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영원한 황태자 (1)
신들의 힘과 마법이 제국을 지탱했다.
야스와다의 명문가 요정들은 처형자인 동시에 법관이었고 윰 시밀은 모든 질병의 주인이자 치유사의 가장 큰 스승이었다. 그처럼 슈문은 논리와 공간을 다루었으므로 그것을 제국에 베풀었다.
그는 다섯 도시의 각 방위마다 다른 도시와 이어지는 교류 통로를 두었다. 이러한 통로는 차원문과 비슷했지만 동력원이 불필요하다는 점에서 달랐다. 따라서 요정들은 사람이 오갈 때에는 차원문을 썼고 물건을 옮길 때에는 통로를 이용했다. 이로써 바단의 요정들도 나우파나의 과실을 즐길 수 있었으며 야스와다에서도 타마기스 장인이 만든 가구를 받아볼 수 있었다.
또한 슈문은 특별한 각인을 고안해 얇은 금속판에 새기게끔 했다. 요정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금속판을 통해 지혜의 궁전에 담긴 논문을 살필 수 있었으며 대륙 반대편의 소식도 곧바로 받아들었다.
그러나 지혜의 신이 요정들을 저버리며 이러한 은혜는 빛을 잃고 말았다. 어떤 부패자는 여전한 희망을 간직하고 교류 통로 주위를 떠돌곤 하지만, 그런 기다림이 보답 받은 적은 없다.
* * *
슈문을 깨운 뒤, 강현은 곧바로 타마기스로 출발하는 대신 며칠간 미적거렸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만신전 운명부에서 아직 계산 결과를 내어 주지 않았다는 점. 테네브로즈나 벨레다나 여럿이 부상병 신세가 되었다는 점. 슈문의 힘이 완전히 돌아오려면 보름쯤이 더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시나리오 개방 시기가 아니라는 점. 최소한 게임상으로는.
앞선 네 개의 시나리오는 순서를 선택할 여지가 있었지만 <불멸의 제국>과 <야스와다의 파멸>은 고정이었다. 제국의 다른 별들이 한 차례씩 나타나면 타마기스가 열렸고, 타마기스에서 성물을 회수한 뒤에는 이시 타브를 죽여야 했다. 그러면 끝이었다.
지금까지 뜬 별은 넷. 야스와다, 바단, 나우파나, 와그다스. 그 다음의 별이 무엇일지는 명백했다. 자신들의 차례를 직감한 부패자들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고, 살육 광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황태자는 질서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상황은 나날이 나빠질 뿐이다. 그때 외부인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즉 시나리오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별이 뜨고서도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치안이 완전히 망가져야만 했다. 일찍부터 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애당초 불가능했다. 성문과 마법 방벽을 돌파하면서 들어갔다가는 수비대와 황태자에게 적으로 인식될 공산이 컸고, 그랬다가는 단번에 전개가 꼬였다. 용에게 잡혀 가는 것도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따라서 보통은 슈문의 힘을 빌렸다. 슈문은 논리와 공간을 다루는 신이었으며 타마기스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앞선 시나리오와 <불멸의 제국> 사이에는 언제나 보름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평시의 타마기스를 거니는 사람은 공략보다는 경치 구경을 더욱 즐기는 부류뿐이었다.
시뮬레이터에서는 그랬다.
시뮬레이터는 현실이 아니었다.
* * *
예상한 소식이라고 해서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말고사를 포기한 대학생이 F만큼은 피하게 해 달라며 절박한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현실에는 기적이 없다.
<어쨌든 본론은 이게 아니고… 계산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열흘 남았습니다. 나무가 야스와다를 뒤덮기까지 열흘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술에 취한 로안을 침대에 눕힌 뒤 볼로디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티아가 갑자기 끔찍한 소식을 전해 왔다. 란드와르는 미간을 좁혔다. 여기에 비하면 나르시소 학자들의 사회화는 사소한 문제였다.
열흘 뒤부터 나무가 자란다는 거죠?
<아뇨, 지금부터 자랍니다. 다만 나무가 야스와다를 집어삼킨 다음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기점이 열흘 뒤라는 뜻입니다. 참, 보라색 별도 떴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다행히도 슈문이 제시한 안건은 전망이 꽤 긍정적입니다.>
잠깐만. 그건 그렇다 치고 열흘이 남았으면 지금 당장 타마기스로 가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 당장요.
<시행안대로라면 오래 걸리진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한두 시간 내로 출발하시는 편을 권합니다.>
란드와르는 티아에게서 시뮬레이션 결과를 전해 들으면서, 중앙 동공에서 보낸 이틀간을 되짚어 보았다. 햇볕을 못 받은 탓에 시간이 정확히 이틀인지 사흘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사이에 걸쳐 있겠지. 어쨌거나. 바쁜 일도 많았고, 계산 결과도 기다리느라 며칠쯤을 미적거리긴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둔 상태였다.
슈문에게서 단검 이야기를 들은 직후 변경에 대피령을 내렸다. 티아를 경유해서 파르타에게 계시가 들어갔을 테니 일처리는 잘 됐을 것이다. 정보사의 능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야스와다에 있는 테네브로즈의 누님들에게도 말을 전해 두었다. 딤 나겔과도 상의를 해야 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테네브로즈가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나으리, 딤 나겔이 깨어났다가 다시 졸도했답니다."
* * *
요정 놈은 볼로디아의 옆에 앉은 뒤 설명을 시작했다. 나트람의 막내아들이 와서 난리를 피우다가 자러 갔다고 했다. 딤 나겔은 네르갈을 보내고서는 다시 쓰러졌고, 그 직후에 보랏빛 별이 떴다고. 란드와르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백으로만 남아 있던 의문 몇 개가 답을 찾는 것을 느꼈다.
"나트람이 너한테 술 먹인 날이 그때였던 거지?"
"그렇겠지요."
"딤 나겔이랑 나트람이랑 아직 영혼이 이어져 있는 거냐."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다던데요."
"헤이딘 몸은 별불꽃 본가 지하실에 있고?"
"그렇지요."
"그렇구나."
그렇구나, 로 될 일이 아니라고는 느꼈지만 달리 나오는 말이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볼로디아도 비슷한 심경인 듯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놀라운 뒷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딤 나겔이 아니라면 귀족이나 명문가들을 움직일 방법이 없었다. 엘드리그는 반역자의 딸이었던 것이다. 환술을 쓰더라도 신원이 불분명한 평민 이상의 존재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질문 앞에서 생각이 턱 막혔다. 란드와르는 습관적으로 시가를 꺼내 끄트머리를 질겅거렸다. 턱이 뻐근해질 무렵에야 답 없는 문제로 앓을 바에는 서둘러 타마기스에 가는 게 나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정원사들이야 청지기에게 맡겨 두고, 자신은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 점에 대해서는 미리 슈문과 논의한 바가 있었다.
"사제야."
"예."
"너 청지기님이 황제 동생이라지 않았냐."
대전쟁 초기에, 황제는 신의 힘을 탐내 아버지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 순간 저주가 타마기스 땅을 휩쓸었으며 황제는 회당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역사에는 그렇게만 적혀 있었고 <이스트리아 퀘스트>에서의 설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상은 조금 달랐다. 솔로틀은 타마기스를 봉쇄하기 위해 늑대에게 따로 꿈 조각을 받았고, 직접 땅에 나타나 자신의 형에게 그것으로 만든 검을 건넸다… 황제는 죄책감과 의무감으로 신위를 물려받은 뒤 주민을 영토에 가뒀다.
이 사실은 인간은 물론 부패자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제국에서나 지금이나, 저승과 청지기는 역사 바깥의 존재였던 것이다. 황태자도 진상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젠 싫어도 알게 되겠지만.
"역병의 저주를 내린 게 윰 시밀이 아니라 황제라면서. 그러면 청지기님이 말로 해서 풀 수 있는 거 아니냐."
"예, 됩니다. 안 그래도 그러실 생각이라던데요. 저승에 있는 동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진작 말 안 했어."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지요. 안 그래도 지금 청지기님께서 잔소리를 늘어놓고 계시니 나으리께서 또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란드와르는 욕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요정의 머리에 문제가 있고 생쥐들이 또 역사왜곡을 저지른 것과는 별개로 이건 명백한 호재였다.
타마기스를 무대로 전개되는 <불멸의 제국> 시나리오는 특히 어려운 것으로 악명높았다. 역병 늑대와의 전투는 그렇다 치더라도 최종전에서는 살아남은 부패자들이 황제의 부름에 이끌려 황궁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플레이어는 황제와 맞서는 동시에 밀려드는 시체 무리까지도 막아내야 했다.
하지만 솔로틀이 나서 준다면 대부분의 난관을 지나치는 게 가능했다. 야스와다 문제는 공략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타마기스는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하는 셈이었다.
란드와르는 머릿속에서 주판을 굴려 보았다. 회당의 문을 열 수 있는 존재는 황태자가 유일했고, 따라서 시나리오의 핵심 역시 그녀의 신뢰를 얻는 데에 있었다. 목표를 위해서는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다녀서는 안 된다. 소란도 최소화해야 한다. 침입자라는 인상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티아, 여럿이 갈 필요 없다고 했죠?
<예, 시뮬레이션 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계산 자원에 나우파나의 별이 추가되었으니 착오가 없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이거 불안해지는데. 믿어도 되는 겁니까?
<중요한 분기점만 계산하느라 세부적인 사건은 모두 건너뛰게 되었습니다만, 큰 틀에서는―>
아니, 거기까지만 이야기해요. 거기까지만. 더 안 들을래요.
말이 길어지는 건 뭔가 껄끄러운 점이 있다는 소리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개선될 여지도 없고 스트레스만 주는 요인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게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든 간에. 그는 고개를 돌려 볼로디아를 보았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투로 턱을 괴고 있었다.
"바로 출발합시다. 이 셋이면 됩니다. 헤이딘의 반지까지 하면 넷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