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아들의 몫 (1)
정신 지배를 익힌 직후, 네르갈은 한동안 숲을 들쑤시며 작은 짐승들을 잡아 죽였다. 남몰래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이라크가 투덜거리던 말들을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서재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서재에 들어가고서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모습을 몇 번 봤다고.
네르갈은 시간이 날 때마다 생쥐를 풀어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들켜서 심하게 얻어맞은 적도 있었고 다락에 갇히기도 했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증거를 잡은 것은 헤이딘이 죽고서도 네 해가 흐른 뒤였다. 메기도가 나우파나 폐허에서 돌아오고서 두 해가 지난 시점이기도 했다.
* * *
나트람은 며칠간 본가에 없을 예정이었다. 기회였다. 네르갈은 그가 떠난 바로 다음날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평소에는 자물쇠가 안이든 바깥이든 단단히 걸려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하인들이 선뜻 열쇠를 건네주었다. 거기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는 변명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첫째 관문은 통과한 셈이었다.
서재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소박한 가구들이 좁은 방을 더욱 좁게 만들었고, 책상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손발이 있었다. 박제는 아무 장식이 없는 유리병 안에 담긴데다가 화려한 색채를 띠고 있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방문객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네르갈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탁자에 앉고서는 양손으로 박제가 담긴 통을 쥐어 들었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유리병이었고 마력 흐름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동어를 읊자 유리병으로부터 황금색 빛줄기가 새어 나오며 허공에 문양 배열을 만들었다. 소년은 낯선 문양들을 훔쳐본 대로 정렬해 넣었다. 마지막 문양이 제 자리를 찾는 동시에 찌를 듯한 섬광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소년은 투명한 상자 더미 사이에서 깨어났다.
상자들은 담을 쌓으며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고, 각각에는 분류표가 붙은 채였다. 공간군이라거나 양상논리와 같은 낱말 너머로 너덜너덜해진 종이뭉치가 보였다. 흐릿한 빛줄기가 그 사이로 비쳐 들어오며 그늘을 그렸다. 바닥은 먼지라고는 없이 깨끗했고 모든 것이 직각이었다. 네르갈은 아버지의 비밀이 은빛매와 연관이 있으리라는 추측을 멀리 밀어 놓았다. 이곳은 나트람만의 장소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첫인상과는 달리 상자들 사이를 돌아 나오자마자 빛의 군무가 눈앞에 펼쳐졌다. 광반이 천천히 휘돌며 어슴푸레한 공백과 빛으로 이루어진 반구를 그리고 있었다. 그 중앙에 각인이 새겨진 기둥이 십육면체를 위에 얹고 있는 게 보였다. 청람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거기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콧대가 낯설 만큼 익숙했다. 네르갈은 이게 무엇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 들어갔다.
"형?"
안대를 낀 소년은 낡은 전통 복식을 걸치고 있었다. 소년 시절의 메기도가 머리를 길게 길렀더라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옷이 어울리지 않게도 컸고, 검은 안대는 기묘한 존재감을 풍겼다. 형일까? 형이라면, 이 방은 마력 폭풍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메기도와 이상하리만치 닮은 얼굴을 제외하더라도, 소년은 이상했다. 몸은 짚을 채운 헝겊 인형 같았고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반응이 없었다. 이윽고 네르갈은 팔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긴 소매 아래에서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 한쪽 손의 윤곽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오른팔 소매를 걷어 손목이 뭉툭하게 잘려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불길한 직감이 몰려들었다. 없었다. 오른손도, 왼발도, 안대 너머의 눈동자도. 네르갈은 그 살덩어리들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이게 누구인지도. 곧이어 여기에 감도는 황금빛 마력이 금지된 갈래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네르갈은 심호흡하고서는 이 장소를 설명하려 애썼다. 나트람은 배교자였고, 자신의 동생을 백치로 만들어 가두고 있었다… 정말로? 그것만으로 설명되는 일이란 말인가? 무엇보다도 헤이딘은 애완동물에게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에도 이미 노인이 아니었던가? 이 젊음마저도 마력의 작용일까? 혹은…….
그는 주문으로 영혼을 살폈다. 이것까지도 없었다. 여기에 있는 소년은 삼촌이 아니라 텅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넋은 어디에 있는 거지? 주검을 땅에 묻는 대신 썩지 않도록 붙들어 놓은 이유는 뭐지? 그것도 어린 모습으로? 왜? 도대체 왜?
"왔구나."
억양이 약한, 나지막한 목소리는 고함이나 비명보다도 강렬했다. 아버지의 태도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그랬다. 네르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울림이 시작된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제야 그늘에 파묻혀 있던 책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등불을 너머에 둔 노인의 몸은 순전한 암흑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모든 색을 불길에 빼앗긴 채 타오르는 숯 덩어리처럼.
숯이 말했다.
"그건 어릴 때가 더 보기 좋았어. 그래서 돌려놓아 두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여긴 뭐야? 바깥 일로 바쁘다는 게… 여기에 있겠다는 소리였어?"
"네게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부러 들어오는 법을 알려준 거야? 왜? 삼촌을 어떻게 한 거야? 죽은 게 아니었어?"
"죽었다. 땅에 파묻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왜?"
"내 것이니까."
당연하다는 듯 평온한 울림 앞에서, 네르갈은 심장이 불길하리만치 빠르게 들썩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하지만 확연히 커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왜?"
"너는 나를 꼭 닮게 태어났지. 그러니 이런 걸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네가 메기도를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이 커졌다. 하지만 매질을 해도, 다락에 가둬도 생쥐 놀음은 멈추질 않더구나. 다시 선택을 해야 했다."
나트람의 억양은 여전히 단조롭고 강세가 없었다. 본가에서 그토록 화를 터뜨리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네르갈은 빛의 반구 안에 가만히 앉은 채, 이어지는 말들을 듣고 있었다.
"주문은 박제에만 걸려 있을 뿐이지 여긴 마법적인 공간이 아니야. 본관 지하창고의 작은 방을 이어 놓았을 뿐이야. 서재에 있다가도 숨이 가빠지면 이곳에 와서 쉬지. 은빛매의 대모조차도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 아는 사람은 러스터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었다… 항상… 알겠느냐?"
그 질문과 동시에 노인은 몸을 돌려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나비떼처럼 회전하는 빛무리 너머로 무감각하면서도 묘한 기대가 어린 얼굴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헤이딘이 생사는 이제 중요한 문제조차 아니었다.
네르갈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미치광이! 배교자! 고발장을 쓸 거야! 당신은 여기가 아니라 지하감옥에 있어야 해!"
"사이라크는 예를 갖추려는 척이라도 하는데, 네 말버릇은 고쳐질 기미가 없구나."
"당신은 사실 예의든 무례든 신경 쓰지도 않잖아! 난 알고 있어! 당신이 얼마나 이상한지 안다고! 그런데도 모두 당신을 존경하지!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당신이 미친 것처럼 화를 내다가도 혼자 있을 때에는 곧바로 멈추는 걸 수없이 봤어!"
"분노는 좋지 않은 감정이다. 필요할 때에만 화를 내야 해.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짜증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타산적인 판단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돼……."
"그래서? 당신 아들을 죽이고 싶은데 참고 있단 말이야?"
순간 나트람의 얼굴이 무너지듯 일그러졌고,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 짧은 순간에는 기괴할 만큼 강렬한 비탄이 어려 있었다. 네르갈은 딱딱하게 굳은 채, 아버지가 빛의 구체를 뚫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실망스럽구나.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무색 마력이 소년을 옭아맸다. 그 앞에 멈춰선 나트람은 보랏빛 영혼 파편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손톱 한 마디도 안 될 만큼 작은 크기였지만 칼날처럼 예리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은 없으므로 아버지 자신의 넋일 터였다.
"입을 틀어막는 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만약 이겨낸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게다."
* * *
네르갈은 몇 해 전의 꿈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한밤중이었다. 저녁 무렵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기억이 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침대 등받이에 윗몸을 기댄 채 자문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 방을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남들에게 알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형에게 백치가 된 삼촌 이야기를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왜? 왜 그걸 러스터가 하인으로 일하고 사이라크가 2교구에 드나드는 만큼이나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지? 왜 고발장을 쓰지 않았지?
무언가 주문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주문은 깨졌다. 그는 외출복을 대강 걸쳐 입었다. 허울뿐일지라도 아버지가 황무지에 간 동안에는 자신이 가주 대행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 지하 창고에 내려가더라도 막아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네르갈은 하인 숙소로 내달린 다음 러스터를 깨웠다. 마음을 털어놓거나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 늙은 하인이 어머니와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하창고에 그런 방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러스터는 열어줄 것이다. 비록 그가 나트람과 헤이딘의 놀이친구였을지라도.
딤 나겔까지 더해서, 그 넷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두가 어렴풋이 알면서도 숨기고 있는 것이. 그들이 공유하는 과거는 아마도 지하창고의 어느 방과, 종이로 가득 찬 상자들과, 삼촌의 껍데기와도 맞닿아 있을 터였다. 네르갈은 그걸 가만히 덮고 넘어갈 마음이 없었다.
"도련님…?"
"영감, 지하창고에 같이 가야겠어. 확인할 게 있어. 다른 사람들을 깨우면 안 돼."
말이 끝나자마자 러스터의 얼굴이 불운을 직감한 듯 창백해졌다. 노인은 소년의 시선을 피했고,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창고에는 볼 게 없습니다. 곡식 푸대나 낡은 가구 따위를 들여 놓는 게 다예요.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이미 알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아버지라는 작자가 황무지에서 죽건 말건 나는 고발장을 쓸 거야!"
"도련님,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깰지도 몰라요."
"열지 않는다면 모두를 깨워 주지! 본가에 있는 사람들을 죄다 깨운 다음 지하창고에 있는 문들을 하나씩 부수고 다닐 거야! 그러니까 당장 열어!"
네르갈은 으르렁댔고, 무색 마력을 뻗어 러스터의 고개가 자신을 똑바로 향하게끔 했다. 유순한 노견처럼 축 늘어진 눈매에는 오래된 비애와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 수염에 뒤덮인 입술이 달싹였다.
"알겠습니다… 안내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