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23화 (224/258)

223화 아들의 몫 (2)

러스터와 함께 하인 숙소를 나서고서야 네르갈의 시야에 샛노란 별이 들어왔다. 슈문의 별인 문창성이었다. 뜨기는 진작부터 떠 있었을 것이다. 소년은 황무지로 떠난 신관들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별이 떴군."

"쓰러지신 직후에 떴습니다. 이틀간 정신을 잃고 계셨지요."

"의회에서는 말이 없었어?"

러스터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도시의 중앙에서 오간 대화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노인들은 몰락을 앞둔 가문의,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소년이 가주 대행으로, 결정권자로 나서는 상황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주문을 읊듯 중얼거렸다.

"어쨌든 상관없어. 나트람은 죽은 거야. 그러니까 창고 문을 열어."

지하창고로 들어가는 입구는 본관의 서쪽에 위치했다. 밤이 깊은 탓에 복도에는 하인들조차 없었다. 나트람이 기르는, 새까만 칼린카의 눈동자만이 간혹 도깨비불마냥 나타났다가 어둠 저편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그것들 중에서 몇몇은 주인의 명령을 받아 다른 하인들을 감시하는 아첨꾼처럼 네르갈을 빤히 노려보기도 했다.

소년은 무색 마력을 터뜨려 털짐승을 쫓아 보내고서는 지하창고로 들어갔다. 러스터가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중앙실 양옆에 따로 각실이 딸린 구조였다. 그런 방들 중 몇몇은 이제는 유행이 지났지만 버리기에는 귀중한, 옛 시대의 공예품들을 모아두는 데 쓰였다. 따라서 하인들은 완전히 잠긴 채 방치된 문들에 별 의문을 품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것들을 관리한다는 사실만 얼핏 알 뿐이었다.

밀실과 이어지는 문에는 열쇠가 필요한 자물쇠뿐만 아니라 폐쇄 각인 또한 설치되어 있었다. 늙은 하인은 자물쇠를 푼 다음 문고리에 자신의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렸다. 네르갈은 희미한 빛이 문 전체에 명멸하는 것을 보고는 각인의 작동 방식을 알아차렸다. 이 공간에 발을 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수께끼의 해답이나 암호가 아니라 허가받은 사람의 피였다.

"영감 말고 여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지?"

"주인님과… 피송곳니의 가주님이십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딤 나겔이 여기를 알아? 들어온 적이 있어?"

"정확히는, 제가 말씀드리려 했던 게 고작입니다. 그분도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저 역시 작은 어르신의 주검을 옮긴 후로는 아예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자도 공범인가?"

러스터는 답하지 않았다. 네르갈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내가 영감을 벌하지 않는 건 영감이 엄마한테 친절하기 때문이야. 오직 그것뿐이야. 영감이 그 늙은이들에게 똑같이 충성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구역질이 나. 가주란 것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 짓을 했든 간에 말이야. 그러니 내 앞에서 가주님이니 주인님이니 하는 말을 한 번만 더 써 봐. 팔이 부러지는 게 아니라 잘려 나가는 게 어떤 일인지 알려줄 테니까."

소년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러스터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적일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뒤를 내보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여덟 걸음만큼의 간격을 둔 채 늙은 하인의 뒤를 따랐다. 기억과 똑같은 상자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섰고, 그 너머로는 황금색 빛줄기가 너울거렸다. 러스터가 상자로 이루어진 벽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외마디 절규가 정적을 뚫고 나왔다.

"도련님!"

러스터는 반구 속에서, 헤이딘의 겉껍데기를 일으키려 애썼다. 네르갈은 노인을 지나쳐 책상으로 향했다. 마력 등불의 빛은 사물의 윤곽만을 겨우 분간할 세기로 조율된 상태였다. 소년은 광량을 최대치로 올린 뒤 책상 양옆에 설치된 서가를 살폈다. 갖가지 책과 종이 묶음이 엄격한 규칙 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나트람은 여기에 앉아 금지된 마법을 연구했을 것이다.

그는 책등에 붙은 분류표를 눈으로 훑으며 내용을 짐작해 보았다. 대부분이 금지된 마법에 관련된 것임이 분명했지만 왼쪽 서가의 가장 아랫쪽 칸은 예외였다. 거기에 담긴 공책들은 어떤 식으로도 분류되어 있지 않았다. 네르갈은 강렬한 직감에 사로잡혀 제일 낡아 보이는 공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트람의 일기였다. 일기. 백 년도 더 전에, 나트람이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쓰인 것들. 이 좁은 방의 꾸밈만큼이나 강박적인 낱말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안될 것의 긴긴 목록이자 삶에 대한 지침이었고, 너무 자세하고 정교한 나머지 그 무엇도 가둘 수 없게 된 규칙이었다.

그는 다른 공책들을 꺼내 책상에 내던지고서는 그것까지도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소년은 자신이 안다고 믿었던 노인이 해체되었다가 재조립되며 완전히 다른 형상을 갖추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 있었던 것은 엄혹한 요정이 아니라 뼈도 살가죽도 마음도 없는 괴물이었다… 딤 나겔이 그 괴물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영감―영감은 누구를 섬겼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몸을 돌린 네르갈은 노인이 반구 안에서 흐느끼는 것을 보았고, 크게 고함쳤다.

"러스터!"

*   *   *

딤 나겔은 네르갈보다 늦게 깨어났다. 은빛 개가 젊은 하인 하나와 함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암막 사이로 흐르는 황금색 별빛을 알아보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현기증이 일더니 염려 담긴 목소리가 귀 너머까지는 와 닿지 못하고 뚝뚝 끊어지듯이 들렸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그는 가까스로 그래, 하는 대답만을 내뱉으면서 오래된 기억 속에서 허우적댔다. 영혼을 섞어서, 상대가 그저 자연스럽게 자신의 뜻을 따르게끔 하는 주문. 기한은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 나트람은 황무지에서 죽었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고 별불꽃의 작은 도련님께서 방문해 계십니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 반드시 만나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늙은 하인도 함께 있습니다. 이름은 러스터라고 합니다."

하인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딤 나겔을 묵상으로부터 끌어냈다. 나트람을 꼭 닮은 소년의 이름은 그에게도 익숙했다.

"네르갈이 여기 왔단 말인가? 언제부터였지?"

"시간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로 온다면 만나줄 수 있겠네만… 손님을 대하는 예는 아니니 가서 먼저 뜻을 묻게나. 그리고 대답이 어떻든 간에 자네는 가서 쉬어. 만약 만나러 온다고 하거든 문앞까지만 안내하면 될 걸세. 한밤중까지 깨어 있느라 고생 많았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흘러 익숙한 얼굴들이 문간에 나타났다. 하인은 마력 등불의 밝기를 적당히 높인 후 정중한 인사를 올렸고, 침실을 떠났다. 러스터가 마찬가지로, 피송곳니의 주인에게 예를 갖추는 동안 네르갈은 무표정한 얼굴로 노인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바로 곁에, 하인이 쓰던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앉을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나트람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구나."

"그자는 배교자였고 신관 직분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지. 가주 자리에도. 그런데도 당신이 그 모든 짓을 시킨 거야. 교계에는 나서지 않는다는 말로 장막을 치고, 사실은 별불꽃의 주인을 차투랑가 기물로 쓴 거지. 왜 그랬지? 뭘 얻어내려고 그랬던 거야? 여기에도 은빛매가 얽혀 있나? 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딤 나겔은 머리카락이 검고 눈매가 사나운 소년을 그저 바라보았고, 오래된 순간들을 그 위에 겹쳐 보았다. 어렸을 적의 나트람은 질문을 잇달아 터뜨릴 때면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기억은 빠르게 움직여 영혼의 반절을 나눈 날로 도약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네르갈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나트람이 어떤 괴물인지는 알고 있어―하지만 지금까지 별불꽃 사람 모두를 괴롭힌 건 결국 당신네들이야! 그 작자를 진작 죽였더라면, 아니, 제사장 직분을 받들라며 부추기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내 삼촌은 죽어서도 무덤에 묻히지 못했고 형은 미쳤어!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하인들까지 모두 겁먹어 다니지! 누나도 짜증만 내면서 살진 않았을 거야! 모두 당신네 때문이라고!"

하인은 소년의 뒤편에서, 죄스러운 듯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딤 나겔은 나지막한 질문을 던졌다.

"러스터, 이 아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지하창고의 방에 들어가 주인님의 일기를 보았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밝히기에는 저 또한 아는 바가 많지 않아 감히 휴식을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헤이딘 이야기는 또 뭐란 말인가?"

"일전에, 제가 이곳을 찾은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당신께 지하창고 일을 알리려 하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지요. 고발장을 쓸 마음이 없으니 일절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고요. 이제야 말씀드리자면 거기에는 금지된 마법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도련님께서 남긴 연구물들과 그 결과였지요. 그리고 이제는 작은 도련님의 몸도 거기에 놓여 계십니다……."

순간 예리한 파공음이 말허리를 끊고 날아들었다.

"모른 척 하지 마! 난 당신네를 다 죽인 다음 3교구에 끌려가도 상관없어! 신관들이 진실을 밝혀낼 테니까!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다음엔 당신 목이 꿰뚫릴 거야!"

딤 나겔은 화끈거리는 감각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중지와 검지로 뺨을 짚자 뜨거운 피가 손바닥에 와 닿았다. 그는 고개를 슬쩍 돌려 벽면에 꽂힌 단검을 보았고, 다시 러스터에게로, 그리고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하인의 창백한 얼굴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얘야, 네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죄인 같으냐?"

"그러면 뭐란 말이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부려먹고, 자신들은 고고한 척 물러나 있는 게 죄인이 아니라면 뭐지? 당신네 때문에 별불꽃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졌는데―"

울부짖는 네르갈에게로 핏빛 실들이 쇄도한 것은 그 시점이었다. 딤 나겔의 손끝에서부터 뻗어 나온 핏줄기는 꼭두각시 인형의 줄마냥 소년의 몸을 속박하고 조종했다. 네르갈은 의자에 강제로 앉은 채 노인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러스터가 허리를 수그렸다.

"별불꽃의 종으로서, 피송곳니의 주인께 큰 무례를 저지른 점을 대신 사과드립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만 이럴 생각일세. 제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와 말을 나누려면 일단 팔을 묶어 둬야 할 게 아닌가. 러스터, 기회가 왔으니 자네도 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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