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20화 (221/258)

220화 소리와 분노 (2)

사르코 부부는 황무지에서 실종되었다. 죽음을 말하는 이는 없었지만 정황이 부족한 탓은 아니었다. 요정들은 반려를 떠나보내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딸마저 잃은 사람의 비애를 알았고, 그래서 딤 나겔의 삶에 일말의 불꽃을 남겨 놓고자 했다… 비록 그것이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피송곳니 장원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은 세 달간,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아자라스가 직접 방문한 적도 있었고 장원의 평민들이 모여든 날도 있었다. 마지막 손님은 나트람이었다.

그는 격려사나 선물 대신 독한 술 한 병만을 가져왔고, 짧은 인사를 제외하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딤 나겔도 사촌형제의 속내를 의심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도리어 반가운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대면이었다. 성년식을 치르고 사르코가 태어난 후로는 서로 바빴던 것이다.

기울어지던 저녁 해가 난간에 막 붙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본관의 서쪽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고, 사물의 윤곽이 구분될 정도로만 마력 등불을 밝힌 뒤 자리에 앉았다. 테라스는 복도와 곧바로 이어져 있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얇은 벽을 불러내 별도의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이윽고 하인이 술잔과 과일 조각이 담긴 접시를 가져왔다. 대화는 벽을 세워 올리고 서로 한 잔씩을 기울인 뒤에야 시작되었다. 나트람이 먼저 운을 뗐다.

"할 이야기가 있어. 네 딸 말이야, 황무지에서―"

"위로할 필요는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기다리고 싶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냥 기다리고 싶어."

딤 나겔은 새로 만들어진 벽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는 엷게 웃었다.

"나는 지금도 반려를 기다리고 있어. 내가 서쪽 테라스에 있으면 그이는 반대편 테라스에 있을 거라고, 그래서 만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지. 그런 거야. 사르코도 그럴 거야."

"아니, 말해야 해. 사르코는 죽었어. 내가 죽인 거야."

"무슨 소리야?"

딤 나겔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그뿐이었다. 나트람은 품에서 장신구를 꺼내 탁자 한가운데에 밀어 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은색 고리 귀걸이의 한쪽이었다. 딤 나겔은 그게 누구의 물건인지, 그리고 나머지 반절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어둠달 아이에게 부탁을 받은 거야? 네가 그 애와 무슨 관련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농담은 그만둬.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아니, 모두 사실이야. 내가 그 평민 놈에게 시켰어. 누굴 죽이든 증인을 설 사람은 없으니 혼자서 돌아오라고. 테네브로즈에게 가서 어떻게 되는지 보고 오라 시켰지. 조사원보다도 먼저야."

나트람은 고개를 꼿꼿이 세워 자신의 사촌형제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만큼이나 검은 눈동자에서는 긴 세월 동안 잃지도 변하지도 않은 무언가가 엿보였다. 그 선명함이 기시감으로 변하려는 찰나 말뜻이 뒤늦게 닥쳐왔다. 딤 나겔은 나트람의 시선을 마주했고, 가만히 있었다. 침묵이 형태를 갖추고 다시 대답으로 변할 때까지. 그리고 한 잔을 더했다.

"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그 명령을 내렸어―내가 네 딸을 죽였어."

딤 나겔은 대본을 완전히 잊어버린 배우처럼 나트람을 바라보았다. 이번의 질문은 마찬가지로 한 어절이었지만 조금 더 길게 발음되었다.

"왜?"

"나를 죽여. 의회가 왜 그랬느냐고 묻거든 테네브로즈에게 정신의 감옥을 쓰라고 해. 칼린카 한 마리로도 알 수 있을 일이야."

나트람은 일어나 딤 나겔의 앞에 섰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초록색 눈이 그 스스로의 팔을 좇았다. 뻣뻣이 굳은 손… 손목이 붙들린 채 위로 움직여가는… 딤 나겔은 순간 목깃과 살갗 사이의 경계면을 느꼈다. 그는 나트람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로, 다시 물었다.

"왜?"

"내가 네 칼린카를 죽였어."

그리고 나트람은 정지했다. 석공의 끌과 정을 기다리는 돌덩어리처럼. 딤 나겔은 표정 없는 눈동자로부터 단어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귓가에서 피가 휘돌았다. 그는 목뼈와 어깨뼈 사이를 메우는 살덩어리를 옷주름 위로 더듬어 갔고, 목덜미에 이르렀다. 다시 목뼈가 거기에 있었다.

무딘 줄톱 같은 뼈의 윤곽…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나트람의 입술이 가죽 주머니처럼 벌어진다… 입은 컥컥거리는 소리를 빠르게 뱉어 내고는 텅 빈 숨결만을 흘린다… 얼굴은 피가 모여들어 붉고 눈은 졸린 듯 반쯤 감겨 있다… 광인의 꿈… 평온한, 혹은 치열한 환희…….

그리고 만족.

딤 나겔은 멈췄다. 손을 떼자 나트람이 무너져 바닥에 누웠다. 그는 사촌형제가 몸을 뒤틀며 쌓아둔 기침을 게워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실핏줄 어린 뺨은 열병에 사로잡힌 소년 같았고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나트람의 눈에서 어두운 불꽃이 튀었다. 기침만큼이나 발작적인 금속성이 귓전을 쳤다.

"조금만 더 해 줘! 조금만 더 하면 돼!"

"내가 널 죽이길 원했어? 그걸 바란 거야?"

"그래, 제발 조금만 더 해 줘! 나를 벌해 줘!"

헐떡이는 목소리는 고양감으로 충만했다. 딤 나겔은 나지막이 되물었다.

"나는 네게 뭐지?"

그는 소년 시절의 어느 날을 기억했다. 그날의 햇살을 기억했고 기침을 내뱉던 사촌형제의 그림자가 어떤 모양으로 움직였는지를 기억했다. 그림자. 바닥에 누운 그림자는 죽음과도 같은 꿈에 머물러 있다… 긴 침묵이 지난 후에, 나트람은 몽환 속에서 대답했다.

"지혜의… 신."

*   *   *

부모님께서 한밤중에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어. 내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셨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잘 될 거라 믿었다고.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밤을 꼬박 지새웠어. 뜻밖의 이야기라서 그런 건 아니야. 그분들은 내게 잘 해 주시지. 헤이딘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지만, 내가 입을 열면 시궁쥐가 말하는 걸 본 사람들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짓지만, 그래도 잘 해 주셔. 내가 감히 불평을 쏟아낼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나아지고 있다는 게 뭘까? 이상한 질문을 멈춘 거?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거? 그래, 나는 이제 그러지 않아. 나는 나아지고 있어. 성년식을 치른 다음에는 신관이 될 테고 동생과도 거리를 두는 중이야. 만나지 않으면 못되게 굴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괴로워… 모든 게… 헤이딘이 옆에 있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옆에 없어도 기분이 나빠… 그래서 가끔은 부모님 앞에서 동생을 죽이는 상상을 해… 그분들께 이렇게 외치는 거야… 내가 정말로 나아진 것 같았냐고… 나는 나아진 걸까?

역사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어. 야스와다는 거대한 처형장이었다고. 제국 곳곳에서 범죄자가 보내지면 우리 명문가 사람들은 그네들을 심문하고 판결하고 형량을 정하는 일을 맡았다고. 그리고 마음에 온정이 없이 잔악한 부류는 제물로 바쳐졌다고. 지금도 3교구에서는 그 일을 하지.

저번에, 은빛매의 대모를 만나 뵈었을 때 이런 말씀을 들었어. 내게는 3교구가 어울릴 거라고. 이유는 알고 있어. 나는 누구보다 잘 싸우고 겁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곱씹을수록 거기에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커져. 그게 사실은 지하감옥에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고.

심장이 조용할 때면 나는 죽어 있는 느낌이 들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지루하기만 해. 칭찬을 들어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귀한 물건을 잃어버려도, 다리가 부러져도 마찬가지야. 나는 까마득한 어둠 속에 내버려져 있지. 그러다가 가끔씩만, 아주 가끔씩만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거야. 널 생각하고 러스터를 생각하고 부모님을 떠올릴 때에만. 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상상을 하면서 심장이 두근거릴 때에만. 나는 그러면 그 순간을 포기할 수가 없게 돼. 기분이 아무리 나빠도, 토할 만큼 끔찍해도, 암흑보다는 나으니까.

물론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게 두려운 탓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거야. 그게 옳을지도 몰라. 네 말을 떠올리면서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어… 하지만 동생은 달라. 헤이딘을 앞에 두면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그냥 터져 버릴 것만 같아. 피가 너무 빠르게 돌아서, 피가 너무 뜨거워져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애가 차라리 죽기를 기도할 정도야. 정말로 그럴 뻔한 적도 있어.

언젠가 나는 정말로 끔찍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런 느낌이 들어. 그게 아주 역겨워.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구역질만 한없이 올라오지. 예감이 아주 심해지는 날에는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내고 손을 온종일 씻어. 하지만 그 순간을 못내 기다리기도 해.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 이런 고민이 잊히고 인내마저 닳아 사라지는 날을…….

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딤 나겔, 나는 네가 되는 꿈을 꿔. 때때로. 아니, 사실은 꽤 자주. 매일. 모두를 사랑하는 게, 그만큼의 사랑을 돌려받는 게, 그리고 사랑할 만한 것을 찾아내는 게 네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 너는 숨 쉬는 것처럼 그 일을 해내지. 나는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어둠 속에서 옳은 방향을 찾으려고, 그러면서 보이지도 않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들을 모아들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말이야.

내게 세상의 규칙을 알려준 건 한 세기를 살아낸 어른들이 아니라 바로 너였지.

네가 내 신이라면, 네 말이 바로 성전이라면 믿겠어?

*   *   *

나트람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손님용 침실이었다. 방은 좁았지만 아늑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윗몸을 일으켰고, 딤 나겔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명이 팔꿈치를 얹으면 절반이 찰 만큼 작은 원탁 앞에 앉아 술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나트람이 가져왔던 유리병은 이제 절반쯤이 빈 채였다.

"딤 나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부르자 금발의 요정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미소로 물었다.

"내가 네 신이라고 했지. 지혜의 신이라고."

나트람은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딤 나겔의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터뜨릴 찰나를 놓치고 식어버린 격노 뒤에는 미지근함이 남는다. 미지근한 증오거나 절망이거나 어쨌건 사람을 억지로 예리하게 만드는 것들.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게 하는 동력. 그것이 설령 거대한 착오일지라도.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거창한 존재가 아니야. 주문을 다루는 실력은 너나 헤이딘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모자라고, 감정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해. 반려는 내가 비아냥댄 다음 사과하는 게 습관이라고 했지. 싸울 때에는 항상 그런다고. 나는 평범한 사람이야. 울고, 웃고, 화내는, 평범한 사람. 그러니 네가 나한테 바라는 게 신의 징벌이라면, 나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어. 그건 네 망상일 뿐이야."

나트람은 입을 벌렸다. 공기가 목구멍을 넘어가며 톱이 갈리듯 아아아 소리를 냈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는데*

"난 네 딸을 죽였어. 그러면 너는 날 죽이고 싶어 할 거야."

"네가 기뻐할 일은 하고 싶지 않아. 그건 내게도 복수가 아니야."

고개를 내저은 딤 나겔은 읊조리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정말로 죽고 싶었더라면 이미 그랬을 거야. 방법은 많아. 피의 창을 스스로에게 겨눌 수도 있고 머리에 염동술을 가할 수도 있어. 혹은 마력 부종 억제제를 구해서 열흘 치를 한꺼번에 들이킬 수도 있겠지. 그 무엇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하지만 너는 나한테 왔고, 나한테 죽여 달라 부탁하고 있어."

그리고 딤 나겔은 일어나 나트람의 앞에 섰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가 환영 모형처럼 깊었다. 각인 공예사들은 차투랑가 놀이판 말고도 많은 물건을 만들었는데 그들의 선반에는 세계를 교묘하게 접어 넣은 구슬도 놓여 있었다. 주먹보다도 작은 유리알에 눈을 가져다 대면 너른 들과 강과 산줄기를 볼 수 있고 그런 물건들은 아이에게 도시 바깥을 가르칠 때 쓰이곤 했다.

"너는 기대하고 있는 거야. 내가 해답을 안겨 주길 바라는 거야. 어릴 때 너는 궁금한 게 생기면 무엇이든 내게 먼저 물어봤으니까, 그때처럼 나를 작은 스승으로 삼으려는 거야. 그렇지, 나트람?"

나트람은 절박한 심정으로 시선을 받아내다가 밀려나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의기소침한 낱말들이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제발… 나를 죽여. 나를 벌해 줘. 꼭 내 신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요정 한 명으로, 사람 한 명으로라도 그렇게 해 줘. 제발. 내가 헤이딘까지 해치기 전에."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네게는 죽음조차도 징벌이 아닐 테니까. 고발장을 쓸 생각도 없어. 그건 미치광이의 자기만족을 돕기 위해서 별불꽃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는 일일 뿐이야. 별채에 갇힌 네 동생도. 의회 사람들이 진실을 알면 나보다도 배교자가 제일 먼저 처형장으로 보내지겠지. 그러니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으려 해."

일순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싫증이 난 독자가 읽고 있던 책을 뒤엎어 책등이 보이게 하듯 세상마저 그렇게 면을 바꾸는 듯했다. 딤 나겔의 목소리가 그만큼의 무게를 이고 가까워졌다.

"네가 예전에 만든 주문이 있었지. 영혼을 섞는 것 말이야. 한쪽이 다른 쪽을 평생토록 거느리도록. 직접 써 본 적은 있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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