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아들의 몫 (3)
네르갈은 딤 나겔의 이야기를 부정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받아들였다. 먼 친척뻘 되는 노인에게 일종의 정을 느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딤 나겔은 소년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는 노력 없이, 지난 일들을 가만히 읊기만 했다… 네르갈은 그런 태도마저 위장이 아닐까 자문해 보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일지라도, 남은 질문은 여전히 많았다.
"왜 그때 나트람을 죽이지 않았지?"
"언제를 말하는 게냐?"
"아주 어렸을 때. 아니면 당신 딸이 죽었을 때. 아니, 언제라도 좋아. 왜 줄곧 가만히 있었지? 복수심 때문에? 당신이야 주문에 묶여 있었다 쳐도, 러스터는?"
소년의 말투는 그 아버지가 갖가지 질문을 던져 대던 시기를 연상시켰다. 딤 나겔은 현기증이 거세지는 것을 느끼고는 짧게 신음했다.
"무슨 이유로든 내 결정 때문에 별불꽃 사람들이 괴로움 속에서 살아온 건 사실일 게다. 거기에 대해서는 사과하마. 하지만 네게는 용서하고 말고를 논할 자격이 없고, 러스터에게 왜 나서지 않았느냐며 겁박할 자격도 없다. 지금 보면 부정할 길 없이 명징한 것조차도 당시에는 수수께끼로만 느껴지기 마련이야. 많은 잘못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지난 시간에서 한 대목을 잘라내 훈수를 두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야. 수수께끼가 아니었어. 당신네는 나트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고, 나트람도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지. 정답은 오래전에 이미 나와 있었던 거야. 당신은 복수심 때문에, 영감은 겁쟁이라서 차마 하지 못했을 뿐이지."
"누군가가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휩쓸릴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말이다. 명문가의 가주이자 3교구의 중역이었던 자다. 죽고 싶어 하는 이를 죽였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고발장을 쓰더라도 마찬가지야. 그랬다가는 네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을 테고, 그 격랑을 짊어지기에 한 사람의 정신은―"
"그것도 다 변명이야! 할 수 있었다면 해야 해!"
날카로운 외침이 말허리를 끊고 들어왔다.
"어리구나… 아직 어려. 나는 이런 일에서, 누군가에게 행동하지 않은 책임을 함부로 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게다. 반대로 묻자꾸나. 네 어미에게 이런 식으로 따진 적이 있느냐? 메기도를 왜 감싸주지 않았냐고 대들어 보았어? 물론 너는 이렇게 답하겠지―그이는 평민 출신이고 아무런 힘이 없었다고. 한평생을 묶여 산 탓에 감히 대들 마음을 품지 못했다고. 옳은 말이다. 헌데 그런 너그러움을 왜 러스터에게는 보여줄 수 없단 말이냐?"
"달라! 엄마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런 식으로 믿고 대답하는 게 바로 네 비겁함이야."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도맡는 동안, 그리고 그 이전부터 딤 나겔은 누군가를 죄인으로 몰고 나머지를 무결한 피해자의 자리에 두는 건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종결에 가깝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매듭을 풀어 헤치는 대신 불태워서, 복잡한 부분이라고는 처음부터 없었던 양 믿으려는 수작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소리야?"
"불행의 몫을 셈한다면 내게 큰 조각이 돌아오겠지. 그건 옳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잘잘못을 나누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법이다. 지나간 시간을 논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지. 그런 태도는 오만에 불과해."
"3교구 신관들에게 가서 그렇게 말해 보시지! 형량을 정하는 건 오만일 뿐이라고!"
그리고 딤 나겔은 이렇게 외치는 젊은이들에게도 이골이 나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 특유의 순진성이 가끔은 무례나 오만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되새겼고, 해묵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얘야, 잘 생각하고 답하거라. 그 질문을 다른 사람들은 떠올리지 못했을까? 내 딸은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는데, 내 고민의 무게가 네 삶보다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겪어보지도 못한 세월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태도가 교만의 증거가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딤 나겔은 소년의 눈동자가 힐끔 러스터에게로 향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좋은 징조였다. 이 소년은 다른 가문은 물론이고 별불꽃의 땅 안에서도 가까이 지내는 이가 없었고, 그래서 늙은 하인을 특별히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살가운 태도로 드러나진 않았을지라도. 그런 기대가 배반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발작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그는 소년이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번에 던져진 논제는 더 이른 시기를 지목하고 있었다.
"당신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트람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고 했지."
"그래."
"그런데 왜 가주가 되라며 부추겼지? 왜 신관 직분을 받들고 반려를 맞으라고 했어? 오두막에 틀어박혀 지내라고 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어릴 때에는 당신 말을 유독 잘 들었다면서?"
"네 아비는 평범한 요정의 마음을 원했고, 천성을 억누르려 노력했고, 그래서 내가 도움을 주었다. 그것뿐이야.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함께하길 원하는 사람을 내쫓는 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지. 사촌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이였을지라도 똑같이 했을 게다."
"괴물에게 살가죽을 선물한 게 바로 당신이군!"
"한 마디도 지려 하지 않는구나. 누가 괴물이라는 걸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알지 못할 속내를 다른 사람이 헤아릴 방법이 있을까? 헤이딘의 일은 유감이지만… 이런 식으로 결과가 나기 전까지 누가 그걸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딤 나겔은 몸을 틀어 벽에 꽂힌 단검을 뽑아냈고, 보란 듯이 허공에 띄워 올렸다. 엉겨 붙은 피가 경사면을 따라 느리게 흘렀다.
"얘야, 생각해 보거라. 손쓸 도리가 없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그 사람 자신이 별다른 의욕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서로를 포기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봐. 너는 사납고 버릇이 없는데다가 경청하는 법을 모르지. 다른 이를 아끼려는 노력조차 없이 쉽게 화를 내고 사람을 죽이려 한단 말이야. 만약 내가 사람의 주인이었더라면 나트람을 죽이기 이전에 네 목숨을 먼저 거뒀을 게다."
"나는 나트람이 아니야! 나는 기뻐하는 법도 알고 슬퍼하는 법도 알아! 내 물건이 왜 소중한지도 알고 남을 해치면서 즐거워하지도 않아!"
네르갈은 공포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딤 나겔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러면 잘못이 더 크지 않겠느냐? 부족한 마음을 채워 넣으려 애쓰는 사람과, 멀쩡한 마음을 가지고서도 포악하게 구는 사람 중에서 내가 누구를 택해야겠느냐?"
소년의 입이 항변을 이어가려는 듯 벙긋거렸지만 목구멍에서는 나오는 소리가 없었다. 딤 나겔은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 것을 깨닫고 단검을 그 무릎에 던져 주었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네르갈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딤 나겔은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지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나트람은 실패했어… 완전한 실패였지… 나는 헤이딘에게 큰 죄를 진 거야… 하지만 그게 오로지 천성의 문제였는지, 혹은 내가 일러준 방향이 잘못된 탓인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야… 아니, 어쩌면, 사르코가 태어난 뒤로는 거의 관심을 두지 못했으니까……."
이번의 단어들은 소년을 위한 게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 문장이 혀끝에서 멀어지기도 전에 소년의 목소리가 불쑥 가까워졌다.
"당신도 나랑 마찬가지야. 당신도 비겁자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스스로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서, 속 편히 나트람을 원망할 수도 없어서 나를 혼내고 그 작자를 감싸는 거야. 복수심 때문에 별불꽃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아마 그렇겠지."
"그 작자는… 아버지는 죽는 편이 더 행복했을 거야."
"부제사장 직분에 올랐을 때부터는 분명 그랬을 게다."
딤 나겔은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았고, 대신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가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짐을 대신 맡아야만 했을까? 내가? 딸을 죽인 자에게 기쁨을 선물해 줬어야 했단 말이냐?"
말을 마친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신뿐인 양 구는 젊은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신랄해지려는 혀를 멈춰 세워야만 했다…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현기증은 점점 심해지는데다가 인내심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실 진작부터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딤 나겔은 도시의 중재자가 아니라 소년의 당숙으로서 입을 열었다.
"러스터, 이제 됐으니 데리고 가서 잠이나 재우게. 슬슬 나도 이 대화가 괴로워지고 있거든. 메기도가 어렸을 적엔 사람들이 내게 그 어머니 일을 물어 댔는데 저 녀석을 두고 같은 질문을 받을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으니 그 점은 다행이로군. 누가 그 아비에 그 자식이 아니랄까봐 쌍으로 날 붙잡고 울고 야단이니 말이야. 더 큰 문제는, 나트람은 그래도 얌전한 편이었는데 이놈은 꼬리 잡힌 칼린카라도 되는 것처럼 고함을 질러 댄단 걸세. 실컷 말을 해서 절반이라도 들어 먹히면 다행이지."
소년을 옭아매고 있던 주문을 거두자 러스터의 얼굴에 안도한 기색이 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한밤중에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잘못이야 저 녀석 몫이지 자네 죄가 어디 있겠는가. 일단 재우고, 가만히 있으라고 타이른 다음, 자네는 내일 저녁쯤에 따로 오게. 지하창고 건을 논의해 봐야겠으니. 지금은 나도 쉬어야겠어."
"감사합니다. 남은 밤 평안히 보내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자네야말로. 고생 많았네."
러스터는 네르갈을 이끌고는 침실을 나섰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멀어지다가 정적에 파묻힐 무렵에야 노인의 시선이 침대 밑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은빛 개는 잠자코, 평범한 털짐승인 양 네 발을 바닥에 붙이고 있었다.
"나트람이 단순히 명을 다하진 않았을 걸세. 거대한 표범을… 잠든 분을 봤어. 아는 바가 따로 있을 것으로 믿네."
말이 떨어지자마자 개의 몸이 녹아내렸다가 다시 부풀며 요정의 형상을 갖췄다. 허리까지 기른 은발을 한 갈래로 땋았고, 보라색 눈은 무감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엘드리그는 테네브로즈의 누님이자 저승의 정원사로서, 어둠달이 멸문당한 이후로는 줄곧 피송곳니 장원에서 번견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그자의 몸은 잠든 분이 현계에서 쓸 껍데기가 되겠지요."
"잠든 분께서 깨어나신다고―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지?"
"멸문보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도시 전체에 대한 일입니다."
일드얀의 계획과 영혼을 모아들이는 거목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딤 나겔은 현기증이 낯선 이야기에서 기인한 혼란과 더해지며 두통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엘드리그가 말을 마쳤을 때, 그건 머리를 쪼개 놓는 듯한 통증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가 하나만 물음세. 자네 말로는 일드얀이 단검의 반절이고, 나머지는 잠든 분의 영토에 심겨 있다고 했지. 둘이 만남으로써 단검이 온전해질 거라고."
"그렇습니다. 나무가 도시 전체로 뻗어 나가면서 사람들의 혼을 집어 삼키게 되지요. 신의 자식들이 반역을 꾀한 일은 제국의 역사에도 남지 않았으므로 의회는 이 사실을 일절 모를 것입니다."
"파국이로군. 파국까지 고작 열흘 남짓이 남았다고… 달리 방법이 없나? 단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드얀이 잠든 분을 마주하지 않도록 떼어 놓으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 지하감옥에 가두어 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걸세."
엘드리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로서도 그 방안을 논의해 보았습니다. 미봉책일지라도 시기를 늦출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의회에 가서 말을 전해야겠어. 날이 밝으면 바로 가세나. 나는 일개 요정일 뿐이지만, 자네는 높은 분의 하수인이니 믿을 이가 있을 걸세. 이건 저승의 뜻을 따르는 일이기도 하지만 도시의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도 해. 의회의 가문들이 모두 일드얀의 하수인일지라도, 그래도 이 도시를 걱정한다면……."
격통이 혀를 마비시켰다. 딤 나겔은 가슴팍에서 숨결이 훅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푹 꺾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는 암막 사이로 비치던 빛에 색이 한 겹 더해진 것을 깨달았다. 슈문의 황금색뿐만이 아니었다.
보라색이, 이시 타브의 색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