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아들의 몫 (4)
"높으신 분들이 그 골칫덩어리를 데려가다니 별 일이 다 있군. 종이더미까지 해서 말이야. 하기야 길거리에서 굴러먹던 미치광이는 아닐 것 같긴 했어. 그나저나 이거 참 불공평한 일 아닌가, 우리는 사람도 보내 주고 이쪽 소식도 알려 주는데 돌아오는 건 말할 수 없다는 소리뿐이니. 하기야 잘 되고 있진 않겠지. 잘 됐으면 별이 이런 식으로 뜨진 않을 거야. 교단 측에서도 변경에 대피령을 싹 내렸다니까 뭔가 있긴 있나 본데, 이게 참, 이쪽이나 저쪽이나 높으신 분들 입 무거운 건 똑같군그래. 이 동네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잡놈들로 득시글거리고 말이지. 하여간 일이 나도 단단히 난 판에 도박장 개업 광고나 돌리고 있으니. 무덤 자리로도 도박판을 열 놈들.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내가 이제부터 저기에 줄을 설 예정이라는 거야. 아는 건 하나도 없고 대처할 도리도 없는데 도박이라도 해야지 방법이 있나."
* * *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신 것 같아 보기 좋군요."
쉭겐은 노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난간 너머의 호수를 힐끔 보았다. 빗방울이 작은 유령처럼 뛰어내리며 수면에 원을 그렸다.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만으로 소명을 다하는 알갱이들. 두드리는 듯한 동심원. 두드린 세계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출렁거리는 노을만이 남을 뿐이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여기에 앉아 있다 보면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이곳에서 명반을 살피는 걸 보고는 얼마나 부러웠는지요. 그래서 대모님께서 처음에, 제게 뭘 바라느냐 묻자 이 테라스와 호수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더한 걸 원하진 않으냐 하시더군요."
토텐부르그가 본가에 있던 시절에, 그는 이 테라스에서 동생과 함께 다과를 즐기곤 했다. 그러나 이제 자리에 앉은 것은 늙은 남자였다. 노인은 그 말들마저도 빗소리의 일부로 듣는 듯 초점 없는 눈을 깜박이고만 있었다. 쉭겐은 그에게 걸린 주문을 풀고 반응을 볼까 고민하다가 평온한 시간을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똑같은 말들을 줄곧 쓰고 계셨더군요. 충격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버지 서랍에 고발장이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새어머니와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당연히 들었겠지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두 분의 별자리를 보았더니 염정과 홍란, 그리고 경양이 부궁에 동회하더군요. 그래서 할 일을 했습니다. 별들이 흉액이 있으리라 했으니 제가 그 흉액이 되어 드린 것이지요. 어릴 적에는 저도 신이라는 분들을 충성스레 섬겼으니까요."
쉭겐의 아버지는 평민 별점술사였고, 반려가 일찍 죽은 뒤에 일드얀의 막내딸과 새로이 혼례를 올렸다. 그렇게 태어난 배다른 동생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쉭겐은 아버지의 서랍에 있던 고발장을 빼돌려 일드얀에게 보여주었다. 고발장에는 일드얀의 별자리와 기이한 점에 대한 추측들이 적혀 있었다.
이에 일드얀은 별점술사와 자신의 딸을 가두고서는 가문 바깥에서 난 소년을 새로운 자식으로 들였다… 대모의 지원 아래, 쉭겐은 아버지만큼이나 유능한 점술가로 자라났으며 그 은혜에 걸맞는 충성을 바쳤다.
"제가 평민의 아들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세상의 뜻에 충성스러워서 그랬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한 사람의 마음 따위야 중요할 것도 없지요. 어쨌거나 두 분께서 별채에 갇힌 다음에도 물음이 계속되더군요. 제가 별자리를 확인한 탓에 그런 일을 벌인 것인지, 혹은 제가 그런 일을 벌일 예정이었던 탓에 별자리가 그렇게 나온 것인지 하는 것 말입니다."
노인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쉭겐은 그가 한때는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별점술사였음을 떠올렸고,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그렸다.
"아버지도 별점술사셨으니 제 말을 아실 것입니다. 열네 개의 주성은 신의 뜻이며 네 개의 보좌성은 세상의 의지로서, 그 빛의 움직임이 우리의 명운을 결정하지요. 각각의 별이 다른 뜻을 보일지라도, 어쨌거나 그 총합은 옳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결국엔 같은 종착지로 이끌려 간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요?"
마법과 별점술은 일견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원리로 동작했다. 하나는 규칙과 규칙 사이의 허점을 파고드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상에 나타난 뜻을 올곧게 파악해 그 결과를 이용하는 일이었다―오직 올곧게. 그 차이가 별점술사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가문의 주인은 별점술사들의 방종을 어느 정도는 눈감아 주었고, 가끔은 격려하기까지 했다. 일드얀이 쉭겐에게 토텐부르그를 허락한 것처럼. 그에게 이복동생은 차투랑가 기물이기 이전에 작은 분신이었고 태엽 인형이었다. 그 태엽을 돌릴 때만큼은 일말의 자유를 믿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의심은 강박처럼 남았다.
"미칠 것만 같았지요. 제가 동생만큼이나 순종적인 성격이었더라면 이런 불만도 품지 않았겠지만, 어쨌건 저는 저였던 겁니다. 별들이 사람의 앞날을 쥐고 휘두른다면, 그 일이 넋에 이미 적혀 있다면, 마음이란 잠깐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지는 불꽃이 아닌가 싶었지요. 내가 진실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했어요."
쉭겐은 별점술의 괘를, 대모의 평생을, 그리고 그녀의 넋과 함께하는 다섯 반신을 떠올렸다. 완전해진 단검에는 땅을 바꿀 힘이 있었으며 단검의 일부가 된 이들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터였다. 쉭겐은 여전한 미소와 함께 속삭이듯 말했다.
"대모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뜻조차 결국에는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요―그러면 말입니다, 이 땅의 형태를 달리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기물이라는 사실만큼은 여전하겠지만, 기물이 움직이는 규칙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놀이판의 모양을 바꿀 수 있다면요? 그러면 그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말에도 노인은 평온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의심 없이 믿어 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쉭겐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빗소리를 즐겼다. 이런 고요를 즐길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모든 상실은 갑작스럽다. 앞날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렇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변하는 게 어떤 일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 순간을 겪어야만 한다. 짐작만으로는 결코 가 닿지 못할 공백이 있다. 그리고 그 공백을 아는 순간 영영 잃어버리는 것들도 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최대한 담아 두는 수밖에는 없다… 그의 의식은 한동안 오늘과 어제 사이를 맴돌다가 기억으로 변해 가는 것들에게로 향했다.
이윽고 초점 없는 보라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의 어둠을 뚫고 훅 다가왔다. 벤트레스는 별점술을 배운 적은 없을지라도 무언가를 보았다. 야스와다 한복판에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리라는 것. 자신의 아들이 신의 반려가 되리라는 것. 그처럼 허무맹랑하고 기이한 이야기들.
쉭겐은 그런 예언을 즐겼고 벤트레스는 대모의 이야기를 원했다.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교환식에는 둘 모두에게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숨어 있었고, 결국 협상은 항상 제자리를 맴돌았다. 무엇을 지불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얻어내려는 사람이 둘 있으면 일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쉭겐은 가끔 벤트레스의 뼈를 부러뜨렸다.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다가도 한순간에 유순해지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삶을 아무렇게나 흔들리도록 내버려두는 꼴이 언짢았기 때문에. 뼈가 어긋나고서도 짜증조차 내지 않는 모습을 보면 화가 배로 치밀었다.
다행히도 그는 남의 다리나 손목을 박살낸 다음 치유사를 불러줄 만큼은 정중한 사람이었고, 벤트레스도 그 정도의 친절에 만족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는 명반에서 길을 찾아내기에는 너무 사소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 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끝날 때, 벤트레스는 자신을 위해 치유사를 불러 줄까? 그리고 녀석이 무엇을 택하든 간에, 그건 정말로 선택일까? 정말로?
그 질문에는 답이 없었지만 최소한 즐거움은 있었다… 그는 한동안 몽상 속에 잠겨 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 하인의 손길에 눈을 뜬 쉭겐은 호수 위에 두 개의 빛 덩어리가 가물거리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나는 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와그다스의 별이었다.
쉭겐은 소리 내어 웃었고, 일어섰다. 대모를 뵈러 갈 시간이었다.
* * *
"…천이궁에 거문과 화기가 있고, 이때 지공과 양령이 상합합니다. 그러나 행한에서 천괴를 만나므로 타지에서 객사할지라도 큰 뜻은 이루는 형상이 됩니다."
"그것까지는 똑같구나. 계산점을 옮겨 보아라."
연죽을 깊이 빨아들인 일드얀은 자신 앞에 무릎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명반 위에 떠오른 광점들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제부터는 그자가 아니라 저와 대모님의 운명을 함께 셈할 것입니다. 우선은 칠살조두격으로 칠살이 신궁에 독좌하니 바라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천이궁에서 염정과 천상, 지겁이 동궁하므로 모든 일이 무상합니다. 이는 일전에 없었던 형상으로서 우리 계획에 부족함이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 어둠달 놈과 관련이 있느냐?"
"제가 다시 계산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별에 적힌 일들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그저 흐르는 것이며, 사후에 보면 간명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얼개를 맞출 수 없는 것으로서, 저는 이마저도 하늘의 뜻이라 여깁니다."
쉭겐은 고개를 들어 은빛매의 대모와 시선을 맞췄다. 위로 휘어졌지만 미소는 아닌 입꼬리는 비단 옷감에서 풀려난 올을 연상시켰다. 실패를 직감했지만 포기하진 않는 사람들이 결말을 향해 내달릴 때, 스스로의 파멸마저도 부감(俯瞰)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들은 그런 표정을 짓는다. 그는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며, 덧붙여 물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사죄할 곳도 없고 도망칠 곳도 없으니 끝을 보아야지 않겠느냐?"
"저 또한 같은 뜻입니다."
"잃어 보았자 고작 목숨일 뿐이다."
일드얀의 말에 쉭겐은 씩 웃었다. 시도는 실패로 끝나겠지만 그 실패가 어떤 형태일지는 아직 분명치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그런 여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요정 모두를 위한 일을, 하지만 다른 가문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일을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