아니라 완고하고 강경한 노인이라는 데에서 위안을 얻기로 했다. 인간 도시의 기틀을 닦고 요정을 수없이 죽인 만큼 그 결과물에 큰 만족을 느끼는 사람 말이다. 지금의 로안이라면 아마도 이 학자들을 강제 지식 노역소에 수용하는 안건에도 기꺼이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이건 약간 끔찍하군.
그리고 다른 의미로 끔찍한 노인도 하나 있었다. 란드와르와 볼로디아는 잠시간 그 노인을 찾아 다녔지만 항의하는 군중 사이에는 없었다. 란드와르는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타치치의 쪽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헤이딘은 누구보다도 강렬한 탐구열의 소유자였지만 초월자들의 일을 감히 묻지 않을 정도로는 분별력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파편적인 정보를 이어 붙이려면 상상력이 필요했고, 그런 류의 창의성은 대개 패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기껏 따낸 한림원 총장 자리를 잃을 마음은 없었다.
물론 늑대의 이름 이야기를 들은 직후에는 하루 이틀쯤을 고민하기도 했다. 이 땅이 거대한 짐승의 꿈이라면, 늑대가 이름을 되찾아 깨어날 때 땅의 시간 또한 멈춘다면… 그게 이전과 같은 상태로 다시 시작되리란 보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안이 생기는 종류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헤이딘은 초월적인 염려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자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그는 원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금방 잊어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마타치치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우리도 나가서 토론에 참여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영 걱정스럽네요. 물론 세상의 진리를 아는 건 자기네들밖에 없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던 꼴을 생각해 보면 그 녀석들은 마음고생 좀 해도 싸지만, 음……."
<마타치치, 난 우리 의식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봐요. 영혼과 정신에 대한 탐구에는 딱히 조예가 깊지 않지만, 그래도 말해 보자면, 꿈이 생겨나고 끝나는 것은 철저히 의식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사실은 죽음이 외부적인 일인 것과 맥락을 공유하죠. 영혼이 씻긴 사람 자신은 이전의 상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감각하거나 사고할 수 없으니까요. 세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실천이라면 지금 여기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일 수 있겠죠. 하지만 난 조금 다른 걸 묻고 싶은걸요. 삶이 언제나 외부로부터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 종결된다면, 그 후의 일들은 순전히 외부의 것이 된다면, 끝이 있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인은 뭘까요? 난 이렇게 생각해요. 세계가 어떤 식으로든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 미래가 현재 위에 서 있다는 믿음, 따라서 우리의 삶이 일말의 흔적으로나마 남을 거라는 믿음이죠. 그 흔적이 반드시 명시적일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요약은 요약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가 길어졌고, 어느 순간 헤이딘은 펠로시를 떠올렸다. 각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늑대인간이 미치려 했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정말로 이 주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그는 언짢거나 두려운 것,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고민을 유보했다) 마타치치는 멈추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능세계 의미론적인 것으로 옮겨 가려 애썼지만 마타치치는 강경하게 현상학적 견지를 밀고 나갔다. 중앙 공동으로 내려가서 다른 학자들처럼 슈문에게 따져 대는 것보다는 나을지라도 고역이긴 마찬가지였다. 헤이딘은 그녀가 부디 마음을 바꾸어 총 이야기나 하길 빌었다…….
"마타치치 씨, 이거 바쁘신 중에 미안한데 반지 좀 빌리겠습니다. 오래 안 걸려요."
관계의 손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반지 속에 틀어박히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할 무렵 출구가 나타났다. 타마기스에 가는데 헤이딘의 반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헤이딘은 아닌 척 기쁘게 삶의 동반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란드와르와 함께 중앙 동공으로 나섰다. 슈문은 요정들을 관점과 중점에 따라 몇 개의 무리로 분류해 그들 각각에게 논지를 취합해 올 것을 명령한 상태였다. 마타치치가 그런 것처럼 누구도 쉽게 승복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기뻤다. 만약 도망쳐서 간 곳이 시체들의 땅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